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이 지나고 미래의 호현은 과거의 호현의 바람대로 인생의 힘든 순간에 상자를 다시 찾았다. 호현은 담배를 만지작 거리다 무언가 결심하듯 집밖으로 나왔다. 몰래 라이터도 챙겼다. 동네 가장 구석진 곳을 찾아 우산도 쓰지 않고 후드집업으로 머리만 가린채 쏘아다녔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다다른 호현은 미끄럼틀 뒤에 서 몸을 가렸다.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붙이는 순간 담배연기를 목구멍으로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시면 기침이 나오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했던 기침은 나지 않았고 그냥 담배연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뿐이었다. 기분이 썩 괜찮은것도 아니었다. 사실, 전혀 위로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호현은 다시한번 담배연기를 삼켰다. 담배연기가 가득찬 먹구름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갑자기 막힌 것이 쑥 뚫어진 듯 폭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호현은 짧은 탄식을 내뱉고 담뱃불을 껐다. 담배꽁지는 버리지 않고 겉에 타들어간 부분만 손으로 제거하고 주머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비를 가리면서 집을 향해 뛰었다.
집에 도착한 호현은 재빨리 후드를 벗어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엄마가 담배연기라도 맡는 날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섬유유연제를 퍼붓고는 바닥에 들어누었다. 바지주머니속에 담배꽁지가 눌려 편하지 않았다. 호현은 그것을 꺼내 한참 바라보다가 가위로 타들어간 윗부분을 완전히 제거했다. 뒤에 거뭇하게 밴 담배솜 빼고는 새것같았다. 다시 그것을 작고 하얀, 나의 선물상자안에 넣어뒀다. 그리고 다시 서랍구석안에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놨다.
세탁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다 끝났다는 신호를 알렸다. 호현은 후드집업을 꺼내 베란다로 나갔다. 어느덧 비가 그쳐있었다. 햇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드집업을 뺄래건조대에 정성스럽게 펼쳐놓았다.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밑으로 풍겨왔다. 호현은 창문밖 저 멀리 크고 둥근 무지개를 보았다. 삼촌이 말한 위로라는것이 어쩌면 먹구름이 아니라 이 무지개 아닐까. 만약, 삼촌도 이 무지개를 보았더라면, 좀 달랐을까. 호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편지한통을 더 썼다. 그것을 작은 상자안에 추가로 넣었다. 긁어모은 돈 몇푼도 넣었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 겪을 시련들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삼촌은 자신이 죽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열심히 살다보면, 열흘의 먹구름이라도 하루의 무지개라면 살아볼만한 인생인 것 같았다. 어서빨리 자신의 무지개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호현은 책상에 앉아 어제 하던 것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