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범한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그는 연애나 달콤한 이야기와는 담을 쌓고 살다 조금 늦게 결혼했다. 그 덕인지 그는 친구들이 마누라들에게서 도망 다니며 자식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 자신의 어린 자식과 마누라를 떠올리며 의아해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헤드록을 걸어주었다.
그는 평범한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그는 믿음직스러운 부하 직원들을 두고 있었다. 부하 직원들이 자신을 믿는지는 잘 알지 못했으나, 그는 부하 직원들을 믿었다. 그는 여유가 남는 한 그들을 챙겨주려고 노력했고, 그들도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그를 경애하는 듯 보였다.
그는 평범한 중소기업의 사장이었다.
그의 기업은 그리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새로운 거래처를 트려고 노력했으며, 대부분은 실패했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술자리와 골프 필드를 전전하며, 그는 애써 붙잡고 있는 이 회사가 점차 기울어가고 있음을 막연히 느꼈다. 그럴 때면, 쓰디쓴 술이 조금은 수월하게 뱃속으로 들어갔다.
*
"헤헤, 여보- 나 왔어!"
"당신 또 술 마셨어? 그러다 몸 버린다니까 그러네."
"일 때무넹. 어쩔 수가 없었엉."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고 신발을 벗던 그를 부인이 부축했다. 따스한 기억보다 조금 거칠어진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그는 비척대며 걸음을 옮겼다. 끙끙대는 그를 거실의 소파에 조심스레 앉히고선, 부인은 한숨을 쉬며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라면 냄새가 집 안에 퍼졌다.
"여보, 내가 마리야…. 마니 사랑하는 거 알지?"
"아이고, 알았네요. 콩나물 넣었어. 먹고 들어가서 빨리 자. 내일 주말이니까 알람도 좀 꺼두고. 애들 그 소리에 다 깨더라."
"따랑해!"
"징그럽게 왜 이래!"
등짝을 얻어맞고도 그는 마냥 좋은 듯 웃었다. 거의 반쯤 들이키듯 라면을 해치워버린 후,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등짝을 맞은 덕인지 비교적 걸음걸이가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려던 찰나, 그의 눈에 서슬 퍼런 날을 빛내는 검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불길했다.
"여보…? 이건 뭐야? 검이 있는데?"
"얼씨구, 잠이나 자요. 난 좀 정리하고 갈 테니까."
물음에 대한 답은 주방에서 들려왔다. 뭐지. 술이 덜 깼나. 덜 깬 게 맞긴 하지. 적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40년이 넘도록 환각을 본 건 처음이었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그가 번뇌하고 있자, 그의 머릿속에 근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 선택받은 자여, 나를 집어라. 원하는 걸 이루어주마.
원래라면 슬슬 진지하게 정신병을 의심해봐야 했을 테지만 자고로 남자는 몇 살을 먹었든 이러한 상황에는 환장하는 법. 심지어 술까지 마셨다. 그는 홀린 듯 검을 집었다. 서늘한 감각과 함께, 그는 몸속으로 뭔가 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불길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 원하는 게 뭐냐?
그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돌아가지도 않는 몽롱한 머리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입이 멋대로 단어를 내뱉었다.
"돈을 원해."
- 이루어질 것이다.
"……"
그는 장롱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것을 끝으로, 그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
그는 일어나 굳은 얼굴로 회사로 향했다. 그의 생애 동안 술이 기억에 흠집을 낸 적은 없었다. 이는 그가 어제 부린 추태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내에게 애교 부리다 얻어맞은 거야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일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모를 쇠붙이에다 대고 진지하게 소원을 빌다니. 설마 누가 듣진 않았겠지. 만약 딸아이가 들었다면 죽어버릴 테다.
회사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그를 반겼다. 오늘은 주말일 텐데. 그는 어제 파투 난 술자리를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과분한 자리에 앉아 과분한 사람들을 부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얼마나 더 오래 있을 수 있을까. 분명 그리 멀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가 온다면 가족만이라도 어떻게든….
…I'm just a little bit caught in a middle. Life is a maze an-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상념을 깼다. 어제 술자리를 함께 한 거래처의 담당자였다. 별로 좋게 헤어지진 않았다. 그는 목청을 한 차례 쓸어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전화를 받았다.
네, 네, 네. 하하, 그렇죠 뭐. 네?
억양만 바뀌어 반복되는 말들. 그다지 의미는 없는 단어들을 나열해가다, 그는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표정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의 홈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직원들을 향해 외쳤다.
"일 그만들 하고 퇴근하세요! 가족들도 좀 보고!"
그리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갔다. 5분. 기록적인 근무시간이었다.
직원들 중 절반 이상은 독신이었다. 그들은 썩은 달걀 냄새라도 맡은 듯 얼굴을 찡그린 후 하던 업무를 계속했다. 독신이 아닌 직원들도 마누라와 업무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하던 업무를 계속했다.
