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버려진 회색빛 하늘이 장대한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동쪽 하늘이 불타오르듯 사라졌다. 하늘의 별 무리가 점점 흐릿해지고 저 멀리서는 달이 가라앉았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아침의 따스함에 녹아들 무렵에 남자의 뺨에도 한 줄기 빛이 닿았다. 하지만 여명의 불꽃도 그의 잠을 깨우진 못했다.


남자는 폐허에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허리는 굽었고 얼굴은 다리 사이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의 몸 위에는 희끄무리한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서, 석고에 뒤덮여서 죽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었다. 다만 지금의 모습이 어울릴 뿐이었다. 본래 동상으로 만들어진 듯이 어깨와 등은 넓었고 단단했으며 자세는 좌절하거나 혹은 깊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있을 때 더 가치가 있어 보였다.


오전 하늘에 회색빛 구름이 층층이 쌓이고 다시금 바람이 차가워지며 생기 없는 폐허 속에 불어왔다. 남자는 밝고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서 뜨겁게 불타오를 무렵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무의식 속에서 밤 동안 보았던 조용한 꿈을 회상하며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처럼 굴었다. 하지만 몽롱한 주인과 다르게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옷에 붙어있던 두꺼운 먼지를 털었다. 밤사이에 뒤덮인 먼지에서 안전한 건 그의 얼굴뿐이었다. 다른 건 전부 흰색에 물들어서 폐허와 하나가 되었다. 그러고 잠시 뒤에 그는 정신을 완전히 차리고 거친 기침을 하며 폐에 쌓였던 먼지를 털어냈다. 기침과 함께 떨어뜨린 침에는 붉은빛이 돌았다.


이제 남자는 폐허로 다시 향했다. 옷에 남은 먼지를 털고 가방을 멘 다음에 들어왔던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렸다. 남자의 두 눈에는 검은색 반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눈이 흐릿해지더니 눈물이 고였다. 폐는 답답했고 가슴속에 기운 없는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목이 간지러워서 남자는 연신 기침을 했다. 그럴 때마다 침이 밖으로 나왔는데 전부 붉었고 몇 번은 턱을 따라서 끈적하게 늘어졌다.


입을 문지르자 그의 눈에도 피가 보였다. 내가 죽어가고 있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손바닥에 끈적이는 피 위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더는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은 처참했다. 울어? 남자는 유년기 이후로 울음은 졸업했다. 아프거나 해서 반사적인 작용이 아니라면 감정으로 운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에초에 감정이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따갑고 건조해서 안쪽이 콕콕 찌르고 아파졌다. 시선은 중앙에 좁은 터널이 생겨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양 귀에서 이음을 들었다. 오른쪽이 더 컸다. 고장 난 음향 기계가 내는 높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앵앵 울렸다. 몇 번은 고막이 딱딱하게 움직이면서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지만, 그의 속에서는 가슴속 두근거림과 함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는 귀를 막고 태아의 자세를 잡은 채로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다. 고통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번이 한번이 아니었고 남자는 가끔 이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고통의 원인을 몰랐다. 하지만 천천히 익숙해지고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이전보다 약해지고 있었다. 곧 숨을 쉴 때마다 뒷골과 폐가 아파졌다. 속이 메스꺼웠고 방광이 신호를 보냈다. 그는 다리를 고운 채로 헛구역질을 했다.


그는 입에 욕을 담으며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빨리 움직여 더 할 수 있잖아 엄살 부리지 말란 말이야."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엄살을 부리지도 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딱 느끼는 그대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과 질책이 힘이 되리라 믿었다.


해가 점점 더 강렬해지면서 남자의 눈에 빛을 가져왔다. 가슴의 답답함과 목에 걸리는 간지러운 감촉도 고막의 이상도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피 묻은 폐허는 메마르고 그 위에 먼지가 눌러앉아 고통의 흔적은 사라졌다. 남자는 태연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허리춤의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텁텁한 입안에 물이 들어오니 조금은 살맛이 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그는 속에서 올라온 물 같은 토사물을 뱉었고 바로 바지를 벗어서 바지에 실수하기 직전에 방광을 비웠다. 몸이 차가워지면서 오들오들 떨렸다. 하지만 몇 분 지나서 몸은 온기를 되찾았다. 몸이 최악이었고 남자는 움직이기 싫었다. 폐허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 싶었지만, 그 잠이 왠지 영영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 두려웠다. 그는 아직 자고 싶지 않았다.


"아직 걸을 수 있어. 자기엔 너무 이르지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걸?" 하고 그는 자신을 벗 삼아 말을 걸었다. "무언갈 해야 해 그러기엔 너무 늦은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야." 그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고 믿었다. 폐허에서 물건을 찾아서 하루 먹고 사는 걸 넘어서 지금의 가치 없는 하찮은 삶에 뜻깊은 의미를 부여할 기회를 믿고 있었다.


여전히 태양은 쨍쨍했다. 날씨는 어딘가 떠나기 좋은 날씨였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남자는 시원하다고 느꼈다. 따스한 온기도 되찾은 터라 상태가 좋지 않아도 그는 다시 자신감과 용기를 되찾았다.  


