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손에 구멍이 뚫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여자의 시체 옆에 있는 침낭 위에 몸을 뉘었다. 편안하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서 눈만 감으면 짧은 잠에 빠졌고 꿈은 꾸지도 못한 채로 계속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시체는 그를 옆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 남자 말곤 아무도 없었지만, 그 시선 덕분에 남자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생각에 빠질 만큼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안정감을 찾으려 눈은 빗장 걸린 문으로 향했지만, 그건 단단해 보이면서도 연약한 벽에 불과했고 남자는 슬러그 한방으로 조각날 문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여자처럼 목이 그어질 자신의 미래도 떠올릴 수 있었다.


불온한 생각과 함께 몸도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빗물 덕분에 그의 몸은 시체같이 차가웠다. 하지만 오른손의 상처를 중심으로 몸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붕대를 두르고 약을 먹는 게 다였다. 전문적인 치료와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불가능하고 시간도 없었다.


남자는 열이 불러온 통증에 메스꺼워하고 힘들어했다.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는 끙끙 꺼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못 한 채 무방비한 상태로 있는 게 언짢아서 그는 오른손에 잡히는 끈적한 피를 문질렀다. 그러자 붕대 아래의 문드러진 살점이 부서진 뼈와 얽힌 채 천천히 움직였다. 미약하게 움직이던 손은 그 이후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안해진 그는 손에 묶인 붕대 끈을 풀면서 끈적하고 질척해진 상처를 쳐다보았다. 검게 물든 오래된 피와 신선한 붉은 피가 쩍쩍 갈라진 피부 사이로 새어 나오는 와중에 손바닥엔 커다랗고 시커먼 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남자는 파상풍에 걸리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심한 상처였고 가만 내버려두면 굳이 파상풍이 아니라도 큰일 날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고작 실수로 이렇게 되버린 자신을 원망했다.


연륜이 있는 만큼 이런 일을 자주 겪긴 했지만, 그래도 허탈함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나았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만이 머리에 맴돌아서 남자는 미칠 지경이었다. 상처 입은 상태로 방치되는 비참함은 고통보다 심했다.


목숨을 걸고 목숨을 연장하는 행위가 의미가 있나?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 질문에 답은 없다. 그렇다고 질문이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생각하길 고집했다. 30년 동안 이유 없이 그랬다. 어쩌면 고통을 잊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랬다. 남자는 그걸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문득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아있음을 알았다.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리를 맴돌았고 그 생각은 그의 손처럼 그의 뇌를 뚫었다. 바보가 된 그는 뚫린 손바닥을 응시하다 총을 껴 앉고 잠에 들었다. 상처에 붕대를 감지도 약을 바르지도 않은 채로 


그는 콜로라도 강을 거닐고 있는 꿈을 꾸었다. 한 손에는 낚싯대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투박한 총이 들려져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한 사람이 더 있었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걷고 있었으며 둘 다 짐승 가죽을 엮어 만든 누더기를 입은 채 지평선을 응시하며 태양이 남은 빛을 천천히 꺼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장대한 빛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남자는 시간을 버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몇 시간이나 물 위에서 하늘 아래의 밝은 세상, 주황색으로 빛나는 끝 없는 강과 검정색의 가는 줄이 된 지평선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지평선에 걸친 태양은 가라앉지 않았고 건너편 하늘에서 달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결국 이 세상이 꿈인 걸 알아차렸다. 그러자 하늘은 예고도 없이 어두워졌다. 하늘에 보라색과 주황색으로 물든 구름이 몰려와 층층이 쌓이더니 폭풍이 모습을 드러내고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랑비는 장대비가 되었고 이제 비와 구름 사이로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별이 총총하게 박힌 하늘 아래에서 보라색으로 물든 밤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남자의 몸은 물에 젖은 채 말라가고 있었고 강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뺨에 눌어붙어서 그는 바닷물 특유의 소금기 섞인 비릿내를 맡을 수 있었다. 남자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곳이 어디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부였던 적도 없었고 시간을 낭비한 적도 없었다. 비가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주변 소음을 집어삼키며 남자의 귀에 앵앵 울려 퍼졌다. 그는 어지러워 하면서도 저체온증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문득 마지막 남은 양심 덕에 소년을 떠올린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어둠이 소년과 남자의 시야 두 가지 전부를 집어삼켰고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무력감 덕분에 그는 당황하고 놀라고 말았다. 꿈인 걸 알지만 꿈이 아닌 것 같았다. 낚싯대는 손에서 떨어졌고 작게 첨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른손의 권총은 놓지 않았다. 총은 그에게 있어서 전부였다. 어둠을 향해서 "어디 있니?" 하고 그는 물었다. 그러자 차가운 비가 입으로 들어오고 콜로라도 특유의 방사능 없는 공기가 폐에 가득 찼다.