*
집으로 도착한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장롱 문을 박력 넘치게 여는 것이었다.
- 나를 이딴 곳에 박아두다니, 가만두지 않겠-
"고맙다!!"
나들이라도 간 건지, 지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검에다 대고 말한다고 미친놈 취급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사실 있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기분이라면 검을 신줏단지 모시듯 닦아서 마누라에게 소개할 의향까지 있었다.
- 분명 술 퍼마신 건 어제일 텐데, 어째 오늘 더 정신이 나가 보이는데?
"회사가 위기에서 살아났으니까! 정신쯤이야 나갈 수 있지! 네 덕이야, 고맙다!"
- …….
그는 담당자의 마음이 바뀐 게 어제 빈 소원 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회사가 잘되면 자연스레 그에게도 돈이 들어온다. 애당초 빈 것이 조금 추상적인 소원, '돈을 원한다'였기에, 이루어지는 방식도 조금 추상적이겠거니 생각한 듯했다. 마검은 굳이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방식이 마검의 마음대로 인건 사실이었기에.
그는 헌 옷가지를 가져와 마검을 닦기 시작했다. 손길에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검을 닦으며 그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소원 더 들어주거나 그런 건 없나?"
- 들어주는 소원은 하나다.
"쪼잔해라. 평생 하나밖에 안 들어줘?"
- 네가 날 소유할 수 있는 건 일주일뿐이다.
대충 이런 느낌의 대화였다. 그렇게 닦고 있자 딸이 돌아왔다. 우다다 달려온 딸은 장검을 희희낙락하게 닦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비명을 질렀고, 그는 허둥대다 대화에서 들은 기능, 투명화를 이용하여 마검을 감추었다. 딸의 비명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아내가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그는 엄숙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혼나긴 싫었다. 그는 딸아이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에 대해 마음 속으로 깊이 사과했다.
그렇게 그는, 검을 가족에게 설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그는 검이 사라지고도 소원이 유지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회사일에 온 힘을 쏟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죽어도 안 풀리던 일들이 이제 손을 대는 족족 잘 풀린다 수준을 넘어 대박을 쳤다. 고마운 직원들에게 보너스도 뿌릴 수 있었다. 고작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 사이에 회사는 위기에 빠진 기업에서 떠오르는 신흥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믿을 수 없는 성과였다. 그는 이제 술자리가 즐거웠다. 더 바랄 게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가족에게도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으리라. 모든 게 완벽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금요일 밤. 마검에게 소원을 빈 지 딱 일주일 되는 날, 그는 집으로 향하며 여태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기연이었다. 행운이었다. 예정된 파멸을 회피하게 해주었다. 검의 능력은 확실해, 정말 개연성 있게 돈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면에서 돈이 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길을 걷다 바닥을 보면 신사임당과 눈을 마주치는 경우도 흔했다. 그래서 복권도 사놓았다. 검이 사라진 후에도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검과 작별 인사는 해야지.
모처럼 맨정신으로 현관 앞에 선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익숙한 리듬으로 도어록을 해제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부인을 부르려는 찰나,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집안이 어질러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나서는 안되는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그는 다리를 강제로 움직여, 신발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어지러이 춤췄다.
피비린내.
미쳐버릴 것 같은, 철내음.
소원.
돈.
…사망보험금?
부인은 딸아이를 안고 방 안에 쓰러져있었다. 피웅덩이가 그의 구두 밑창을 적셨다.
"아…."
그는 신음하며 가슴을 부여잡고 장롱으로 향했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비틀어 열자, 짧은 인연의 검이 그를 반겼다.
- 정신은 오늘 제일 나가 보이는군.
"너, 이 개… 너야?"
- 돈을 원한 게 아니었나?
"너냐고!"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찢어지듯 소리쳤다. 좁고 가파른 호흡. 굳어가는 피로 바지를 적신 그의 모습을 보고, 마검은 빙긋 웃었다. 검이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걸까, 하는 시답잖은 의문은 그의 머릿속에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검이 내뿜는 음울한 기운을 그제서야 비로소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딴 것을 집에 두고 있었다니. 이딴 것을 소중하게….
"살려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은 하나뿐이다.
"씨x, 그놈의 돈 다 가져가도 좋으니까, 얻었던 거 다 토해낼 테니까, 빌었던 소원! 철회할 테니까! 살려내!"
그가 검을 부러트릴 듯이 잡아 힘을 주었다. 당연하게도, 검은 일체의 휘어짐도 없이 제 형태를 유지했다. 그저 검날을 지나치게 세게 잡은 그의 손아귀에서 핏줄기만이 미끄러져 떨어질 뿐이었다. 그는 이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검을 내동댕이 쳤다.
- 아이쿠.
씩씩대던 그는 돌연 입술을 짓씹더니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흐느끼듯 말했다.
"제발…. 부탁합니다."
마검이 웃었다.
- 정성을 보아 들어주고는 싶은데.
- 일주일이 지나버렸어, 친구.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마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