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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늘한 칼날이 등 뒤를 파고 들었다. 


"어.....?"


 카일은 허리를 파고 든 기사 단장의 칼날에 어리둥절해 했다. 고통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먼저 찾아왔던 것이다. 

왜지. 왜. 이 사람의 칼이 나에게...... 고개를 쓰윽 돌려보니 성녀, 세나의 손에도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아아아아....."


 단말마 조차 지르지 못하고 세나는 자리에 쓰러졌다. 몸을 웅크리며, 꿰뚫린 배를 어루만지는 그녀. 피는 줄줄 흐르고, 

뒤에 칼을 내지른 기사의 신발을 적셨다. 


"......"


 아무 말 없이 칼을 쥐고 있는  기사 단장. 단장의 빛나는 투구 너머 회색의 눈동자가 깜빡거린다. 


"대체.....왜......?"


 카일은 기사 단장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투구 속 감춰진 회색의 눈동자만이 천천히 깜빡일 뿐.  주변

은 적막했으며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카일의 전신이 가늘게 경련한다. 어떻게든, 서서 버텨보려 애 쓰지만 가능할리 없다. 흘린 피가 고인 물처럼 주변을 잔뜩 메웠기 때문에.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쓰러지는  카일. 


 기사단장은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뒤에 박힌 칼을 스르륵, 빼냈다. 칼이 빠짐과 함께 완전히 바닥에 얼굴을 맞대며 쓰러지는 카일.  눈동자가 좌우로 미친듯이 흔들렸다.  


 저 멀리, 몸을 웅크리며 쓰러진 세나는 그런 카일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뻗은 손에선 부드러운 황금빛 힘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감싸안았다.  보드랍고 따듯한 그녀의 손길처럼, 카일을 감싸는 황금빛. 꿰뚫린 배쪽의 살이 천천히 아무는듯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히도 기사들은 이 모습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다. 


서걱.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어느정도 상처가 아물어진다 싶은 시점에 큰 소리가 났다. 무언가 하늘에 높히 뜨고, 다시 바닥으로 처박혀

구르는 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아아........"


 한참을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의 황금빛 머리 카락이, 쓰러진 카일의 손끝에 닿았다. 순백색의 천과 같은 그녀의 창백할정도로 밝

은 볼 살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천천히 깜빡이던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서서히 감겼다.  눈이 감기면서, 떨어지는 한방울의 눈물

자국이 맞닿은 그의 오른손을 적셨다.  


"너 이......개새...끼들이.....!"


 잔뜩 분노한 얼굴. 카일은 눈이며 목이며 핏대가 잔뜩 오른 얼굴로, 땅을 짚고 일어나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피가 잔뜩

빠진 굳은 몸이었지만 의지는 맹렬하고 전달된 신성력에 어느정도 상처가 아물어 자리에서 충분히 일어 나 싸울 기세였다. 


"......"


 황급히 칼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카일. 카일의 손에 들린 성검이 은색으로 빛났다. 기사 단장은 회색의 눈동자를 껌뻑거리며 일어나려는 그를 그대로 베어버린다.  좌에서 우로, 길게 늘어 선 절상. 피가 터져나오고 반쯤 일으킨 카일의 몸은 뒤로 그대로

넘어간다. 


 털썩, 뒤로 넘어간 카일의 위에는 횡한 하늘이 보였다. 곧 비라도 내릴 듯한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 서서히 의식은 소실되어갔다. 천천히 잃어가는 의식과 흐린 하늘의 전경 속으로 기사 단장이 걸어와 투구를 벗었다. 


".....수고 했네."


 투구를 벗은 얼굴로 그를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기사단장은 그렇게 말했다. 수고 했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카일은 기사단장의 저의를 알지 못했다.  금은보화를 탐하는 자의 추악한 몰골도, 명예를 그리는 자의

오만 불손한 표정도 아닌 그저 할 일을 끝마친 자의 그 담담한 모습 때문에.  


 대체 무엇일까, 대저 무엇 때문인 것일까? 임무를 완수하고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 갈 생각에 기뻐하고 있었는데.....


 툭툭, 볼살을 건들이며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튀는 빗방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곧 이어 천둥소리가 지상을 찢

었다.  카일의 느릿하게 떠지던 눈이 완전히 감기자, 기사단장은 바닥에 떨궈 둔 투구를 다시금 뒤집어 썻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빗방울은 금방 흙바닥을 적셨고, 적혀진 흙바닥은 금방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기사

무리들의 군화발 소리가 한참 들렸고, 곧 이어 그들이 사라지자 주변에는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2-


"......"


 의식이 소실됨과 함께 한참 들리던 번개소리가 먿었다. 그와 함께, 카일의 잃었던 정신이 천천히 그의 몸으로 다시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반역......성자.....후레자식......임금.......전설......거짓......."