그때 어둠이 말을 걸었다. 삶에 이유가 없다면 더는 살아갈 이유도 없어지는 건가요?


남자는 이게 소년의 물음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문을 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나 몸은 그 어둠 속으로 다가갔고 남자는 소년이 있다고 생각하는 장소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빨리 나오기나 해!" 하고 그는 소리쳤다. 소년은 침묵했다. 그는 소년이 물에 익사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겁을 집어먹은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잠시만 어째서 내가 알고 있는 거야?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 아니 철학은 나하곤 안 어울려 무슨 질문인지도 모르겠어. 여긴 어디지? 저 아이는 뭐란 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강물이 범람하여 콜로라도가 그의 코 아래를 집어삼켰다. 눈까지 잠길 무렵에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입을 벌리면 부글거리는 공기 기포가 허공에서 터질 뿐이었다. 낚싯대와 함께 소년이 검은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꿈이 참 이상하다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날 무렵에 그는 앉아있었고 몸은 오랜 여정을 끝낸 것처럼 무거웠다. 휴식을 취한 눈은 메말랐고 오른손이 불타오르는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폐가 짓눌리는 감각이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채 남자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했다. 여러 번의 기침이 끝날 무렵에는 메스꺼웠던 속은 잠잠해졌고 그의 수통은 텅 비어버린 후였다.


그는 토하듯이 커다람 트림을 했고 속이 비워지자 아까보다 더 편안한 긴 숨을 내뱉었다. 악몽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꿈은 빠르게 사라지는 법이지만 강렬한 꿈은 일주일을 넘게 머릿속에 남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체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푸른 눈은 반쯤은 깨져있었고 시체의 피부는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그러나 목에 붉은 상처만 아니라면 여전히 살아있어 보였다.


남자는 시체의 눈을 감겨주려 했지만, 시체는 눈을 감지 않았다. 몇 번이고 손을 움직여서 억지로 눈을 감겨도 금방이고 눈을 떠버리며 메마른 눈동자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눈에 밟히는 게 하나 있었다. 여자의 품속에 삐져나온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는 흥미를 느끼고 그것에 손을 뻗었다. 파헤쳐진 가죽옷과 피에 젖은 모피 담요를 헤집은 끝에 발견한 건 일종의 책이었다.


노트는 갈색 가죽으로 외피를 덮었고 두깨는 벽돌만 한데다 무게도 그것과 비슷했다. 남자는 등허리를 벽에 기대어 노트를 펼쳐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이 심한 고통과 함께 경련하더니 곧 책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가 욕을 내뱉으며 오른손을 쳐다보자 아까보다 상태가 나빠졌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상처 위에 붕대는 없었고 약도 없었다. 붉고 검었던 피부는 남은 생기마저 사라져 부패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의 오른손이 이젠 손과 손바닥이 합쳐진 거대한 고깃뭉치같은 감각만 느껴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지 하고 그는 자신을 책망했다. 철 독이 옮았구나. 그러나 후회와 상처는 시기를 놓쳐 버렸고 그런 것들은 파고들수록 항상 덧나는 법이다. 남자는 후회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생각으로 넘어갔다. 상처는 계속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처는 치료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불가능했다. 덕분에 그는 최악의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에겐 기도와 절단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고통과 상처를 무시하기로 했다. 나중에 쓸 연고와 약들이 마법을 부릴 거라 믿는 건 아니었다. 그는 행운에 운명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행운을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손을 자른다고 해도 살 수 있을거란 확신도 없었고 손을 잃어버리는 것 보던 뭐라도 하는 게 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도시로 가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물건을 챙겨서 도시로 가자. 의사를 찾자. 그러면 돼 운명은 공평하고 그건 행운과 불행도 마찬가지야 불행한 일이 있다면 언젠간 반드시 행운이 찾아오지 그러면 손이 꽤 뚫렸으니 의사 찾는 것도 꽤 쉬울 거야 하지만 지금은 쉬어야지. 요즘 같은 시기에도 의사는 많았다. 제대로 된 의사는 적었지만 그래도 있긴 있었다. 


