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도중 다친 병사들을 돌봐주고 있지만 도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 속에서 무슨 개짓거리 하는 건지 모르겠다. 들어보니 자신들도 무슨 명분으로 싸워야 하는지 이제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다. 사기는 당연히 저하됐고 방어전에 목숨 내놓고 왕국 지키겠답시고 왕 조차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보니 그저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다친 병사들이 말하고 있는데 한탄스럽기 그지 없다.


"진짜 이런 전쟁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하루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엄마 보고 싶어. 제발 죽고 싶지 않아."

"가족들 데리고 도망 쳤어야 하는 건데."


병사들이 하나 둘 뜻을 모아서 울고 있었다. 온 몸이 저려질 정도로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죽음 뿐이라는 것을. 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왕들의 놀음 거리에 반란이 안 일어나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나 해줄 수 있는 건 치료 해줘서 다시 전장 속으로 가야 한다는 거다. 나도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어머니에게 갈 것이다.


"하아. 너무 힘들어. 우울해질 것 같아."


한참 울려 퍼지는 전장에서 적군 진영이 후퇴를 하면서 드디어 방어전에 성공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무언가가 나타났고 수많은 강철 같은 새들이 몰려왔다.


"저게 뭐지?"


하늘에서 이상한 괴음이 울려 퍼지고 전장에 생전 처음 보는 갑옷을 둘러싼 병사들이 무차별적 포격을 하고 있었다. 후퇴하던 적군 진영은 순식간에 박살 났고 몇 시간을 막아냈던 방어전은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본보기를 삼는 듯이 백성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10분 만에 모든 것이 무너졌고 왕국은 위기에 놓았다. 네온은 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린, 어서 도망쳐야 해요.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어요. 최대한 멀리 가세요. 그리고 왕국에 자초지종을 설명하세요. 우리가 도움을 받으려면 모두가 합쳐야 해요."

"하지만,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도와줘야 해요."

"당신이 죽으면 대책도 못 세우고 아무것도 못해요. 저는 사람들을 대피 시킬게요. 제일 아끼는 가족이 있다면 같이 저 멀리 가셔야 됩니다."

"일단 알겠어요. 고마워요. 네온씨"


네온은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고 대피 시키기 위해서 다시 시작된 지옥에 뛰어 들었다. 남이지만 나를 아끼는 모습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한번도 나를 친절로 베풀지 못한 사람은 봤어도 마치 계속 얼굴을 비춘 사이처럼. 지금은 그런 신경 쓸 겨를이 아니다. 난 당장 어머니한테 가야만 했다. 머리 속에는 새 하얗게 물들였다. 살아 계셔야 할 텐데 너무 겁이 난다.

 

"어머니, 안돼요. 돌아가시면 저는 혼자 남게 돼요. 같이 도망가야 해요."


혼잣말로 이렇게 많이 하는 건 처음이다.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나는 직접 걸어서 20분 만에 우리 집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안전히 계셨지만 상태가 많이 악화되셨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치유사부터 찾아야 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안고 가는 도중 내 인생 최악의 날이 다가왔었다. 아까 본 그 병사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안돼. 이렇게 당할 순 없어. 저리 꺼져 괴물들아."


나는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들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전투에 능숙한 것들은 나를 공격을 했고 어머니는 힘이 없어서 쓰려지셨다. 그리고 그 병사들은 평생 내게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인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저항도 제대로 못해보고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 병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순간 이를 눈치채고 네온이 병사들을 처리하였다.


"일어나요. 괜찮아요? 이런, 기절하고 말았네."


네온은 그때 나의 어머니가 그들에게 당한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이미 시신도 너무 훼손돼서 가루가 된 채 흩어졌다. 한편 나는 어느 외딴 곳에서 치유사가 나를 간병하고 있었다. 꿈속에선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전에 내가 꿈꿔온 것은 악몽이 아니었다. 짐작했다면 이미 선택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린 게르문드. 넌 외계 세력과 맞서기 위해 태어났다. 한번 정해진 운명을 맞서거라. 복수를 위해, 평화를 위해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강력한 힘을 보여줄 준비가 되었느냐?"

