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밤, 포차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소주잔을 비우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부서지는 걸 막으려고,

불합리한 불행이 일어나면 그걸 남의 탓으로 돌려버린대."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것도 내 잘못이 아닌거야.

전부 다 네 잘못인거야."

"설령 내가 한 짓이라고 해도, 이렇게 날 만든 사회가.

가족들이. 세상이. 친구들이.

다 잘못한 거야."

"잘못 없어, 괜찮아. 나는. 나는 괜찮아."

남자의 눈에, 반댓편에 앉은 사람이 보인다.

신세 한탄이라도 받아주러 온 친구일까.

'야. 괜찮을 리가 없잖아?'

'사실 다 네 잘못인 걸 알고 있지 않냐?'

'무슨 불행? 다 네 선택이었잖아.'

'네가 조금만 더 공부를 했었다면

언행에 신경을 더 썼었다면

조금만 남에게 친절하게 대했다면

다 괜찮았을 텐데.'

'그래놓고는 뭐?'

'마음이 부서져?'

'병ㅋㅋㅋㅋㅋㅋㅋ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ㅋㅋㅋㅋ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부정하지마, 다 네 탓이야.'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잖아?'

"..."

남자는 이내 침묵하다가, 무럭 화를 내며 말한다.

"왜! 왜 남 탓도 못하게 만드는건데?"

"내가 뭐를 잘못했어?"

"매일 죽을듯이 노력하지 않는 게 잘못인거야?"

감정을 분출하는 남자에게, 싸늘한 대답이 돌아온다.


'맞아. 남들은 다 죽어라 노력하는데.'

'너는 안 그랬잖아? 그게 네 잘못이야.'

'그 잘못이 너무나 커서 너를 지금 이렇게 만든거야.'


'어중간한 스펙도, 전공도 없고.'

'기술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인맥도, 친구도 아무도 없지.'

... 이내 남자는 망연자실한 듯 보인다.


소주 한 잔을 더 들이킨 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뗀다.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든거야?"


'지금 알았어? 아니 애초에 알고 있었잖냐 너. 몇 번을 말해?'

"...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와서?'


감정이 담긴 어조로 말하는 남자.

"씨발. 뭐라도 좀.. 없어? 이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러니까 좀 잘하지 그랬냐. 없어, 아무것도.'

'내일 모레면 30줄에 밀린 월세가 세달치인데.'


"월세는 낼 수 있어, 비상금 쓰면 되는거지. 뭐."

'게다가, 결정적으로. 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

"편의점 알바 같은 거라면.."

'야. 요새는 편의점 알바도 대학보고 뽑아.'

'대학이 성실함의 지표를 보기에 가장 좋거든.'

'근데 넌? 씨발, 생기부도 쓰레기인 고졸새끼지'.


'맨날 담배나 쳐 펴대고.'

'그래서 몸 쓰는 일도 못하잖아?'

",,, 그래도 남들한테 폐는 안 끼쳤어."

'어이구, 그러셨어요? 아하하! 참 대단한 성인군자 납셨네 ㅋㅋㅋㅋㅋ'


'대단해! 아주! 브라보야! ㅋㅋㅋㅋㅋ 표창장이라도 하나 만들어줄까?'

이내 남자는 얼굴을 찡그린다.

'크흠흠, 농담이야. 얼굴 찌푸리지 마. 주름생겨'

'생기든 말든 못생긴 건 똑같지만.'

남자는 이젠 익숙해졌다는 투로, 태연히 묻는다.


"...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나한테 이제 뭐가 남은거야?"

'알려줘?'

"그래." 


'정말로?'

".... 말해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거야?"

'아니. 난 네 본심이잖아.'

'그래서 너랑 똑같은 모습으로 여기 앉아있는 거고.'

'니 본심이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말하면'

'넌 그걸 반드시 따르게 되는거야.'

'내가 씨발 목매달고 자살하라고 하면 넌 미래에 무조건 그렇게 된다고.'

'그게 안 무서운거야?'

".... 생각할 시간을 줘."


