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하는 시부야의 거리를 걸은 지 대략 5분쯤이 지난 뒤에야 도겐자카의 양복점 앞에 도착했다.


길가에 늘어선 2층짜리 서양식 건물들 중에서, 모퉁이에 자리한 그 양복점은 다른 건물들보다 유독 크고 높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이제 곧 신학기의 시작이라 사람들이 몰린 것인지, 평소에도 이렇게 장사가 잘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안으로 오고 나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거나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남학교와 여학교 교복 모두’ 를 판매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양복점 하나에 도쿄의 얼마나 많은 학교가 교복 제작과 판매를 위탁한 것인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빨리 학교 교복 찾아서 사고 가야겠다.’


경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양복점 안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가방 안의 지갑이 멀쩡히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양복점 내부는 넓고 바닥이 깔끔한 데다 조명도 화려해서 저절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만들 법한 디자인이었다. 옷들을 깔끔하게 보관한 뒤 주변에 걸어 두고 손님들이 보게 만드는, 서양식의 양복점 디자인으로 따지자면 아마 이곳이 가장 높은 수준의 양복점일 거라고 경하는 생각했다.


‘구별 방식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한 쪽은 남학교로, 다른 한 쪽은 여학교로 나눈 게 아닐까 하고 경하는 생각해 보았지만 줄마다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성별로 나눈 것은 아닌 듯했다.


‘오십음도 순인가?’


경하는 다른 가능성인 오십음도식 정렬 방식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가나를 모음인 ‘아, 이, 우, 에, 오(あお)’의 5단과 자음인 ‘아, 카, 사, 타, 나, 하, 마, 야, 라, 와(あわ)’ 의 10행으로 정렬한 뒤 조선어로 ‘ㅇ’ 혹은 ‘ㄴ’ 정도 발음의 받침인 ‘ん’을 추가한 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오십음도식 정렬 방식에 의하면, 도쿄 제 1 고등학교의 첫 글자인 ‘と’는 ‘お’단의 ‘た’행이었으니 전체 기준으로 20번째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경하는 천천히 맨 왼쪽의 “아이카와 여학원”을 기준으로 하고, 천천히 “도쿄 제 1 고등학교”의 “と”부분을 향해 걸어 갔다. 디자인은 세세하게 다르지만 전부 백색이나 흑색을 사용한 단조적인 교복들을 지나치며, 마침내 경하는 도쿄 제 1 고등학교의 교복이 걸린 곳을 찾아 냈다.


‘도쿄 제 1 고등학교’


그렇게 쓰여 있는, 행거 맨 끝쪽에 달린 종이를 보고 경하는 그 행거 앞으로 가 자신의 체격에 맞는 크기의 교복을 찾기 시작했다. 춘추복 - 하복 - 동복 - 망토 순으로 늘어서 있는 상의와 바지들 중에서, 경하는 열심히 자신의 몸에 맞는 크기의 교복을 찾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다른 고등학교보다 더 고급 재질의 옷감을 사용하고, 더욱 반짝거리는 단추와 장식들을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그 교복들의 틈을, 경하는 양 손으로 벌리고, 들여다보고, 다시 닫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단 하얀색의 입기 편한 춘추복 긴 소매 셔츠와, 빛과 광택이 나는 검은 바지와 상의를 챙긴 뒤 경하는 다시 하복들 중에서 땀이 잘 나지 않고 시원하다는 반팔 셔츠와, 아까와 비슷한 색상이지만 통풍이 잘 되는 얇은 재질의 바지와, 여름에 상의 대신에 차는 검은 넥타이를 챙겼다.


그리고 그것들을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은 뒤 마지막으로 설명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춘추복과 디자인이 비슷하지만, 더 두껍고 난방이 잘 되는 따뜻한 재질의 바지와 상의, 그리고 춘추-동복용 망토까지 그 바구니에 담아 경하는 교복들을 전부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계산대가 어디였더라?’


그렇게 생각하며 단추와 부속품들을 챙길 무렵에, 경하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야나기 씨?”


그 자신을 부른 일본어의,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있었던 것은, ‘도쿄 고등 여자사범학교’ 교복의 행거 앞에 서 있는 마토이 아이코였다.


“...마토이 양? 어째서 이런 곳에...”


흑백 색상 배합의 여성용 양복을 입은 그 소녀를 경하는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와 경하의 유일한 접점이라면 자신의 집에 들어온 고양이 ‘히로’를 찾아내 그 아이를 다시 돌려준 것이 유일했었다.


그저 지나가고 언젠가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과, 겨우 하루 만에 만나는 우연의 확률은 대체 얼마나 높은 것일까. 경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은 흑발과 고양이처럼 큰 눈동자를 지닌 마토이 아이코를 쳐다보며, 어제와 변함이 없는 유창한 일본어로 대답했다. 


“아, 저는... 보다시피, 교복을 사러 왔어요. 입학하는 학교의 교복을 여기서 판매한다고 해서 말이죠.”