먼저 느껴진 것은 퀴퀴한 냄새였다. 낡은 먼지가 잔뜩 쌓인듯이 코를 찌르는 흙내음. 코 끝을 간지렸다. 


"절명......저주의 고리......계약......문...... 어둠.......마경......"


눈꺼풀이 무거워, 차마 다 밀어 올리진 못했으나 무언가 희뿌옇게 눈 앞에 뒤 돌아있는 사람의 형태가 일렁였다.  


 "신전.....성황......인간.......신화......최후... 단말마...."


"그리고 저주."


귓속을 파고드는 말 소리. 가래가 잔뜩 끓은듯한 걸걸한 목소리. 대륙의 표준어로 들리는 기괴한 단어들


"으으......."


 눈꺼풀을 완전히 위로 밀어 붙이고,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혼자말을 읊던 사람의 형태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 드디어 일어난 것인가! "


 섬짓한 빨간색의 눈동자. 수염이 덮수룩하게 나고 몸이 기이하게 꺾인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과는 달리 

말투는 꽤나 가볍고 경박하게 느껴졌다. 


"몸은 좀.....괜찮은가? 상처가 꽤, 심했는데 말이야....."


 "........"


 그러고보니 상처.  손을 움직여, 뚫려 있어야 할 뱃거죽과 가슴팍을 더듬어본다. 뻗은 손에선  흉터만이 만져질 뿐, 뚫려 있어야 할 자리와 갈라져 있어야 할 상처는 모두 온전히 붙어 있었다.


"고치는데, 꽤나 애 먹었네. 상처가 워낙에, 심해서. 몸 속을 맴돌던 신성력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아마도 죽었을게야."


마지막으로 건내받은 신성력. 잠시 상처가 아물었긴 했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황금빛 물결. 마치.....마치......


".......!"


 잊었었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녹색의 눈동자와 황금빛 머리칼과 보드랍게 만져지는 창백한 피부의 얼굴. 

이렇게, 누워서 쉴 시간이 없다. 어서 빨리 일어나서 그 개새끼들을 끝내야 해. 


 핏대를 잔뜩 세운 분노한 얼굴로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미쳐 다 아물지 못한 몸 때문에 일어나려던 그의 

몸뚱이는 기세 등등하던 모습과는 달리 금방 힘을 잃고 다시금 바닥에 고꾸라졌다.


"저런 저런.  손 뻗었던 그 여자가,  그 신성력의 주인이었나 보구만? 이해 하네. 괜찮아, 괜찮아......"


 바닥에 고꾸라진 그를 안으며 남자는 그를 보듬었다. 어깨를 툭툭치며. 핏발이 선 새빨간 눈과는 대조적인 흐뭇한 웃음을

지으면서. 카일은 그런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뭐 하는 사람인 것이지?


 진득에 들었어야 할 질문이었으나,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제대로 생각 해보지 못했다. 분명히, 자신은 그 길 어귀에서 칼을 맞고 쓰러졌고, 꿰뚫린 복부에 의해 의식이 소실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는데. 이 남자는 대체 누구고, 이곳은 어딘 것일까? 인세와

마계의 중간지점인 이 마경에 살고있는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 것일까.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여기는......."


"참, 빨리도 묻는구만. 큭큭큭......"


"일단 무리한 몸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시금 잠에서 깨어 날떄 쯔음, 하는게 옳은것 같네. 생각보다 빨리 일어난 것이라." 


그와 함께, 뒤 돌아 선 후 탁차 위에 얹어져 있던 형광색 가루를 들어 카일의 콧잔등에 들이댄다. 


"자, 좀 자도록 하게나. 깨고 나면 해야 할 이야기가, 꽤 길테니까."


 콧잔등에 들이댄 가루에서는 묘한  향기가 났다. 생기 발랄한 풀 향기라 해야 할 지, 시큼한 초산의 냄새라 해야 

할 지 모르는 그것. 


"......"


 향기를 맡고 나자 세상이 느릿느릿 움직였고 움직임에 잔영이 생겨났다.  눈꺼풀은 무거워졌고, 몸은 나른해졌다. 

천천히 눈이 감기며 스르륵, 잠이 몰려왔다.  


 꺼져가는 눈동자, 카일은 시선을 돌리다가 남자의 탁상 위에서 익숙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쌍 독수리의 문장.  녹이 다 슬어,

남자의 눈 만큼이나 시벌건 녹이 보이는 방패에 그려진 것은 왕가의 쌍 독수리 문장이었다.


저 문장은.....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카일은 그대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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썻다 지웠다 썻다 지웠다를 너무 오래 해서 그냥 조금 내가 보기 좆같더라도 생각 나는대로 몇 편이라도 써 보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