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커피를 마신다.

남들도 커피를 좋아한다.

그들도 하나같이 매일 커피를 마신다.

 

콜롬비아에서, 베트남에서, 에티오피아에서, 세계 곳곳에서 수입된 커피를

카페에서, 가정에서, 볶고, 내리고, 마신다.

수천, 수만, 수억 명이.

 

그리고 그들이 볶고, 내리고, 마시는 커피를 팔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커피나무를 키우고 커피콩을 딴다.

아직 커피 마실 나이도 되지 않은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아이들을 부리는 이들은 말한다.

커피가 잘 팔리니까 커피를 재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을 부리는 게 싸니까 부리는 것도 당연하다.

비싼 걸 싼값에 재배해서 비싸게 파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자본주의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로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은

커피가 잘 팔리는 탓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커피를 잘 팔리게 만드는

나는 죄인인가?

 

누군가는 말한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취향이 죄가 된다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는 아니라고.

 

그 말이 옳다면

나는 거기에 신경 쓸 필요 따위 없다.

그러니까 여태껏 하던대로 커피를 즐긴다.

그들도 거기에 신경 쓸 필요 따위 없다.

그러니까 여태껏 하던대로 아이들을 부리고

내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커피를 키워서 판다.

여태껏 하던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행이라고.

당장 멈추어야 한다고.

 

그 말이 옳다면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야 한다.

남들도 커피를 마시지 않아야 한다.

그들도 커피를 키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아이들이 커피콩을 따지 않는다.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니까.

아이들은 노동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커피 회사들은 커피를 사고팔 수 없다.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니까.

카페들은 손님이 없어서 문을 닫는다.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니까.

커피를 팔던 나라들은 경제가 휘청인다.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니까.

커피를 즐기던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한다.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니까.

그래서 자신도 커피를 마시면 안 되니까.

 

그리고 해방된 아이들은

커피 농장에서 내쫓겨나서

거리를 방황하다 굶어죽거나

또다른 농장에서 똑같이 착취당한다.

아무도 커피를 안 마시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없다.

분명히 없다.

분명히 없어야만 한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커피를 마실 것이다.

남들도 커피를 좋아한다.

그들도 하나같이 내일도 커피를 마실 것이다.

 

나에게는

남들에게는

커피 한 잔의 가치밖에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