'병신. 다른 것도 다 생각하다가 놓쳐버렸으면서. 변한 게 없네.'


남자는 소주를 세 잔 정도 더 들이키더니, 결심을 한 듯 말한다.

"그래. 남은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다면, 들어야지."

'진짜?'

"그래."

'그래, 우리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까.'

'일단 넌 특출난 게 아무것도 없지.'

'얼굴도 평범하고, 머리도 안 좋고, 체력도 쓰레기야.'

'부모는 사고로 사망에, 그것 때문에 친구랑도 다 멀어지고 자퇴..'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게 하나 있어.'

"뭔데?"

'나이. 넌 아직 20대잖아.'

"그래서?"

'너, 오늘부터 매일 도서관 가서 공무원 시험 준비해.'


'당장 몇십시간 죽치고 매달리라는 게 아니야.'

'처음엔 어떻게 공부해야 할 지 계획을 세워.'

'그리고 한 발자국 부터, 처음부터 천천히 하면 되는거야.'

'처음? 떨어져도 괜찮아. 내년에, 내후년에 그렇게 붙을 때 까지 하는거야.'

이내 남자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진다.

'근데 있잖아.'

"..?"

'우리 생각을 조금 더 해보자고.'

"무슨..?"


'내가 말한 게 가능했으면 니가 지금 이 꼬라지일까?'

'애초에 그럴 끈기가 있었으면 학교를 다녔겠지.'

'그럴 머리가 있었으면 성적이 잘 나왔거나, 이미 다른 직업을 구했을테고.'

'........?'

'아 씨발 얼굴 봐봐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넌 아무것도 못한다고.'


'병신, 진짜 기대했나 봐 ㅋㅋㅋㅋㅋㅋㅋㅋ 불쌍해서 어떡하냐?'

'미안한데, 난 너 전혀 안 불쌍해. 오히려 역겨워 뒤져버릴 것 같아.'

'그냥 가서 목이나 매달고 다음번엔 쓸모있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나 해.'

남자는 잠깐 손을 떨더니, 소주병을 들고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형상의 머리에 내리친다.

하지만 소주병은 형상을 스쳐 지나가고, 놓친 소주병이 바닥에 산산조각난다.

탁, 팅. 팅. 팅. 쨍그랑.

'아 진짜 멍청하네. 때려도 안 맞는다니까? 내 말 안 들었어?'

'아, 지금 화난 거 보니까 확실히 듣기는 했나보네 ㅋㅋㅋㅋ'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잘 알잖아?'

"닥쳐. 니 말 안 따를거야."

'이미 끝났다니까? 이제 니 인생의 엔딩은 목 매달고 죽는거야.'

남자는 귀를 막고, 주머니에 꽃혀있던 삼만원으로 계산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다.

차가운 바람이 취기로 달아오른 그의 뺨을 때린다.

"하. 씨발. 씨발. 씨발!"

".....짜증나는 환각 같으니."

그는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이유, 우울증이 도지더니

최근엔 결국 환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 근처 반지하, 그의 유일한 보금자리.

하지만 오늘은 돌아가지 않는다.

"내 인생의 끝이 목 매달고 뒤지는거라고?, 지랄하지 말라고 해."

집에 가던 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까맣게 덮여버린 남자의 눈에는, 별이 비치지 않았다.

먹구름과 어둠에 눈이 가려진 남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본 환영의 말을 따르지 않을 거라는 고집 하나만 뇌리에 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정처없이 추운 겨울 밤을 걷는다.

양화대교를 지나가는 남자.

"절대로 네 말에 따르지는 않아, 죽긴 하더라도 목 매달고 뒤지는 건 아니겠지."


대교의 절반 즈음 걸었을 때, 


그렇게 광기가 서려있던 그의 눈에

난간에 써져있는 글씨가 들어온다.

[많이 힘들었지?]

"....."

"아..."

이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시야가 흐려진다.

"난.. 나는.. 나는....."


세상에서 단 한 명 만을 위한 비가, 그의 눈에 내리고 있었다.

비에 씻겨 먹구름이 걷힌 그의 밤하늘에, 별과 달이 비쳤다.

