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을 멋대로 각색한 내용이므로 원작 고증 개판임

- 창작은 창작일 뿐, 작가는 나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님

- 술 마시고 써서 내용 엉망이니 감안해주길 바람

- 살짝 야한데 또 너무 야하지는 않아서 19금은 안 검



 "편하게 앉으십시오. 그냥 담소나 나누자고 불렀으니."


 젊은 장교가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결코 느긋하게 즐길 수 없었다. 침략자 독일의 병사들에게 에워싸인 상태에서, 이 마을을 관리하는 주둔 장교의 집무실에 앉아 차를 대접받는 중이니. 친절한 미소를 짓는 장교와는 반대로 그들을 감시하는 병사들의 표정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한마디 말실수만 해도 곧장 대검을 뽑아 목덜미에 꽂아넣을 기세였다.


 덕분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네 명의 신사는 안전부절 못하며 다스 중위의 환대에 어울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차를 홀짝이고 다과를 집어먹는 모습을 네로는 흥미롭게 주시했다. 도무지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나치 장교의 행태에 신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바짝 긴장했다. 


 "그러고 보니 네 분은 모두 안면이 있지 않으십니까?"


 네로의 말에 신사들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한 때 인근에서 열렸던 그림 콩쿨에 심사위원으로 출두했던 이들었다. 수많은 출품작들을 뒤적이며 옥석을 가리던 당시의 일이 아직도 선명했다. 심사위원 간 의견 차이로 인해 잠시 분란도 있었지만, 좌우간 만족스러운 합의에 도달했던 대회였다.

 

 신사들이 긍정을 표하자 네로가 1인용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 점의 그림을 세워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비슷한 작풍으로 오후의 호숫가를 그린 정물화였다. 제법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돋보이지만, 대규모 콩쿨의 심사관을 담당할 정도로 연륜이 깊은 그들의 눈에는 일개 얼치기의 작품이었다. 

 

 두 그림을 번갈아 지목하며 네로가 입을 열었다.


 "오늘 네 분을 모신 건 다름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한 품평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콩쿨에서 그런 요직을 맡으신 분들이니 안목이 탁월하시겠죠?"


 그러자 어흠어흠, 헛기침을 하며 신사 한 명이 물었다.


 "대충 그렇습니다. 한데 저건 누가 그린 작품입니까?"


 좋은 질문이라는 듯 네로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왼쪽은 제가 그린 그림, 오른쪽은 경애하는 총통께서 그리신 그림입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사색이 된 신사들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발을 벌벌 떨었다. 한쪽은 주둔 장교의 소작, 반대쪽은 독일 총통의 소작이라니. 애당초 부추키는 의도 자체가 빤한 질문이었다. 겁에 질린 신사들은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자칫 엉뚱한 대답으로 심기를 거슬렀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선발 주자가 없자 네로는 흠, 목젖을 한번 떨더니 가장 바깥쪽에 앉은 신사를 지목했다. 군청색 코트에 금빛 콧수염을 기른 둥글둥글한 인상의 사내였다. 하필 자신이 첫 순서로 꼽히자 그는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며 그림들을 대조했다. 기술적으로 평가하자면 두 작품 모두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허나 순수한 감평을 요구하는 게 아님을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여, 역시 총통 각하의 작품이 더 훌륭한 듯하군요. 예, 예술적으로 아주 복합적인 가치를 지닌 명작입니다."


 애써 답변을 쥐어짜며 신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히틀러 총통은 나치 독일에서 신적인 권위를 지닌 통수권자였다. 비위를 맞추려면 응당 히틀러를 찬양하는 쪽이 더 수지타산이 맞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네로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더니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아, 그 말씀은 즉, 저는 예술에 소질이 없다?"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철컥, 총집을 떠난 네로의 루거 권총이 신사의 미간을 겨누었다. 그의 검지가 방아쇠에 맞닿는 순간, 총구가 불을 뿜으며 굉음을 발사했다.


 탕!


 "자, 그럼 다음 분께 묻도록 하죠."


 천연덕스럽게 총을 내리며 네로가 말했다. 머리를 관통당해 즉사한 신사의 사체는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다가와 수거해갔다.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소파와 마룻바닥을 흠뻑 적셨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사태에 신사들은 전부 대경실색하여 바닥만 내려다 보았다. 


 검은 제복을 차려입은 나치의 장교가 마치 중세 전설에 등장하는 낫을 든 사신처럼 느껴졌다. 