돌팔이라면 왼손으로 죽여주지 하고 생각을 마친 남자는 다시 쉬어야 겠다 하고 크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기어서 시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왼손만으로 가죽 가방에서 붕대와 약물을 꺼내고 다친 손을 치료했다. 이후에는 더 편안하게 쉬려고 했지만, 시체 옆에 얼굴을 묻는 게 다였다. 더는 담요를 덮을 힘도 몸을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아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 생각대로 시체는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 시체보다 그의 손에서 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어차피 쉴 시간도 많이 없었지만, 남자에게 있어서 그 짧은 시간은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결국 2분 가량 쉬고 그는 다시 행동하기로 했다.


노트는 읽지도 못한 채 그의 가방으로 들어갔다. 정보는 중요하고 책은 정보를 담았으니 꽤 중요한 거였다. 남자는 챙길 수 있는 모든 물건을 가방에 넣었다. 약이나 기호품 위주로 챙겼고 가방에 있던 고물들은 이 자리에 모두 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이 무게를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는 탄약까지 버릴까 싶었지만, 최종적으론 한발도 버리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칠 무렵에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먼지 묻은 가죽 코트와 방탄복과 방독면 그리고 후드와 그 아래의 철모까지 옷은 메말라서 뻐석거렸고 화로 근처에 있어 따스했다. 그래도 남자의 몸은 오한으로 떨렸고 몇 번은 이를 딱딱거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 1 분 동안 몸에 열기를 채우고 고통을 잊게 할 약을 박아넣은 다음에야 그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복도는 어두웠고 조용했다. 벽 건너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걸어서 깡통이나 함정들이 작동되지 않기를 했다. 복도를 잘 확인하지 않아서 뭐가 있는지 몰랐다. 얼마 가지 않아서 희끄무리한 달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발을 디딘 순간에 허리춤의 가이거 계수기가 보글거리며 소리를 냈다.


그는 총을 단단하게 붙잡은 다음 앞으로 있을 무언가에 긴장한 채 계단을 올랐다. 남자는 지상으로 나갈 때면 항상 긴장하곤 했다. 지금은 더 그랬다. 그는 이곳을 지키는 무리가 있을 거라고 확신이 있었다.


현관으로 나가보니 무리가 있었다. 서너 명에 총을 들었고 단체로 빗물에 푹 젖은 채 방독면의 고글을 빚내고 있었다. 그들은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그들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거무스르한 빛에 몸이 반짝이고 있어서 여러 마리 벌레가 어깨에 눌어붙은 것 같았다. 


남자는 한숨을 쉬면서 이제 또 어떻게 하지 하면서 생각을 했다. 일단은 몸을 숨겼는데 아마도 계산대였을 거대한 잡동사니 사이였다. 남자는 손에 상처가 난 상태로 허리를 굽히고 조용하게 움직이느라 고생과 고통이 심했다. 그들은 계속 움직이며 남자의 근처로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방독면에 웅얼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을 뿐이었다.


개중에 덩치가 큰 놈 하나가 몸집에 맞는 커다란 총을 휘적거리며 자기 무리에게 무어라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명 중 두 놈은 상층으로 가고 남은 두 놈은 입구를 지켰고 다른 한 놈은 남자가 있는 쪽으로 더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는 소총의 안전장치를 확인하고 만일에 대비해싿. 만약에 더 가까워진다면 그냥 쏴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놈은 계산대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지하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곤 자기네들 무리를 다급하게 부를 뿐이었다. 


