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검은 옷으로 위아래를 맞춰 입은 한 명의 남성이 단검을 겨누고 있었다.


용사라고 불리던 남성과 성녀라고 불리던 여성에게.



"한때 당신을 존경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용사."



단검을 든 남성의 곁에는

어울리지 않는 붉은 고깔모자를 쓴 궁수가 서 있었다.


얼핏 마법사로 착각할 듯한 의상을 입은 이 궁수는

혹시 모를 의심은 하지도 말라는 뜻인지

형형색색의 화살을 등의 화살 통에 재워두고 있었다.


단검 남성의 용모도 범상치는 않았는데

기본적으로는 닌자 같은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중무장 기사들이 쓸 듯한 강철 장갑을 끼고 있었다.


둘은 용사와 성녀를 집어삼킬 듯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전사의 복수에 앞서 구태여 묻겠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뭘 말이냐 도적?"



검고 큰 의자에 앉은 채로 용사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도적이라 불린 이는 단검을 든 사내이다.



"마법사, 오우거, 소굴, 전사. 이래도 기억 안 나십니까?"


"아... 기억나는 것도 같네."



용사는 자신의 흰 갑옷을 뽐내듯,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다 말했다.



"쓰레기는 기억 못해서.

... 아, 실력 아니고 인성 말하는 거다?"



용사가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좀 하나 묻자. 용사란 뭐라고 생각하냐?"


"... 교회 왈로는 사람들을 지키고 악을 처단하며 용기를 북돋게 하는..."


"틀렸어. 거기부터 문제잖아.

곰곰이 생각해 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마법사가 처음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이탈했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싶어서

우리가 찾으러 갔었지."



*



가장 먼저 마법사를 찾아낸 애는 당시 그녀의 애인이었던 드워프 전사였지.


땅딸막한 키의 전사는 그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절규와 함께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엇에게?


그 자리에는 오우거가 즐비했었으니 그들에게 였겠지.


이 녀석이 어지간한 쓰레기였던 이유가 바로 이거지.


앞뒤 재지도 않고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단 것만으로 오우거들을 죽인 거야.



그 뒤를 이어 당시 우리 파티 도적이었던 너와, 궁수였던 쟤가 도착했지.


너희 둘 다 도착하자마자 전사를 따라 무작정 오우거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너흰 줏대도 없이 그 무식한 짓을 따라한 거다.


동방에선 그런 짓을 부화뇌동이라고 하더군.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이냐.



나와 성녀가 도착한 건 한참 너희가 살육을 벌여 놓은 다음이었지.


절반이다. 절반이나 오우거들이 죽었단 말이다.


난 아직도 그때 일을 후회한다.


내가 더 빨리 갔어야 하는데- 하고 말이다.



*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나의 죄를 속죄할 방법을 찾았던 거다."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사."


"뭐가 이해가 안된다는 거지?"


"논리의 비약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우거를 죽인 것과 쓰레기인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하물며 그게 전사의 죽음과는 또 무슨 연관입니까.
말이 되는 변명을 해보십시오."



도적은 자신의 장갑을, 무쇠로 만든 장갑을 재차 움켜쥐었다.


도적의 손을 따라 끼긱- 하는, 작은 쇳소리가 났다.



"큰 상관이지. 너흰 그 오우거도 생명이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냐?"



용사가 죽은 이들을 추모하듯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도와 묵념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자세였다.

안타까운 낯빛과 지긋이 감은 눈으로 용사는 자신만의 상식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너희도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적 있었지?"

"... 예전에 마물에게."

"너희가 죽인 오우거 중에서는 갓 태어난 새끼들도 있었을 테고

누군가의 부모나 자식이었던 오우거들도 있었을 테지.
너흰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지도 모르는 오우거들을 거리낌 없이 죽인 거다.
너흰 너희가 당한 고통을 그들에게 똑같이 선물한 거야."


머리를 어지럽히는 화법은 용사의 특기였다.

용사의 뒤로 한 무리의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던 것인지 도적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너희 때문에 고아가 된 아이들도 있었을 테고

평생을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악몽 속에서 살게 된 오우거도 있었을 거야.


심성 착한 오우거도 있었을 테고

상냥한 오우거도 있었을 테다.


가슴 속에 꿈을 품은 오우거도 있었을 테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 노릇을 하는 오우거도 있었을 테다.


너희들이 한 행동은 그런 오우거들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거였다."



용사가 팔을 활짝 폈다.

자비로운 성자가 벽화 속에서 종종 취하던 자세였다.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들은 오우거였습니다. 그리고 전사의 죽음은..."


"오우거였으면 죽여도 되었단 말이냐?

너는 그들이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살육을 자행한 거지?


그들은 그저 살아가는 일에 열심히였다.


너는 그들이 오우거라서 죽인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너는 그들이 인간이 아닌, 마물이라서 죽인 거다."


"마물이면 죽이면 안된다는 것입니까."


"마물도 또한 인간과 같은 하나의 생명체지.


즐거운 걸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 수 있고

맛있는 걸 먹으며 행복해 할 수 있고

상처를 만지면 아파할 수 있는


그런 생명체란 말이다.


너는 정녕 그들을 죽이면서 아무런 생각이 안 든 거냐?


