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만큼 그 자체로 '모순'을 이루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기 이전에 먼저 '모순'이란 것부터 얘기해보자.

 '모순'이라고 하는 건 한 마디로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논리가 한 데 섞여있는 것을 말한다.


 '뭐든지 뚫는 창'

 '뭐든지 뚫는 방패'

 이 두 개념은 각각 존재할 땐 성립될 수 있다. 해당 고사의 장사꾼도 각각 있을 땐 성립되는 함정에 빠져서 창과 방패를 동시에 팔면서 이 창은 뭐든지 뚫을 수 있고, 이 방패는 뭐든지 막을 수 있다고 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모순을 해결하는 방식은 참 다양하지만, 일단 간단한 방법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창 장사꾼 : 뭐든지 뚫을 수 있는 창이요!"

 방패 장사꾼 : 뭐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요!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어디 한 번 붙어볼래?"

 "좋아, 붙어보자!"


 창과 방패를 직접 부딪혀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승자를 가려내는 것이다.

 이게 전근대시대는 물론이고, 비교적 근대 사상이라고 하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 한 해결방법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방식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어떤 방패든 뚫을 수 있는 창'

 '어떤 화살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

 '어떤 것이든 맞출 수 있는 활'


 이러면 모순이 있는가? 아까 전과 달리 오히려 따져야 될 요소가 하나 더 늘었는데도 모순은 깔끔하게 해결되는 모습이 아닌가?

 자유주의에 근거한 모순 해결 방식은 대체로 이렇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과대해석한 게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렇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과연 올바른가? 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단 걸 밝힌다.


 정치적 올바름이 간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저 자유주의적 모순 해결 방식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단 것이다.

 말이야 저렇게 간단하게 해놨지만, 실제로 저런 일이 벌어지거든 방패 장사꾼과 창 장사꾼이 새로 생겨난 활 장사꾼을 경쟁자라 여겨서 린치를 가하지 말란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반대로 활 장사꾼이 자기네 활을 풀어서 방패 장사꾼과 창 장사꾼을 죄다 쏴죽이지 말란 법은 또 어디에 있을까?

 정치적 올바름이 주장하는 바를 듣다보면, 이런 요소들을 굉장히 간과하고서 그저 다양성의 증가가 좋다고 떠들기 바쁠 따름이다. 다양성이 증가하려면 그만큼 추가적인 역량을 들일 것도 고려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다양성을 증가시키거든 이제 한국인이 조선족들 경멸하는 사태를 일으킬 따름이다. 조선족이 자기네들 살던 곳에도 저들 사는대로 살았어도 한국인들이 그들을 경멸할까?


 또한 다양성의 증가는 그 다양성 증가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한 통제 요인을 잃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이 얘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즘이 되겠다. 민주주의적 요소 덕분에 정권을 장악해놓고선 정작 본인들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며 민주주의를 지워버린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선진적 요소에 대해서 얘기하려거든, 그들이 나치즘을 배양했단 것도 함께 얘기해야 옳다. 정치적 올바름 역시 이런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선 오히려 자유를 탄압하는 데 앞장설 따름이다.

 비건들이 도살장에서 장사를 훼방놓는다거나, 돼지우리에서 장사를 방해하는 게 그 사례가 되겠다. 비건들이 그렇게 설치고도 그렇게 상해를 안 입는 이유는 그들도 사람이라서라기보단 그게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영역이라고 보호받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정치적 올바름은 다양성 증가를 얘기하면서도 실상 다양성을 훼손하는데 앞장서는 경우가 상당히 많단 것이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 '정치적 올바름'이란 요소가 결국 국가 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 대한 욕심을 권력에 욕심이 있다고 표현하지 않고, 다양성이 증가되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선 차라리 빨간 적폐, 파란 적폐는 그래도 양심적이라서 자기네들이 권력을 쥐고 싶어서 이러고 자빠졌단 걸 어필이라도 하는 데 비해-이런 점에선 파란 적폐의 양심 상태가 좀 더 맛이 간 측면이 있긴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대놓고 내세우는 놈들의 행태는 가히 가증스럽고 역겹기까지 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필자가 '무정부주의자'라서 주장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인데, 본 필자는 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그야말로 난센스가 따로 없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무정부주의자의 관점에서 '국가'를 규정짓고자 하거든, 일단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 조직의 본질은 조직 폭력배(조폭)이다.'