이놈들은 이곳에 주인이 아니라 남자와 같은 방랑자 무리였다. 남자도 그걸 깨닫고는 그냥 조용히 있다가 전부 다 지하로 사라질 무렵에 입구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자는 세상이 환하게 보이는 대리석 계단 위에 섰다. 밖은 차가웠고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으며 달의 거무스름한 빛만이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는 아까보다 더 심해져서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주변에 가득했고 상층에서 하층으로 작은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남자가 계단을 내려갈 무렵 시커먼 하늘에 몇 번 번개가 치면서 세상이 환하게 밝혀졌지만, 대부분 시간은 뚜렷한 광원이랄 것도 없어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다시 가이거 계수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기계 보고 닥쳐 하고 한마디 하더니 다시 걷는 것에 집중했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이건 행운이기도 했다. 도심에는 항상 약탈자가 많았고 개중에는 저격수도 있었다. 어둠은 그들에게 있어서 공정한 은신처이기도 했지만, 남자에 입장에선 일종의 엄폐물이었다. 적들이 야시경 같은 끔찍한 기술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거의 완벽했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했다. 근방 5미터 주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만이 가득했고 그런 검정색 속에 뭐가 있을지는 보지 않고 선 모른다. 남자는 예전에도 어둠 덕분에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당장 최근에도 손에 구멍이 뚫렸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더 조심스럽고 서두르지 않으며 조용하게 몸을 움직였다. 걸음을 옮기면서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보긴 했지만 그저 고통을 잊기 위한 행동이었다. 손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비가 그의 몸에서 열기를 빼앗아 가고 있었다.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번개가 쳤고 큰 소리와 함께 세상이 잠시 밝아졌다. 남자는 사람을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앞 10미터 근처에 아까의 무리보다 더 많은 인간이 그를 마주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 집단과 한 남자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고 남자는 넘어지고 말았다. 건너편 어둠에선 비명과 총소리가 동시에 들렸고 그는 빗물이 잔뜩 고인 구덩이에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총을 갈겼고 한 탄창을 다 썼는데도 여전히 소리가 들렸다. 또한 총알이 그의 머리 위와 어깨 근처에 박히며 물에 빠지는 소리 바람이 찢기는 소리를 냈다. 


서로 보고 맞추진 못하겠지만 운 나쁘게 한발이라도 맞는다면 죽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한 번에 죽지 않더라도 옷에 구멍이 뚫렸다간 그곳으로 방사능이 들어갈 거고 한 주를 버티지 못하리라는 건 상식이었다. 그 점을 생각해보면 여기서 총을 쏘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많이 쏘면 상대방 몇 놈은 분명 맞을 거고 확실하게 죽을 테니까. 하지만 남자보다 그들이 숫자가 더 많았고 숨어있다고 총알을 안 맞는다는 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번개가 치고 세상이 잠시 밝아진 틈을 타서 도망칠 구석을 찾았고 왼쪽에 있는 무너진 폐허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를 공격하던 무리가 소리를 지르다가 잠시 총을 쏘지 않았을 때 그는 그곳으로 소리 없이 다가가 구덩이를 빠져나오고 건물의 벽을 타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다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이미 건물 깊숙이 들어간 후였다. 그리고 그곳에도 사람이 있었고 이번엔 손전등도 있었다. 빛과 총알이 날아왔다. 남자는 벽 뒤에 숨어서 총을 갈기려고 했지만, 탄창을 다 써버려서 재장전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친 손 덕분에 탄창을 놓쳐버리고 말았고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더 해버렸다. 결국, 벽이 허물어지기 직전에 그는 몸을 던져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총알이 휘날리다가 두 집단 사이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남자는 웅덩이에 숨어있다가 전투가 끝날 무렵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손이 경련하더니 이번엔 숨이 막혀서 공기를 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올라오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고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힘을 줘서 움직이려고 했는데 아무리 발작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필터에 방사능 섞인 물이 들어왔고 그는 물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러다가 죽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익사하기 직전에 누군가 그를 끄집어냈다. 남자는 방독면에 대고 먹은 물을 토했다. 이제는 방사능 중독으로 죽을 게 뻔했다. 무거워진 가방이 어깨에 여전히 묶여있었지만 물을 먹어서 평소의 세배는 무거워져서 그는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소총은 잃어버리고 없었다. 오른손이 타들어 가는 고통으로 괴로웠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견뎌야해, 견뎌야해.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하고 그는 다음 순간에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