모든 생명체는 똑같이 존엄하다.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서는 안돼."


"그러는 넌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지금껏 고깔모자를 눌러 쓰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궁수가 끼어들었다.


분에 받쳐 나온 눈물이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전사의 죽음, 그것은 당시 같은 파티였던 용사가 직접 자행한 것이었다.

용사는 이번에도 하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사 말이냐? 그를 죽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멈출 기미가 안 보였으니까.

다소 과격한 방법이라도 그 학살을 멈추었어야 했지.


뭣보다 그 녀석은 너무 많이 죽였어.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단 말이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인간 쓰레기는 지옥에.

교회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더냐."


"네가 뭔 자격으로 심판 같은 소리를...!"


"[용사] 니까. 용사는 모든 생명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는 자니까.

그래서 그렇게 한 것이다.

거꾸로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역할을 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오우거를 죽여대는 전사를 막고자 전사도 죽였단 겁니까?
그리고 오우거를 죽이는 건 생명을 해치는 것이니 큰  죄이고?"


"몇 번이나 말했잖냐. 오우거도 생명이라고.

넌 거꾸로 누가 너희 가족을 죽이고 있으면,

그걸 보고도 죄가 아니라 할 거냐?"


"용사."



도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와는 달리, 도적의 목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턱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들은 오우거食人鬼였습니다 용사.

오우거가 무슨 뜻인지 압니까?"


"알고 있다."


"... 제일 먼저."



도적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인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도 갈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제일 먼저... 마법사는 양다리가 잘려나갔습니다.

오우거들이 마법사의 양다리를 잡아 뜯어서 그대로 불에 구웠죠.


으드득 으득 하는, 오우거의 이빨이 뼈에 닿는 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만! 그만 해 도적!"



도적의 곁에 있던 궁수가 고깔모자를 다시 눌러 쓰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도적의 목에는 아직도 핏줄이 서 있었다.


궁수의 비명에 아랑곳 않고 도적은 말을 이었다.



"그 다음은 팔이었습니다.


구워 먹는 거 다음은 날 거라면서

이빨을 번뜩인 오우거들은

마법사의 팔에서 생 살을 뜯어먹었습니다.


한번 두번...

오우거의 주둥이가 움직일 때마다

교황청 앞에 세워진 분수 마냥

마법사의 양팔에서 피가 솟구쳤습니다.


다음은?

고기는 역시 생고기라면서 손으로 파 먹더군요.

억센 손으로 마법사의 갈비뼈를 먹기 좋게 뽑고

크게 힘을 줘선 등뼈를 살에서 빼냈습니다.


그리곤 손에 집히는 만큼 마법사의 살점을 찢었습니다.


딱 자기들 한입 크기로 말이죠.


찌이익 찌이익 하는 소리가 나더군요.


오래된 가죽 장갑을 찢는 듯한 소리 말입니다.

찢어진 건 장갑이 아니라 마법사의 살가죽이었지만.

더 무서운 게 뭔지 압니까?


그 과정 동안 마법사는 살아서 바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알량한 철학 때문에, 당신과 성녀 둘에게 발목이 묶여서

아무 것도 못하고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고.


아직도 밤만 되면 달도 아닌데 떠오릅니다.


시뻘건 마법사의 피며 내장,

맛있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오우거들의 붉게 물든 주둥이,

마법사의 다리를 구울 때 나던 구역질 나는 냄새...


우린 몬스터를 잡은 게 아니라 괴물을 잡은 겁니다.

식인귀를 죽인 거란 말입니다.

용사, 진정 우리가 그런 오우거食人鬼를 죽이는 게 잘못된 일이었습니까?"



도적의 눈에는 이미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꼭지가 돌았다' 라는 말이 있다.


분노에 차서 이성을 잃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진 상태이다.


도적은 초인적인 이성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꼭지는 이미 돌아간 상태였다.


그저 죽어간 동료들의 원통함에
용사의 마지막 변명을 들려주기 위해서
그는 있는 힘껏 이성을 부여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남겨진

머리카락보다 가늘어진 도적의 이성의 끈은

용사의 말에 끊어지고 만다.


용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이 당연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에 대해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다.

용사에게 있어서는 마치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 와 같이
하등의 의문을 느낄 일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인데
도적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을 먹어서 죽였다라..."


도적의 짧고 어리숙함에 용사는 한숨만 나왔다.


"너는 빵 안 먹고 사냐?"

"?"

"너도 빵 먹을 때마다 수많은 밀을 네 뱃속으로 밀어 넣지 않느냐.
 오우거는 사람이 아니면 배를 채울 수가 없다는데, 

그럼 넌 오우거 보고 죽으란 거냐?
네가 하는 것은 괜찮고 남이 하는 것은 아니꼬운 거야?"


용사는 여전히 뻔뻔한 얼굴이었다. 


"도적, 우린 그런 걸 보고 이기심이라고 하는..."



말이 끝나는 걸 채 기다리지 못하고


과거 용사라고 불리던

현재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한 검사에게,

도적이 달려들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며.


***


이상한 거, 어색한 거, 모자란 거 있으면 피드백 좀
덤으로 제목도 추천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