 이건 사회 계약이란 개념이 생기기 이전은 두말할 것 없고, 사회 계약이란 개념이 생겨났어도 국가 조직의 본질이 조폭이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국에서 다루는 폭력을 독점하고서 그 폭력을 통해 세금을 거두고, 질서를 잡으며 자기네들이 지켜야 될 이들을 보호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두들겨 패는 족속들이다. 중국 공산당은 이걸 굉장히 노골적으로 저지르고, 미국 같은 곳은 이걸 슬그머니 저지른단 차이가 있지만, 결국 국가조직의 본질은 조폭이다.


 근데 그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 바른 걸 조폭이랑 결탁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정치적 올바름이 주장하는 바이다.

 여태까지 좋은 사회를 만들어나가잔 수많은 얘기를 들어봤어도, 조폭과 손 잡아서 세상을 하하호호 웃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이들의 입 외엔 들어본 적이 없다. 국가주의자?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로서 당연히 개소리를 하는 집단이니 넘어가고 보자면, 정치적 올바름을 입에 담는 이들이 조폭과 결탁하면 혹은 조폭이 되면 세상이 행복해질 거라 주장하기 바쁘다.


 이런 점에서 비기독교도들에게도 예수가 존경받아야 할 이유가 하나 있는데, 바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란 말이다. 이 말이야말로 예수의 진정성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예수는 국가 조직의 본질이 조폭이란 것에 대해 통찰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런 조폭들과 결탁해선, 예수가 건설하려던 그 사람 사는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하는 대목이기도 한 게 바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란 말에 함축되어 있다.


 조폭들은 그들을 그저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저들은 저들이 잘난 줄 알아서 만행을 저지르고도 체포가 안 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 세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조폭과 결탁해서 올바른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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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부분 때문에 이리도 찬반이 많은가 싶지만, 이렇게 후기로 좀 더 풀어내지 않은 까닭도 클 거라 생각한다.


 필자가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는 건 어디까지나 목표로 잡아야 할 지점이 무정부주의에서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게 많아서 그런 것이지, 완전히 무정부 상태를 옹호하는 그런 것관 거리가 멀단 걸 밝힌다. 필자는 무정부 상태보단 차라리 독재 정부가 낫다는 말에도 동의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무정부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은 국가 조직부터가 조폭이니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력도 옹호하는 면도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이런 종류의 폭력엔 전쟁이 벌어진 게 아닌 이상에야 반대하는 입장이다. 안 그래도 필자가 이상성욕을 좀 갖고 있는데, 폭력 옹호까지 더해지면 이 곳에 글을 올리는 신세는 못 됐을 테니 말이다. 필자는 콩밥 먹고 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밝힌다. 모범시민은 못 되더라도 준법시민 정돈 될 의향이 있다, 이 말이다.


 실제로 '국가 조직의 본질이 조폭이다'라는 말은 국가 조직에 대한 경계심을 가진 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국가 조직의 본질이 이따위니깐 정말로 조폭처럼 굴어도 상관없단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다. 이런 점에 대해선 언급을 했어야 됐는데, 아무래도 하지 않은 잘못이 크다.


 본문에선 국가 조직의 역기능 측면에 초점을 두고 '정치적 올바름'을 다뤘는데, 국가 조직의 순기능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이것 때문에 필자가 이상주의적 관점에서나 무정부주의를 견지하는 것이지,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선 무정부주의를 내세우지 못할 정도이다.

 본문에서 사례로 든 '자유주의적 모순 해결 방식'을 주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건 현 체제 하에선 국가 조직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조직이 중재하고 조정하고, 때론 강제력을 행사하면서 자유주의적 모순 해결 방식이 도입될 수 있고 운영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무정부 상태에서 기대하긴 매우 곤란하며, 독재 체제가 자유주의적 모순 해결 방식을 도입하는 건 자기네들의 필요에 따라 이런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단 점에서 무정부 상태보단 독재정이 더 나은 측면이 분명히 있다.


 이 정도면 이 글에 대한 찬반에 대해 어느 정도 해명을 했다고 본다. 아울러 이렇게 언급하지 않아서 발생한 오해에 대해선 필자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