그 말을 들으며 경하는 아이코의 한쪽 손에 들려진 바구니를 보았다. 그 안에는 흑색과 붉은 줄무니와 스카프의 배합을 한 긴 소매의 춘추복 - 혹은 동복 - 의 세일러복과 비슷한 디자인에 색 배합을 백색과 청색 줄무늬로 바꾼 반팔 소매 세일러복이 담겨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경하는 소녀가 자신과 나이대가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같은 나이였을 줄은 상상할 수 없었다. 구제고등학교와 고등여자사범학교의 입학 연령은 동일하다는 사실을 경하는 다시금 떠올렸다.


“네, 저도 교복을 사러 오긴 했지만... 우연이네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경하는 비록 간접적이긴 했지만, 아이코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를 알게 되었다. 도쿄 고등 여자사범학교라면 가쿠슈인과 고코쿠지(護寺) 근처에 있는 여학교였다. 아마 그곳은 여학교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학교가 아닐까, 하고 경하는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그 학교를 제국대학으로 승격시킨다는 소리도 들어 보았으니까.


“어, 일단... 이야기는 밖에서 할까요? 여기는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니까 서서 이야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도 이런 우연에 조금 당황한 것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르다 결국 자리를 옮기자는 간편한 주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틀린 것도 아닌 게 이 양복점에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어 가만히 서 있다가는 방해가 될 테고, 서 있을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아 나가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경하 또한 생각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경하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바구니를 들고, 자신과 나이가 같은 소녀와 함께 출입구 근처의 계산대로 가 교복의 값을 지불한 뒤 구겨지지 않게 포장한 것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양복점 밖으로 나갔다.


“그... 야나기 씨는, 제 1 고등학교에 입학하시는 건가요?”


아이코 역시 경하처럼 행거의 한쪽에 달린 그 종이를 보았던 것인지, 시부야의 길거리를 걷는 도중에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단순히 입학 여부만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고등학교에 입학하냐는 경외심 비슷한 것도 섞여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쿄에 있는 제 1 고등학교는 1886년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서 최초로 세워진 제국대학의 예비 교육 과정을 담당하는 구제고등학교였고, 그곳의 학생들은 전부 일본에서 최상위급의 성적을 자랑했기에 그들은 졸업과 동시에 도쿄제국대학에 자동으로 입학하는 특전을 누릴 수 있는, 말 그대로 꿈의 학교였던 것이다.


한낱 조선인에 불과한 경하가 어떻게 합격을 했는지는 자신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경하는 확실히 제 3부 - 의학과 시험에 응시를 하였고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으니 합격했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네. 일단은요....”


굳이 “일단” 이라는 말을 뒤에 붙였던 것은, 이런 것으로 자만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행복해하는 바보 같은 짓은 어렸을 적에나 하던 것이었다.


“아, 정말인가요?... 처음 들었어요! 그런 학교에 입학하셨을 줄은 몰랐는데... 학과는요?”


아이코는 저 황거 부근으로 해가 비치는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의학부예요. 마토이 양은 아마... 도쿄고등여자사범학교, 에 입학하시는 거죠?”


경하는 그 칭찬과 경외심이 섞인 아이코의 눈빛이 묘하게 부담스러워, 자신의 학업에 대한 화제를 아이코에 대한 학업으로 돌려 버렸다. 결코 인위적으로 느껴지지도, 귀찮다고 말하는 것 같지도 않도록 애를 쓰며 경하는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네, 맞아요. 학과는... 영문학부예요.”


영문학부? 조금 갑자기 떠오른 사실이었지만, 영어라면 경하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모국어인 조선어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배운 일본어 다음으로 배운 것이, 바로 영어였으니까.


그것을 익히는 것은 일본어에 비하면 상당히 어려웠지만, 그래도 누나가 도와 주었기에 경하는 금세 영어도 독해를 하고 회화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칭찬할 사람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부모님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고, 누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런가요.”


경하는 그렇게 답하고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의미였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다가오지 않고 은유적으로 들리도록 짧고 간단한 대답을 했다. 그것을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지 못한 것인지는 몰라도 아이코는 이내 입을 닫고 경하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그 학교라는 주제에 대하여 경하가 필요 이상으로 대화하기를 거부한 것은, 이제 그것은 경하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의미도, 가치도 지니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하는 무슨 짓을 해도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래 전에 깨달았고, 유일하게 경하를 사랑했던 누나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제 경하는 그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반응에 기뻐하는 것도, 반응을 망상하며 환각에 빠지는 것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경하에게 환각과 환상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경하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려졌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적에 부모가 살아 있고, 그들의 집에서 살고, 그들의 관리를 받고 있을 뿐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버려진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경하는 조선인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경하는 조선인들을 배신하고 그들의 부를 빼앗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하의 입으로 들어간 쌀 한 톨, 물 한 방울, 심지어 방에 있는 모든 가구들과 마룻바닥의 대들보 하나마저도 조선인들의 것을 빼앗아서 얻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하는 일본인들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경하는 그들의 권리를, 지위를, 부를 탐하고 그것을 빼앗으려는 하극상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일본인들이 누려야 할 것들을 경하는 한낱 조선인인 주제에 그것을 빼앗아 제멋대로 향유했던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경하는 조선인들에게도, 일본인들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것인지 그 답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경하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자신이 유일하게 타고 난, 그 두뇌로 마침내 알고 싶지 않았던 답을 찾아 냈다.


