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혈통의 삶이란 어떠한가.

 

평민으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갔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생각.

허나 윌리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삶은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이리로 오거라, 윌리엄!”

, 아버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집에서 나와선 안 된다. 알겠지?”

여보…….”

당신도 여기 꼼짝 말고 숨어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안 돼요, 여보!”

 

평온했던 시골 마을에서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

희미하게 느껴지는 탄내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어린 시절의 윌리엄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불온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한 손에 쟁기를 든 채 아버지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내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 알지?”

 

울음을 참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씨익 웃은 아버지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것이 윌리엄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 살려주십……. 크허억!”

크아아악!”

남자와 노인네는 다 죽여도 된다!”

 

속으로 아무리 빌어도 흉흉한 분위기가 가라앉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비명 소리를 듣는 사이 곁의 어머니는 무언가 결심한 기색이었다.

 

윌리엄. 이리로 오거라.”

 

윌리엄이 다가가자 어머니는 방 한구석의 장롱을 열었다.

작은 아이 한 명이 겨우 들어갈 그 작은 공간 속으로 윌리엄을 집어넣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절대 나오지 말거라. 엄마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렴. 절대 소리 내지 말고. 알았지?”

…….”

윌리엄!”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통 치는 어머니의 모습에 윌리엄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미소를 지은 그녀는 그대로 장롱 문을 닫았다.

 

쿵쿵쿵!

 

좋은 말로 할 때 문 열어!”

 

모든 시야가 차단된 윌리엄의 귓속으로 일단의 무리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곧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 일단의 발자국 소리. 방문 앞에서 멈춰선 이들이 웃는 목소리까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마치 광경 하나 하나가 눈앞에 그대로 그려지는 것 같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윌리엄은 그저 손발만 덜덜 떤 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절대 소리 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만 믿고서.

 

, 제발……. 살려주세요…….”

 

덜덜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윌리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 제발…….”

내가 보기엔 아직 하나 남았는데?”

꺄아아악!”

크헤헤헤! 어디 유부녀 맛 좀 보실까!”

, 안 돼!”

크악!”

 

각종 비명. 피 냄새. 이외에도 땅을 구르는 소란스러운 소리 등등.

머릿속으로 방안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윌리엄은 그저 울지 않기 위해 입을 꾹 틀어막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제발 우리 엄마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개 같은 년!”

커헉!”

 

그런 윌리엄의 기도가 무색하게.

비명 소리와 함께 남자의 욕설과 함께 푹, 푹 찍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커흑……. 끄억…….”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해도 못한 채.

입을 틀어막으며 그저 울음만 참았다.

 

끄르륵거리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게 되었다.

 

, 씨발. 기분 개 잡쳤네.”

 

, 하고 침을 뱉는 소리. 점차 멀어지는 발소리. 이후로도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진동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 피 냄새. 비명. 비명. 비명…….

 

이건 다 꿈일 거야.

기분 나쁜 악몽일 뿐이야.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란스러웠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어느새 주변은 그저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들리는 거라곤 까마귀의 울음소리 뿐.

 

윌리엄은 상상했다.

 

이건 악몽일 뿐이라고.

눈을 뜨고, 어머니의 눅눅하지만 따뜻한 스프를 먹고,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하고, 몰래 빠져나가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면서 놀고, 분명 그럴 것이라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조심스레 문을 열며 윌리엄이 눈을 떴을 때.

 

그 앞에는 온 몸이 난도질당한 피투성이 시체가 있었다.

 

…….”

 

현실감이 없는 그 광경 속.

 

윌리엄은 기괴하게 비틀린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겨우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 한가운데에서 반짝, 하고 작게 빛나는 게 보였다.

 

그것은 싸구려 장식을 달아놓은 비루한 펜던트였다.

 

어머니를 볼 때마다 항상 보였던.

그 익숙한 펜던트를.

 

윌리엄은 그저 멍하니, 한참을 그렇게 바라볼 뿐이었다.

 

 

***

 

 

허억!”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윌리엄이 이마를 짚었다.

 

이미 윌리엄의 침대는 물론이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마치 그 날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

 

문득 며칠 전 왕 앞에서 그 날의 일을 잊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감히 왕 앞에서 거짓을 고하다니.

 

…….”

 

멍 때리고 있을 틈은 없다.

오늘은 수행원들과 함께 먼 길, 트로웰로 향할 예정이었으니까

 

트로웰인가…….”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트로웰은 님블의 가장 적대적인 강대국이니 말이다.

 

심지어 이번 외교 담판은 국내에서는 철저히 비밀로 해야 했기에 고작 닷새 만에 결정된 사안이었다. 공적으로는 항상 덤덤한 모습을 유지하는 공주조차도 당혹한 표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표정을 숨기는 데 능한 왕족마저 그럴 지경인데 윌리엄이라고 아니겠는가.

 

허나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급히 정할 정도로 급한 사안이라는 얘기기도 하다.

 

숨을 돌린 윌리엄은 곧이어 채비를 갖췄다.

방금 전 악몽을 꾼 것 답지 않게 윌리엄의 행동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한 시간 동안 모든 준비를 마친 윌리엄이 숙소를 나섰다.

 

아직 해조차 뜨기 전의 어슴프레한 새벽.

문 앞에서 멍하니 경비를 서던 단원이 윌리엄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몸을 빳빳하게 세웠다.

 

, 충성!”

태평하군 그래.”

, 죄송합니다!”

준비는?”

지금 즉시 출발할 수 있다 보고 받았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열 분의 기사 분들이 연병장 뒷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주님은 도착하셨나?”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백작께서 먼저 와 계십니다!”

안내해.”

!”

 

뻣뻣하게 굳은 말단 단원을 따라 윌리엄은 연병장 뒤편으로 향했다.

 

이번 작전은 국내에서도 극비리에 진행되는 외교 안건인 이상 남들 눈에 쉽사리 띄면 곤란했다. 현재 윌리엄에게 안내하는 단원은 물론이고 곧 출발할 10명의 수행기사들조차 아직 정확한 작전 사안마저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자 빠르게 새벽에 출발하기로 한 것이기도 했고.

 

곧이어 약속 장소 근처에서 단원을 돌려보낸 윌리엄이 연병장 뒤편으로 향했다.

 

다소 단촐한 마차를 중심으로 익숙한 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례를 하는 기사단원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윌리엄이 마차 근처로 향했다.

 

마차 뒤편에는 콧수염을 만지며 곰방대를 뻐끔거리는 중년 신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윌리엄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셨는가?”

 


소설쓸때 특)일단 쓰고나면 무조건 예정 분량보다 늘어남

10화 내로 끝내고 싶은데 

심지어 야스씬도 한참 남음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