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고정된 틀에 갖힌 생각 또한 가까운 곳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같이 태어나는 드넓은 생각의 세계.

세상을 살아가며 얻은 지혜는 어느 순간 창문 없는 생각의 감옥으로 변하고,

지식의 목마름에 젖어가던 자신 안의 세계가 그 감옥 안에 갇히는 것을 발견한다.

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함과 동시에 끝이 난다.


 또 한 조각의 재가 떨어진다.

부스스 하고 떨어지는 저 한 줌의 잿덩이는 이미 떨어져버린 자신의 선생(先生)들 위에 

휘날리듯 내려가 망설이는 듯 천천히 가라앉는다.

나는 저 담뱃재들처럼 하나하나 쌓여가는 똑같은 놈들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제한된 삶의 광대함이 물 밀려오듯 퍼져간 사회에서 유일한 즐거움이라곤

제 지위로 남을 깎아 내리는 것 뿐일까. 

먼저 경찰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의 가슴에 가시를 박고

흑백으로 변해버린 사회의 분위기에 점점 염색되어가는

그런 사람들, 그런 경찰이 되고 싶지 않았다.


203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표한 PSCs(Public Security Camera system)는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점점 늘어가는 범죄율과 더욱 정교해지는

범죄 수법을 감시하기 위한 큰 해결책으로 떠올랐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이젠 과거의 영광에 취해 모르고 있던 필요악의 존재는

최첨단 기곗덩어리와 가상의 세상을 두려워했고

범죄가 몰락한 조국은 강철 보안 유지라는 명목 하에

구세대의 직업으로 전락해버린 경찰의 비애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여러가지 떠도는 생각들을 무의식의 닻으로 정박시키고 

담뱃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저릿하게 풍겨오는 담배의 향기와 슬슬 불어오는 이른 시간의 찬 공기가 섞이고

저만치서 들려오는 양산형 EDM의 소리와 스포트라이트의 잔광이 내 방에 비춘다.

나는 인간과 동거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가난함과 동거한다.

가난함만이 지저분한 방 안에 틀어박혀서 평생을 함께 할 것 마냥 

깊숙한 바닥에 스며들어 방의 분위기를 거머쥐고 있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직업을 가지고도 살아가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부와 영광을 버리고, 오직 회색 팔찌에서 내려지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사는 법대로 사는 것, 존엄성이란 지나치고 있는 급행 열차의 

열리지 않는 문처럼, 내 인생에서 깜빡하고 사라진 순간의 빛과 같았다.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른 비극적인 생각들과 함께 보내는 밤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담요의 소리와 함께 찾아온 잠결은

그러한 생각들을 부스러뜨리기 충분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 아침도 변하지 않는 하루는 시작되었다.

끔뻑거리며 뜬 눈에는 초점없는 동공만이 나그네배처럼 떠다니고,

문명화를 상징하는 듯 회색 무광 코팅으로 칠해진 때 묻은 팔찌가

어떤 방법으로든 나에게 의무를 알리려 애쓰고 있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대기' 의무와 늘 같은 일상을 지키는 파수꾼.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의 경찰들의 최선이었다.

나는 경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제 직업이 그런데도 바꾸지 않는 내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렇게 이른 아침의 잠결을 보내고 어지러운 정신을 보채는,

여러 생각들을 하고 보면 어느새 4시간이 지나 정오가 된다.


나는 엘리트였다. 그것도 쇳덩이 같은 마음의 엘리트. 

두려움이 찾아오지 않고 감정 또한 존재하지 않던 무생물이었다.

'꿈'이라는 개념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꿈, 꿈하면서 

'너는 뭐가 되고 싶니?' 라고 어른들이 물어도

나는 그저 공포스러울 정도로 공허한 깊은 눈깔로 그들을 질리게 하곤 했다.

그렇게 내 조그맣지만 속알맹이가 들어찬 머릿통에서 

떠올릴 만한 '꿈'은, 아무것도 안하고 잘 사는 듯이 보이던 경찰이었다.

그래도 난 천재였다.

왜 과거형이냐고 묻냐면, 내 삶에서 더 이상 천재라는 개념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내 안의 자만을 죽인 자가 바로 감정이 풍부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그 많던 하루들 중 단 하나의 변화였다. 

매일 평소처럼 일어나던 시간보다 일찍 눈이 떠지고

정신이 맑았으며 내 안에 쳐박혀 있던 드넓은 우울이 증발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광장에 가장 많이 보이는 정오와 1시 사이 시각 쯤이었다.

순간 가장 큰 전광판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모자이크로 처리된 얼굴을 보이고 있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숨죽이는 분위기와 목에 보이는 핏줄이 그가 인간인 것을 가르쳐주는 듯 했다.

그의 목소리가 느슨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어버린 사회, 색을 잃어버린 사람들, 떠나버린 자연 이 세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방금 그 말로 인해, 야유하는 사람도 없었고, 옳다 외치는 이도 없었지만,

누구나 마음 속에서는 각자만의 혼란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 인간이 과거에 이루어냈던 수많은 업적들과 눈부신 문명의 발전은 어느새 기대 속의 미래를 만들게 되었고 그 기대했던 미래가 바로 저 세가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알 틈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였고, 긴장하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엄숙함도 또한 존재했다.

질서, 질서. 질서와 규칙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혼돈.

그는 빽빽히 늘어서 잘 정리된 책장 속의 쓰러진 책 한 권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저렇게 덮여버린 태양광 패널 뒷면의 홀로그램으로, 그 맑고 푸르던 하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들'이라니, 직접적으로 지배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유적으로도 표현된 '그들'이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충분히 기분이 상할 만한 단어였던 것이었다. 

그날 오후, 새롭게 등장한 범죄자이자 혁명자, 개혁가이자 계몽가인 그에게

14년만의 경찰 수배령이 떨어졌다. 


나란 것에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던가? 

나에게 그런 것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별똥별처럼 뇌 속을 가로지르는 호기심이 그때 스치듯 생겨났다.

그에 대한 광활하고 순수한 궁금증. 

그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으며 어떤 것이 그를 비틀린 혁명으로 이끌었는가-

생각이 둥그렇게 몰리고 점점 사라지기 시작할 때

스피커의 볼륨을 줄였다 높인 것처럼 그제서야 소리가 스윽하고 들리기 시작했다.


전광판에는 어느새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힘에 눌려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는 아나운서가

어설프게 들어도 머릿속에 글자가 박힐 발음으로 말했다.


[서울 전역의 전광판을 해킹한 정체불명의 해커가 나타났습니다.

경찰 중앙 본부는 즉시 이 범죄자에 대해 수배령을 내렸으며, 이는 

14년 전 강남역 묻지마 살인 이후..]  

  

전역? 전역이라니. 여기서만 일어난 일인 줄 알았더니, 

그는 아예 서울 전체를 해킹해서 자신의 삐뚤어짐을 알리고 싶었는가 보다.

'참 간도 큰 녀석이네, 재능을 저런데다 쓰다니' 라며 혀를 차는가 하면,

남의 일이라며 관심을 한 푼도 주지 않은 채 계속 걷는 사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