“조선인이니까?”


너무나도 말이 되지 않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었고 경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경하가 멸시당하고 차별을 받으며 온갖 욕을 듣고 사는 것은- 전부 유경하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경하는 ‘조선인’ 이면서도 ‘조선인들’을 배신했기 때문이었고, 일본인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인’ 이면서도 ‘조선인으로서의’ 하인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본인들의 것을 빼앗으려 한 하극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조선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행위까지 포함한다면 경하는 조선인들에게도 ‘조선인이면서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 때 경하는 깨달았다. 조선과 일본이 동등한 위치에서 양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조선인들은 자신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경하와 일본인들을 미워하였으며, 그 자리를 자신들이 되찾고 싶어 하였고 그 중 몇몇은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외국으로 가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주인과 하인” 으로서의,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의 관계를 끊고자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부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조선인들을 두려워하였으며, 그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을 처벌하고, 항의를 무시하고, 언론을 폐간시키며 “주인과 하인”으로서의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 ‘주인으로서의 일본인과 하인으로서의 조선인’ 이라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통용되는, 절대적인 명제는 조선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았고 이 명제를 붕괴시키고자 하였으며, 일본인들은 어떻게든 그것이 붕괴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선인들에게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위로, 하다못해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기를 원했지만 일본인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조선인들을 어떻게든 자신과 다른 위치에, 자신들의 아래에 놓인 조선인들의 상황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나쁜 마음이 사라지고 착한 마음만이 가득해져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이 허용되거나, 아니면 이 갈등과 부패가 일본인들의 자리마저 갉아먹고 들어가 그들마저도 조선인처럼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이 위선적인 관계는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것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경하는 그들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조선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배신하고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며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일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자리와 권력과 부를 빼앗으려 하극상을 벌였다며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경하는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위선적이고 모순적인 행위는 조선과 일본이 동등하게 설 수 없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용납받을 수 없었던 죄악이었다.


만약 더욱 큰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일본인들의 권력을 분쇄하고 조선인들의 하인으로서의 신세를 해방시킨다면, 경하는 아마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사람들의 분노에 발길질을 당하며 개처럼 끌려나올 신세가 될 것이다. 조선의 해방을 막은 경하는 해방된 조선인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니까.


경하의 이 괴로운 생애가 사라지려면, ‘조선인’ 으로서의 경하나 ‘일본인’ 으로서의 경하 중 어느 한 쪽이 사라지거나, 누나가 그리 하였듯이 지금까지의 모든 벌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경하가 일본인들에게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면 일본인들에게 멸시를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경하가 지금처럼 조선인이더라도, 조선인들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조선인들로부터 증오를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한 쪽을 선택했을 때, 다른 한 쪽의 미움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모두에게 미움받고 살아 가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았을 것이다. 경하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조선인’ 이라는 죄를 만들어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저기, 야나기 씨?”


아이코는 거리를 걷던 중, 전차의 정류소가 저 앞에 보일 때 쯤에 경하에게 말을 걸었다. 단순히 경하가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는지, 슬슬 대화의 소재가 떠오른 것인지, 아니면 떠오르지 않아서 경하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기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 네, 왜 그러시죠?”


경하는 옛 기억을 재생한 뒤의 비관적인 그 여운과 상상에 빠져 있던 도중에 아이코의 목소리가 들려 오자 즉각적으로 반응을 했다.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이래서 조선인은 안 된다며 일본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기억 때문이었을지는 몰라도 경하는 반응을 빠르게 하는 편이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 하세요? 아무 말도 안 하시면서.”


묘하게 미소를 띄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같은 나이의 소녀의 모습을 보며, 경하는 기분 탓일지도 몰랐지만 아주 약간, 그 비관적인 여운이 희미해진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기분 탓이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경하의 인생은 불행만이 가득했으니까, 이제 와서 그 덧없는 환상과 환각에 빠지지 않는 한 경하가 행복할 일은 없었다.


“그냥... 옛날 일을 조금 떠올렸어요.”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하지만 연기에 지나지 않는 그 대답으로 도쿄의 낮은 해가 하늘의 정중앙에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며 낮의 과반수를 넘긴 채 저녁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저녁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나 남은 채였다. 


경하는 아이코의 그 묘하게 붉은색을 띄는 흑색의 눈동자를 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 소녀의 시선에 경하는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이 들켜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가요.”


그렇게 도쿄의 낮은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