"흐으윽.. 흑.. 나도.. 나도....."

"이젠.. 이젠... 편해지고 싶어요.."

"돈 걱정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도 이제 지쳤어요."

"가족들을 혼자 그리워하면서 우는 것도 이제는 싫어요..."

구두를 벗고, 난간에 올라간다.

..... 본능이 두려움이라는 신호를 온 몸에 보내고 있다.

한기가 발 끝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생존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거스르는 행위.


속으로 몇 번이나 각오한 남자였어도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 역시 그만둘까."

"그래, 역시 죽는 건.."

'와, 진짜 마지막에는 좀 멋지게 보이나 했는데.'

"아."

'진짜 너는 구제를 할 수가 없다, 넌 재활용도 안 될 것 같아.'

'타는 쓰레기에 넣어서 소각하는 방법이 인류 발전에 이로울 것 같은데.'

"넌 어디서 자꾸 나타나냐?"

'본심이라니까.'

"지랄. 그럼 왜 그렇게 비뚤어졌는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네 모습이야. 니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른거지.'

"...."

'반박 못 하죠?'

"짜증나네."

'어쩔 수 없는거지. 그럼 이제 뭐, 돌아갈거야?'

"그래야지."

'돌아가서 뭐 하게?'

"니가 말한 거, 공무원 시험 준비."

'넌 안 된다니까?'

"닥쳐."

'뭐, 잘 해봐. 근데 아마 안 하는 편이 더 나을 걸.'

'하다가 실패하면 진짜로 내가 말한 대로 될 테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그래, 뭐. 원한다면.'

그가 난간에서 내려온다.


역시나 환각은 온데간데 없었다.

구두를 다시 신고, 왔던 길을 돌아간다.

절반 즈음 건넜던 대교를 돌아가서,

처음의 포차를 지나

달동네의 반지하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반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맡는다.

"하아.. 이 놈의 냄새는 내가 어느 위치인지 가장 잘 느끼게 한단 말이야."

"이 냄새가 싫지가 않아서 더 비참해."

"... 이걸 실패하면, 본심이 말한 대로 할 거야."

"그리고 이게 내게 마지막으로 온 기회겠지."

그 이후부터 그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한 두번 아침 도서관에서 보인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


하루, 한 달, 일 년이 지나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뉴스에서 기사가 나온다.

다행히 투신이나, 자살에 대한 내용은 없다.

[단독] 환각을 보는 정신질환을 지닌 9급 공무원.. 이상행동 보여 결국 직위해제

"...."

'음, 내가 진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내 잘못 아니라니까? 너가 갑자기 3년만에 날 보고 물건을 던진 게 부장 머리에 맞아서

기사에 오르지만 않았어도 너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거라고.'

'그렇다곤 해도 찰과상이었는데.'

'진짜 운 뒤지게 없네 너.'

"됐어. 오히려 운이 좋았던거지."


'하긴. 사실 공무원 되는 게 목표였지,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잖아?'


'뭔가를 이뤄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거지, 넌.'

"그래. 네 말이 맞아."

"방금 웃은 것도, 속이 시원해서 웃은거야."

'그래, 고생했다.'


"난 구제불능의 쓰레기는 아니었던거야. 하면 할 수 있었던 사람인거야."

'그래, 내가 틀렸었네. 너 괜찮은 사람이더라.'

"하하.."

"내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왜 나한테 물어?'

"...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야, 넌 나를 한번 이미 이겼어.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원하는게, 결국 내가 원하는거잖아."

'그렇긴 하지, 새끼... 공무원 하더니 똑똑해졌네.'

"헤.."

'음.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왔고, 결국 목표를 이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젠 편해지자고.'

"그래.. 이제 조금 쉬어야겠네."

다시 양화대교에 한 명의 남자가 서 있다.

하지만 이번엔 그는 울거나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띈 채로, 목표를 이뤘던 한 사람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듯.

천천히 스러져갔다. 본심도, 육체도, 기억도.

물 속에 잠겨져, 올라올 일 없이. 편안한 안녕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