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쩔 수 없어.’


 P 의 조소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이런 엉망진창인 시국에 앞잡이 노릇이나 해먹던 그 역겨운 새끼. 이런 상황에서 그 재수없는 낯짝이 떠오르니, 욕지기가 끓어 오르는 것이 더욱 메스껍게 느껴졌다.


 바닥으로 고개를 돌려 핏덩이를 뱉어냈다. 그나마 고개라도 돌릴 힘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내가 뱉어낸 토사물로 질식해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핏덩이 뒤에는 격한 기침, 그리고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따라 나왔다.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벽처럼 서 있는 도로를 바라 보았다.


 연기 속에는 매캐함이 아니라 피비린내가 배어 나왔다. 비명소리와 욕설, 총성이 합중주를 이루었다. 독재정권의 퇴진을 바라는 시민들의 노래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군인들이 아니었다. 푸주한들이었다. 시위 장소였던 독재자의 처소 앞은 순식간에 도살장으로 변해 버렸다. 단 한번의 손가락질에 모든 방아쇠에서 불이 뿜어졌다. 빗발치는 총소리는 안개처럼 이 거리를 덮기 시작했다. 행렬의 앞에 있던 사람들부터, 마치 춤을 추듯 흐느적거리며 스러졌다. 그렇게 마치 도미노가 넘어지듯이, 주욱. 주변의 다른 이들처럼, 나 역시 총성이 들리자마자 죽을 힘을 다해 뒤돌아 뛰었다. 내 뒤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이 차례로 없어졌다. 눈 앞에서 검붉게 빛나는 총탄이 옆 사람의 등을 꿰뚫는 것을 본 그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피로 물든 강 위에 시체로 만들어진 작은 섬 위에서 눈을 떴다. 사격 명령은 멈춘 듯했다. 아까까지 옆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내 위를 덮고 있었다. 구토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서, 몸을 빼내어 옆에 놓인 트럭 아래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몸은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내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옷자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온 몸에 아픔이 찾아왔다. 신음이 배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저 개돼지 같은 놈들이 또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몰랐다. 일단 몸을 더 안전하게 숨길 곳을 찾아야 했다.

 트럭 아래를 기어 나오자, 느닷없이 바람이 불어 닥쳤다. 피에 젖지 않은 먼지가 바닥에서 일어나 얼굴을 때렸다. 눈을 찌르는 먼지를 손으로 대충 걷어 냈다. 그런데도 시야는 여전히 어두웠다. 이상한데. 분명히 눈을 닦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앞이 잘 보이지 않지?
 한참을 눈을 깜빡이다가 알게 된 사실이 두 개 있었다. 일단 내 눈은 별 이상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 앞을 가린 이 어두움은 하늘을 가린 무언가 때문이라는 것.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엔,

 

 커다란 원반 모양의 비행체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빌딩 사이사이로 보이는 원반들의 모습은 마치 양떼구름이 도시 전체를 덮은 듯해 보였다. 천천히 꾸물대듯 움직이는 그 모양새는, 아래서 내려다 볼 때는 퍽 위압적으로 보인다.

 

 뭐야, 이제는 시위 진압 다음엔 외계인의 침공이냐.

 

 그 모습을 보고 떠오른 것은 외계인이 있는지에 대한 인지부조화도 아니오, 또 다른 목숨에 위협을 느낀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아등바등 삶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총에 맞아도 죽기는 마찬가지고, 알 수 없는 놈들한테 끌려가도 죽기는 마찬가지다. 이러나 저러나 죽는 건 똑같은데, 뭣하러 이렇게 아픈 몸을 기고 있는지 내 자신한테 의문이 생겼다.

 

 “모르겠다, 씨발!”

 

 나는 세상에 외치는 마지막 유언을 딱 한 마디로 정리하고서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그리고 내 목숨을 거둬갈 놈이 누구인지는 알아야겠기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는 하늘을 바라 보았다. 아니, 저 빌어먹을 원반을 노려보았다.

 잠시 느물느물 움직이던 원반들은 각자 자리를 잡은 듯이 멈췄다. 그리고 원반들의 중심부가 열렸다. 우주선의 내부는 마치 거대한 전구 같아 보였다. 둥글다는 것이 아니고, 빛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거기서는 한번 저렇게 빛이 비춘 다음에 바로 그냥 죄다 박살내던데. 아무래도 여기까진가 보다. 나는 이빨을 한번 꽉 깨물고서는, 그 원반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빛은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빨아 올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잠시 몸을 일으켜 다시 눈을 비볐다. 지금 보이는 게 헛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눈을 닦아보아도 변하는 건 없었다. 시위 부대에 의해서 사살당한 수많은 시민들이 원반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 눈 앞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마치 청소기가 청소를 하듯이.

 나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군대의 포화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영공을 침입한 것을 이제서야 파악한 듯, 원반 주위에서는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전무한 듯 했다. 원반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이상한 작업이 거의 완료가 되고 나서, 모든 원반들에서 빛이 뻗어 나왔다. 그 빛은 나와 별로 멀지 않았던 그 곳, 나와 내 옆에 시민들, 우리 모두가 그토록 쳐들어가고 싶던 바로 그 곳, 독재자가 숨어 있는 그 곳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레이저라도 쏘아 나가는 듯한 그 모양새에, 나는 혹여나 외계인들이 저 흉측한 건물을 박살내 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아니면, 방금 전처럼 저 건물에서 그 독재자놈도 빨아 올려 버리는 걸까?

 

 하지만 내 기대감은 빗나갔다. 정확하게는, 반만 빗나갔다.

 

 모든 원반들에서 그 빛을 다리 삼아, 지금까지 빨려 들어갔던 모든 사람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검은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물결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저 거대한 흐름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머리 위를 지나, 독재자의 거처로 꾸역꾸역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눈 깜빡 할 새였다. 마치 홍수에 둑이 터진 듯 사람들은 하늘에 난 길을 따라 독재자가 숨어있는 곳으로 밀려 들어갔다. 다시금 총탄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수많은 군중들이 우글거리는 소리에, 이번에는 총소리가 작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 웅성거림도, 총소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 졌다. 담장 너머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조차 없었기에, 난 트럭에 기대어 간신히 아픈 몸을 기대어 일으켰다. 그래도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보이지 않았다.  

 

 벽 너머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문 안쪽을 쳐다보고 있던 내 앞에, 공중에서 무언가가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혔다. 마치 갓 잡은 돼지처럼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어 도저히 사람의 형상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걸쳐져 있는 온갖 장신구들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독재자였다. 그리고 그 뒤로 하늘에서 뛰어왔던 사람들이 보무도 당당히 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발 아래 있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는 듯 독재자였던 것을 밟으며 거리를 기쁨의 노래로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눈 앞에 있던 사람들은 아까 보았던 사람들이 맞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아까 우주선을 보고 죽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이미 죽어있던 건 아닐까? 현실 감각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렇게까지 연속으로 일어나니,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상식이라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 볼 수 밖에는 없었다. 사람들이 다시 빛의 길을 타고 우주선으로 올라가는 것도, 지금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마치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돌아온 자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우주선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을 모두 실은 우주선들은 원래 그랬다는 듯이 하늘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때까지도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나 보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한 마디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으니. 행렬의 마지막에 있던 반짝이 옷을 입은 양서류를 닮은 외계인에게도.

 

 - 패닉 2집, UFO에 헌정하는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