 네로가 다음 순서로 지목한 신사는 갈색 콧수염에 안경을 낀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허둥지둥 두 작품을 비교하며 용을 쓰던 그는, 방금 사망한 신사와는 정반대의 답변을 제시했다.


 "다, 다, 다스 중위 님의 작품이 훠, 훨씬 뛰어나군요! 제 살아생전 이렇게 대단한 걸작은 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그 순간 네로가 두 눈을 부라리더니 버럭 화를 냈다.


 "이 놈! 네가 감히 총통 각하의 작품을 모욕해!"


 호통과 동시에 다시 루거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갈색 콧수염의 신사도 선두주자와 별 차이 없는 말로를 맞고 말았다.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과 함께 그의 몸뚱이가 풀썩 나자빠졌다. 병사들이 그의 시체를 치우는 동안, 네로는 다른 신사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검은 콧수염을 기르고 매부리코가 튀어나온 배불뚝이 신사였다. 혓바닥이 꼬였는지 그는 그저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기어코 만족스러운 대답을 고심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네로가 변덕을 부리는 쪽이 더 빨랐다. 그가 무심하게 총구를 겨누며 내뱉었다.


 "아니, 별로 궁금하진 않군요."


 탕! 어김없이 총성이 울리고 신사가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중후한 외모의 노신사였다. 각진 하관과 풍성한 눈썹이 어우러져 평론가보다는 장군에 더 부합하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앞서 세 사람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걸 목도한 그는 이미 살 길이 없다고 체념했는지 꽤나 의연한 태도를 고수했다. 


 묵묵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노신사를 주시하던 네로는 루거 권총을 총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노신사가 멍하니 수락하자 네로는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심사위원 분들의 고견은 이 정도면 충분할 듯싶군요. 사실 저도 소년 시절 그 콩쿨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콩쿨 참가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 노신사의 눈썹이 충격으로 꿈틀거렸다. 다른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우승작을 선별할 때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네로라는 이름의 소년이 제출한, 비록 투박하지만 참신하고 개성적인 면이 돋보이던 작품을 지지했던 것이다. 


 과거 그를 매료시킨 얼굴도 모르는 수재와 목전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교 사이의 연결점을 찾는 건 아무리 늙었어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아쉽지만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약속이 잡혀있어서 말이죠."


 손목시계를 살피던 네로가 호들갑을 떨며 일어섰다. 노신사 또한 얼떨떨하게 일어서며 병사들의 인솔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을 나서는 노신사를 응시하며 네로는 잠시 과거의 편린을 곱씹었다. 만약 그 때 다른 심사위원들이 저 자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신이 우승을 차지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알 수도 없고, 숙고할 가치도 없었다. 이미 나치당에 투신한 이상, 그 때를 되새겨 봐야 무의미했다. 마치 총통이 더는 빈의 예술가 지망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중위님."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온 병사가 그를 불렀다. 그러자 네로는 고갯짓으로 대꾸하며 병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길게 뻗은 복도를 따라 마지막 손님이 대기하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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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익, 낡은 경첩이 시큰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육중한 나무 문이 열리자, 정면에 위치한 창문에서 찬란한 햇살이 만발했다. 일년 중 유난히 해가 밝은 시기였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는 소풍 가방을 챙겨 나들이를 떠나기 딱 알맞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우유를 팔던 그 시절의 자신이라면 심오한 감상에 젖어 새로운 화풍을 고안하고 있었으리라.


 지금이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관심을 끄는 건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선 한 존재 뿐이었다. 


 "네로? 정말 네로 맞아?"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이 물었다. 네로는 대답 대신 문을 닫고 방 내부로 들어섰다. 뚜벅, 검은 제복을 입은 나치 장교가 나타나자 여인은 어깨를 살풋 붙들며 여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덮은 보라색 숄이 시냇물처럼 쇄골 아래로 흘러내렸다. 


  네로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자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상대를 주시하던 네로가 입을 열어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로아."


 그러자 이로아가 도로 고개를 들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네로를 응시했다. 파르르 손을 떨던 그녀가 살며시 중얼거렸다.


 "무사했구나, 네로."


 비록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이로아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앳된 소녀티를 벗고 이제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난 어릴 적의 친구. 이 저주스러운 장소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던 몇 안되는 상대. 마을 제일가는 부호, 코제츠의 외동딸이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던 추억 속의 그녀.


