다행히 밤새 내리던 눈은 그쳤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리어 더 거세게 몰아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긴 여정을 떠나기 그리 좋지는 않은 날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서둘러 말을 몰았다. 더 늦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장작 타는 소리, 사모바르의 물이 끓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근처였지만 학생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그마저도 자신의 공부에 집중한 듯 보였다.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알렉산드르는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훅 밀려오는 온기가 근육을 매만졌다. 몇 년째 말을 타는 것이지만 혈통 좋고 사나운 군마는 다루기가 여간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문 앞에서 살짝 두리번거린 그는 카페 구석의 테이블로 갔다.


"실례합니다, 프로이라인. 합석해도 될까요?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군요."


조그마한 책을 읽던 금발의 소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르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친절하신 분이군요. 음료는 제가 대접하도록 하죠.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커피?"

"...코코아로 부탁드려요."

"이런, 프로이라인의 취향을 고려히지 못했군요. 바로 대접하도록 하죠."


알렉산드르가 음료를 가지러 간 사이, 그녀는 읽던 책을 덮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뒤돌아 예의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조숙한 황녀시군, 알렉산드르는 생각했다. 


커피 몇 모금을 홀짝거린 후, 알렉산드르는 그녀의 여행 가이드북을 보면서 물었다.


"프로이라인께서는 여행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그리 내켜하지는 않아요. 이건 그냥..."

"그냥?"

"필요해서요."


알렉산드르는 실수했다는 듯 제 머리를 툭 치면서 말했다.


"제가 숙녀분의 개인 사정을 여쭈었군요. 실례했습니다."

"괘념치않아요."

"아니,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프로이라인의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꼭 사죄를 드리고 싶어서요."

"올가라고 합니다. 사죄는... 신사분이 멋진 점심을 추천해주시는 걸로 할까요? 이곳은 초행길인지라."

"그러면 마침 점심시간이니 제 단골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저는 알렉산드르라고 합니다."


슬쩍 창 밖을 본 알렉산드르는 바람이 많이 잣아들었음을 보고 말했다.


"마침 바람이 잔잔하군요. 지금 갈까요?  에스코트하겠습니다."


큰 거리로 나온 그들은 잠시 길가에 서있었다. 빈 마차 두 어개를 보낸 알렉산드르는 한 마차를 잡아 탔다. 알렉산드르는 맞은편의 올가를 보며 말했다.


"이제야 인사 올립니다, 황녀전하.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이바노프 기수입니다. 잠시간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 말을 들은 올가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황녀라는 사실은 각국 러시아 공사관, 오흐라나의 장과 차르의 직계, 그리고 눈 앞의 기수만이 아는 기밀이었다. 황녀의 얼굴에서 당혹감을 읽어낸 알렉산드르는 올가를 안심시키려 빠르게 덧붙였다.


"아, 안심하셔도 됩니다. 우선 이 마차는 오흐라나 소속일 뿐더러..."


그리곤 자신 옆자리의 의자 시트를 들어 올려 권총 한 정과 귀금속이 가득 든 주머니, 위조 여권 등이 들어있는 슈트케이스를 꺼내며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방음도 되거든요."


올가는 그제야 안심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미리 알려주세요. 그래야 그에 맞춰 행동할 것 아니겠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그래서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갈 생각인가요?"


"우선 프랑스로 갈 예정입니다..."


눈은 다시 내리기 시작해, 두 사람이 탄 마차의 뒤로 바퀴자국이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