"...준비됐어요."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울분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곧 나의 밑거름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과 무능력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죽음과 복수가 무엇인지 톡톡히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어, 아가씨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몸만 상합니다. 가만히 계세요."

"지금 이럴 데가 아니에요. 그들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다고요!"

"그건 아는데 저희도 싸울 처지가 안됩니다. 일단 당신을 데리고 온 사람부터 만나보시는 게 좋겠군요. 그전에 먼저 상태가 좋은지 한번 확인 해보겠습니다."


나는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여기는 몰래 지어진 임시 대피소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재앙급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그나저나 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오직 그 사람 네온 밖에 없다. 일단 주변을 둘러보면서 상황을 직시 해야 한다. 부모마저 잃어버린 아이들도 여기 살아남기 위해서 젖 먹던 힘까지 발휘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태주고 도움을 주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대피소의 끝 자락에서 이 곳을 세운 촌장같이 보이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네온도 같이 거기에 있다.


"어르신, 여기는 안전하지 않아요. 좀 더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요."

"내 말 믿어봐. 그들은 여기에 오지 않을 게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다른 왕국에 침략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있을 게야."

"아직도 예언술 같은 미신을 믿으시는 건가요? 점성술은 들어봤어도 그런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글쎄 한번 믿어보라니까. 아 마침 너가 데려온 사람이 있네."

"알겠으니까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낡은 집터 수리 해야 하거든요."


답답해 하는 네온과 이를 안일하게 생각하는 어르신이 눈에 밟혔다. 그저 구경하다가 나중에 대화 끝나면 가려고 했었지만 이왕 들킨 김에 서로 대화 나누면서 공동체 생활에 적응을 해야겠지.


"안녕하세요. 린 게르문드입니다."

"반갑네 젊은이, 네온이 너를 도와줬나 보군. 물론 어머니에 관해서는 깊은 유감이다. 소개가 늦었구려. 나는 닐마라고 하네. 사람들은 보통 예언가라고 읽지만 그냥 닐마라고 불러주게. 난 이름 듣는 게 좋거든. 그런데 너의 몸에서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져 있구나."

"네? 제가요?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너한테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네. 이런 힘은 보통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야. 심지어 마법사랑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힘이야."

"말씀은 고맙지만 저 이제 그 사람한테 가봐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구나, 난 그럼 몸이 안 좋아서 이만."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눈 후 자리를 떴다. 그러고 보니 네온은 집터 수리 하러 갔다고 했지.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네온을 찾았다. 그리고 혼자서 짐을 지고 다니는 네온의 뒷모습을 봤다. 너무 힘들어 보여서 내가 들어주고 싶었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뒷짐 어서 주세요."

"린, 당신은 아직 아프신데 무리하지 마세요."

"저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리고 아까 전에 최선을 다해서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적어도 고맙단 인사는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친절하게 베푸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어요. 아무튼 고마워요."


네온의 친절함에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무척 아끼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은 얼굴이 빨개진 네온의 얼굴을 보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네온은 집터를 수리해주고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며 사이가 가까워졌다. 이제 사람들을 도와줬으니 나머지 다른 왕국에 이 소식을 전할 일만 남았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도움에 발목이 잡혀서 너무 늦어버렸다. 아무튼 깜박 잊은 건 아니다. 닐마에게 왕국의 소식과 상황을 알려주려 먼 곳을 떠나야 한다고 허락을 맡았다. 그리고 혼자서 여유롭지 않은 모험을 떠나기 전에 네온이 나를 찾아왔다.


"린, 저도 같이 가요. 혹시 만약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감당 하기 힘이 들 거에요."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싸움은 못하긴 하지만 어떻게 혼자서 해낼 거라는 기분이 들어서요."

"이 모험은 너무 위험해요. 혼자 다니지 말아요. 같은 동료로서 최선을 다해 지킬게요. 약속할게요."


임시 대피소의 사람들과 잠시 만남을 뒤로 한 채 앞으로의 일들이 모든 것을 바뀌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하게 된다. 네온과 함께 갑작스레 나타난 외계 세력의 힘을 굴복 시키고 평화를 되찾기 위해 충격적인 기억과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