그래서 다시 폐허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상가로 향했다. 멀쩡한 마트라도 하나 찾으면 일주일 정도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곳에서 남자는 기울어진 전봇대와 녹아내린 철근과 콘크리트가 뒤섞인 거대하고 흉측한 잔해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돌과 철로 이뤄진 달팽이 같았다. 십자가 형태로 만들어진 대로에는 차들이 넘어져 있었다. 상가에는 무언가 있겠지 하는 미약한 희망이 있었지만, 그의 인생이 그렇듯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뒤져 볼 만한 건물들은 없었고 그곳의 건물들은 멀쩡한 게 없었다. 대부분은 부지를 따라 도미노처럼 무너진 높이 10미터 짜리 거대한 돌무더기밖에 되지 않았다. 잔해들 위로는 뽀얗게 흰색 먼지가 내리 앉았고 흉흉하게 뚫린 구멍들 속에선 더 작은 돌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는 온갖 것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이런 돌무더기에 불과했다. 무너지지 않은 것들은 텅 비어있었다. 200년 동안 멀쩡한 게 있다면 그게 이상한 것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슬슬 폐품업자들은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자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흐르고 있어."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변한 게 뭐지?" 하고 그가 대답했다. 삶도, 의미도 인간이 세상이라 정의한 모든 게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만은 줄어들지 않았고 파괴와 상실에 뒤따르는 새로운 탄생은 없었다. 태초의 모습으로 인간은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그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인간이 대단하긴 해." 그가 말했다. "적어도 지금보단 대단했다고." 자연적으로 태어나서 본능적으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건 벌레도 할 수 있어. 우리는 그 친구들과는 다르지 오직 우리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인류가 발전을 포기하며 후대와 선대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한때 꼬리 달린 짐승으로의 퇴화와 멸종이라는 비극적인 행진을 시작한 이후로는 그 의미도 생각도 쇠퇴하여 과거의 것이 되었다. "삶이 있어야 무언가 생기는 건 맞아. 그걸 부정하진 않아. 하지만 미래를 완전히 포기할 정도인가?"


"차라리 기계가 우릴 다 죽이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하고 그가 말했다. 서부나 동부나 기계가 파괴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었다. 기계들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만들어낸, 이제는 재현할 수 없는 유물인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세계와 현 인류 사이의 연결고리이자 찬란한 문명의 적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남자는 기계들의 살인과 파괴의 행보에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본능만이 남아버린 인간을 징벌하기 위한 문명의 마지막 자비 혹은 안락사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그는 평소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삶이 있으니까 나머지가 있는 거야 우리 모두 지금은 삶에 지배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태지만 살아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는 거야."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이 반복되지도 않고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고 좋은 날이 생기다 보면 변화도 생기는 법이다. 세상은 그렇게 바뀐다.


이제 그는 상가를 빠져나와서 다른 지구로 나왔다. 그곳에는 차량도 없었고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사방이 뿌연 흰색이었지만 반쯤 무너진 마천루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어서 어둡고 주변보다 추웠다. 건물들도 다 낮아서 얼핏 보면 빈민가처럼 보였지만, 가로수의 흔적이 있었고 잘 정리된 도로의 잔해를 봤을 때 이곳이 문화지구나 혹은 공업 단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는 이곳이 문화지구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거대한 공장 대신에 대리석을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박물관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즈음엔 태양이 건물 너머로 가라앉아서 서쪽 하늘과 지평선이 밝은 주황색과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서쪽은 밤의 그림자가 더 짙은 보라색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옅은 구름이 움직이는 회색빛 하늘 사이로는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한숨을 내뱉었고 찬 공기 속으로 그의 숨결이 새하얗게 녹아들어 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남자는 더는 탐사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단 박물관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곳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최초의 대전쟁 이후로 사람들은 박물관을 짓는 것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곳은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진 거대한 방공호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도시를 세울 만큼 많은 물자가 있었다. 그가 태어난 도시도 박물관으로 도망친 후손들이 세운 장소였다. 오늘 아무것도 찾지 못해서 그의 가방은 가벼웠고 걸음 또한 편안했다. 그러나 몸은 무거웠고 정신은 피곤했다. 남자는 사람들이 남긴 10분의 1이라도 있다면 오늘 하루는 풍족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대리석 건물은 계단 또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높이가 10미터가 넘었으며 건물은 그 위에 있었다. 남자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밑에서 희끄무리한 먼지가 몸에 달라붙었다. 가방 속에서 덜그럭거리는 작은 선풍기와 함께 박물관 앞에서 서보니 그곳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컸다. 여섯 개의 거대한 기둥이 삼각형의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전부 다 대리석이 아니라 페인트 입인 콘크리트였다.


입구는 4미터가 넘어가는 강철이었고 문 하나는 반쯤 열려있었다. 그 아래에는 먼지가 없었다. 남자의 걸음마다 바닥에 흰색 발자국을 만들었다. 반대로 그가 올라온 계단에는 눈 위를 걸을 때처럼 신발 자국이 남아있었다. 문득 그는 약탈자를 떠올렸다. 흔적이 너무 짙었다. 하지만 어둠이 있었고 또 지금까지 약탈자의 흔적은 본 적이 없어서 남자는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만약에 약탈자가 그의 흔적을 쫓는다고 해도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비록 총에 총알은 없지만, 허리춤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있었고 두 손과 팔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어둠은 보이지 않는 엄폐물이라 총이 없어도 어느 정도는 괜찮았기도 했다. "올 테면 오라지." 그는 점점 어두워지는 대로와 과거를 간직한 음울한 폐허를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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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개떡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