 윤기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은 산뜻이 굽이치며 등허리까지 닿았고, 푸른 두 눈동자는 바다를 담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창백한 피부 위로는 도톰한 입술이 조각처럼 콕 박혀 있고, 어느덧 풍만하게 자란 신체의 굴곡은 확연하게 그 태를 드러났다. 평범한 시골 아낙들의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그 수수한 복장이 그녀의 미모를 덧칠하지는 못했다. 


 작은 오리처럼 귀엽고 활달하던 추억 속의 소녀는, 이제 한 마리 백조가 되어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네로를 주시하는 동공은 어릴 적과는 확연히 달랐다. 네로를 향한 순수하던 선망과 우정, 그리고 서투른 호감의 씨앗은 시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실망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이라는 무거운 감정이 전부였다. 


 복잡미묘한 낯으로 네로를 응시하던 이로아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녀가 한탄처럼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로아."


 "내 이름 부르지 마. 역겨워."


 야멸차게 쏘아붙인 한마디에 네로는 미간을 좁혔다. 자신을 노려보는 여인의 눈총을 마주받으며 네로는 침묵을 지켰다. 장기간 만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이로아라는 사람을 매우 잘 알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로새겨진 것은 원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의 조각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네로를 역겨워하는 기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어긋난 자리에서, 이런 어긋난 인연으로 재회했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마음 한켠에 네로를 향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무슨 낯으로 날 부른 거야? 그런 짓들을 벌이고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말장난하자는 거야?"


 이로아의 반발에 네로는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건물 밖의 풍경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이로아는 네로와 접촉하고 싶지 않은지 뒷걸음질치며 거리를 벌렸다. 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찰랑이며 그녀의 동선을 따라 꽃잎처럼 흔들거렸다.


 "내가 장님인 줄 알아? 마을 사람들을......마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잖아. 그래 놓고서 뻔뻔하게 내 앞에......."


 "그게 뭐가 문제인데?"


 덤덤하게 던진 한마디에 이로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는지 그녀가 희미하게 전율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가 문제냐고 물었어."


 "너.......너......!"


 울분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이로아가 손을 들어 따귀를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연약한 일격은 미처 네로의 뺨에 닿기도 전 그의 두꺼운 손아귀에 가로막혔다. 이로아는 붙잡힌 손목을 떨쳐내려 했으나 워낙 근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반대쪽 자유로운 손으로 네로의 가슴팍을 두들기며 이로아가 악을 썼다.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나쁜 놈아!"


 휙, 그 순간 네로가 이로아를 그대로 내팽겨쳤다. 그 반동으로 휘청거리던 이로아는 중심을 잃고 뒷편으로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넘어져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발갛게 달아오른 손목을 어루만지며 이로아가 네로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러나 네로는 아랑곳하는 기색조차 없이 제 할 말을 계속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어릴 적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내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건.......그건 옛날 일......."


 "그 때 넌 어렸으니 이해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어른이지. 아직도 그 일들이 어떤 내게 의미였는지 부정할 셈이야?"


 그러자 이로아가 이를 까득 악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는 걸로 보복하겠다는 뜻이야?"


 "맞아. 그런 뜻이야. 그들은 날 한번 죽였어. 신념을 버리고, 신앙을 버리고 독일로 떠나지 않았다면 네로라는 남자는 지금 네 눈앞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나도 공평하게 되갚는 것 뿐이야."


 너무나도 간결한 결론에 이로아가 허탈한 표정을 띄웠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더니 힘없이 말했다.


 "내가 아는 네로는 이미 죽은 거구나. 대성당에 불이 난 날, 넌 죽은 거였어."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아?"


 네로의 질문에 이로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체념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적막으로만 일관했다. 그런 이로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네로가 말을 이었다.


 "매일 악몽을 꿨어. 이 빌어먹을 마을과 관련된 끔찍한 악몽들을. 잠이 들면 난 다시 벨기에의 무력한 우유 배달원으로 돌아가 있는 거야. 반항도, 변명도 못한 채 종일 두들겨 맞는 만만한 동네북으로.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서 헤매다가, 마지막에는 그 대성당 앞에서 얼어죽으면서 깨. 그러다 보니 몇 달 간은 불면증으로 고생했지."


 갑자기 피식 실소를 머금으며 네로가 덧붙였다.


 "웃기는 게 뭔지 알아? 그 성스러운 성당 앞에서 죽었어도 천사든 그리스도든 아무도 날 맞으러 오지 않더라. 그냥 그대로 끝이었어. 결국 마지막까지 그 망할 착한 소년으로 머무른 대가로, 난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거지."


