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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자, 의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환자목록으로 가득한 모니터를 꺼버렸다. 온종일 의료 기록을 바라봐 흐릿해진 안경과, 알코올 냄새와 식은땀이 밴 축축한 가운이 그의 노곤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는 누런 목때 낀 가운과 헐거운 안경을 책상 위에 던져놓곤, 지친 몸을 의자에 뉘이며 천장을 향해 몸을 뻗었다. 오후 내내 몰려든 환자 때문에 그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를 찾아오는 환자마다 사연도 각양각색이었다. 등락하는 주식 때문에 담배를 끊지 못하겠다며 찾아온 직장인을 시작으로, 친구 따라 우정 따라 다니는 산악회 때문에 술을 못 끊겠다는 노인. 시험날만 되면 위경련이 일어나 시험을 못 친다며 펑펑 우는 학생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여자 친구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낭만 청년까지.... 진료를 보면 볼수록 여기가 내과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던 그였다. 시골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병원이다 보니 조금만 아프다 싶으면 이곳으로 찾아와버려, 제대로 된 진료를 볼 수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가 진료를 진행할수록 환자의 병을 진찰해주기보다 환자와 상담을 더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쯤 되니 그는 자신이 의사인지 상담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몸이 아프기보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더 많으니. 이쯤 되니 마음이 곯는 병이 돌아 사람들이 아픈 것은 아닐지 의심이 가는 그였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사용한 의료 기구들을 다시 주문해야 했다. 그때, 진료실 문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진료실 문을 박차고 한 환자가 들어왔다. 그는 놀라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학생을 붙잡고 있는 아주머니와 어쩔 줄 몰라하는 간호사가 서로 뒤엉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거 놓으시소! 어머님, 지금 진료가 다 끝나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면 안 되세요....

 

 차라리 빨리 진료를 해주고 보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그는,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간호사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주머니는 간호사를 밀치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이고, 의사 선생님 이 얼라가 드디어 죽을병에 걸렸다 봅니데이. 답답한 듯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아주머니와 그 옆에 있는 학생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심각한 일임을 느낀 그는 급하게 가운과 안경을 걸치고, 동시에 진료차트를 꺼내 들며 빠르게 말했다. 어디가 아픈가요? 무슨 증상을 겪고 있죠?

 

  패혈증? 부정맥? 아니. 심각한 병이면 큰 병원으로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오만 물음표를 머릿속에 그리며 학생을 진찰하기 위해 다가갔다.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요 아가 갑자기 글을 쓰지 뭡니까! 네? 글이요? 그는 당황해서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요 머시마가 한동안 착실히 공부만 하더니만, 갑자기 교과서 대신 소설을 찾아 읽고 글을 쓰고 앉아 있지 않심니꺼. 한창 공부만 해도 모자를 시기에 갑자기 글을 쓰다니. 문제가 있는게 아잉교.... 아이고, 어째요 의사 선생님. 요 자슥이 판검사가 될 재목인데 글을 쓰고 싶다 계속 조르니, 이러다가 정말 큰일나는 거 아임니까. 엉엉 울부짖는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학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병은 어느 학계에 보고된 병인가. 이 환자는 어떻게 진찰해야 하는 것일까. 온도 차 다른 두 울음소리가 섞인 진료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글? 글을 쓰고 싶다고? 네가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정신 차리렴. 의사가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겠니. 그게 글 쓰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는 일 아니야? 글쟁이로 아무리 잘살아 봐야 기자밖에 더 되겠어? 글은 의사가 되어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잖니.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진료 차트에 병명을 적어가며 아주머니께 말씀드린다. 어머님, 지금 아드님은 중2병이나 감성병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게 크게 번지면 문학도 지망이라는 합병증도 나타날 수 있는 아주 무시무시한 병입니다. 뼈저리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감성에 젖어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제가 처방해드리는 약을 먹이시면 헛된 꿈도 몽상도 모두 잊어버리고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라는 진찰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그는 학업으로 인한 과로로 나타난 우울 증상이라며, 비타민제와 항우울제 처방을 내리고 아주머니와 학생을 돌려보냈다. 진료실을 나가면서 뒤돌아본 아이의 시선이 그와 맞닿았을 대, 그는 그 눈빛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료차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랍장에서 오래된 만년필 한 자루를 꺼내 든다. 그는 먼지 쌓인 만년필로 차트 한 귀퉁이를 써내려간다. 고독하고, 쓸쓸하고, 슬픈 것이 묻어 나온다. 굳어버린 잉크 멍울들. 자꾸 그 학생이 떠올랐다.

 

 그는 가운을 벗으면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 퀭한 눈동자에 여릿하게 그 눈빛이 스며들어있다. 아까 그가 내렸던 진단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게 크게 번지면 문학도 지망이라는 합병증이.... 제가 처방해드리는 약을 먹으면 현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쓴 알약을 삼킨 것처럼 인상을 쓰고는, 오래된 서류들을 모아둔 금고를 열어 그 안 깊숙이 만년필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도 모를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자물쇠로 금고를 잠가버린다. 그가 겪었던 과거의 아픈 열병들이, 묻어버렸던 추억 속에서 자꾸만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