 "네로......"


 "이 망할 마을에 아쉬운 점은 없었어. 내게는 그 엉터리 대성당처럼 불태워도 모자랄 가증스러운 곳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은 결코 잊혀지지가 않더라.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더러운 마을에서, 그래도 여전히 탐나는 한 가지가 있었어. 마을 전체를 불살라버린다고 해도, 온전히 건지고 싶은 딱 한 가지가. 그게 뭘 것 같아?"


 급작스러운 물음에 이로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네로는 얌전히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창틀에서 손을 떼고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네로와 이로아의 몸이 겹쳐지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당황한 이로아가 그를 밀쳐내려 했으나 벌써 둘의 입술이 한 쌍으로 포개진 후였다. 뒤이어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격렬한 움직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깨물어 버릴 거야, 마음 속으로 외쳤으나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충격과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고, 아직 네로에게 품고 있던 일말의 동정심이 그녀를 멈춰세웠다.


 굳은살이 박힌 네로의 손이 이로아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피부를 더듬고,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밀착시키며 점점 둘은 한몸이 되어갔다. 이윽고 키스를 멈춘 네로가 얼굴을 뗐다. 홍당무처럼 상기된 이로아의 안면에 네로의 뜨거운 입김이 내려앉았다. 


 하아하아, 가쁜 호흡을 몰아쉬던 이로아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리고 달콤한 체취가 네로를 자극했다. 


 "놔 줘."


 그러나 네로는 요지부동을 유지했다. 이로아가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고 했으나, 전력으로 저항해도 이기지 못할 마당에 이미 힘이 빠진 상태로 맞서니 승산이 없었다. 이로아의 기름한 속눈썹에 이슬이 맺혔다. 주르륵, 눈물이 방울방울 볼을 타고 턱 언저리로 굴러갔다. 그녀가 울먹이며 간청했다.


 "놔 줘. 부탁이야."


 "말했지. 내가 이 빌어먹을 마을에서 유일하게 원하는 게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네로가 이로아의 얼굴을 매만졌다. 따스하고 두꺼운 손길, 어릴 적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감촉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네로가 내미는 손길은 어둡고, 무섭고, 또 너무나도 괴로웠다. 눈을 돌려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 이로아는 네로의 눈동자 속에 아직 남아있는 소년의 흔적을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심신이 망가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홀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고통과 분노를, 오직 지금 품에 안은 여인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탐하는 무저갱처럼 끝이 없는 집착인지, 아니면 다친 곳을 보살펴주길 바라는 애달픈 소망인지는 불분명했다.


 "나, 나 집에 가야 해, 네로. 아버지가 기다리셔. 제발......"


 그 순간 곧바로 네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차 싶어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양 손 모두 붙들린 관계로 실패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언급하는 즉시 네로에게 남아있던 어린 소년의 편린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욕망과 증오의 불길만이 그를 뒤덮어 버렸다. 


 그 극열한 불꽃에 데일 것만 같아 이로아는 다시 고개를 틀었다. 네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네로가 아닌,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를 마주한 듯한 심정이었다.


 "이로아, 넌 아무데도 못 가."


 그녀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네로가 못을 박았다. 


 "네로, 제발......."


 "전부 죽여버릴 거야."


 불쑥 튀어나온 네로의 한마디에 이로아는 하려던 말을 전부 삼키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네로가 주지시켰다.


 "네 아버지도, 남은 마을 사람들도 전부 죽일 거라고. 널 빼면 이 쓰레기 같은 마을 놈들은 아무도 필요없어. 전원 총살, 아니 파트라슈 밥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무시무시한 협박에 이로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네로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열렬하게 탐했다. 팔과 다리가 뒤섞이고, 피부가 점점 땀으로 젖어갔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곳곳을 헤집는 동안 이로아는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다. 


 비로소 두 번째 키스를 마친 네로가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반쯤 나체가 되어 넋을 잃은 이로아의 귀에 그가 다짐하듯이 확고하게 속삭였다.


 "넌 내 거야. 다른 누구한테도 못 줘. 네 머릿속에 오직 나만 남을 때까지 절대로 놔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그래서 네 아버지에게 보여주겠어. 넌 더는 코제츠의 딸이 아닌 내 이로아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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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분명 네로의 남성향 복수극이었는데, 쓰고 보니 보르노가 되버렸누;; 새벽에 쓰면 이래서 문제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