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패의 전설 모음집(계속 업데이트) - 창작문학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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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황무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아인은 어딘가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레드암스에게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했다. 아인은 어질어질 한 정신을 부여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자신과 마누엘이 함께 묶여 있었으며 바로 옆의 수레에 마리와 잔이 묶여 있었다. 순간 잔과 눈이 마주치자 아인은 잔이 마법으로 묶인 밧줄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그녀를 다시 보니 그녀는 재갈로 입이 막혔을뿐더러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묶여 있었다.


“탈출할라믄 포기하는기 좋다.”


어디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인은 수레 중앙 기둥에 묶인 상태에서 용을 써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온통 오크밖에 없어 자기들의 말을 할 수 있는 쪽은 아인을 제외하면 말을 못하거나 잠들어 있었다.


“내다. 니가 탄 수레 몰고 있는 놈.”


아인은 고개를 들었다. 수레를 끌고 있는 다이어울프 위에 오크 한 명이 올라타 있었다. 그는 그 위에서 고개를 돌려 아인을 바라보았다. 일단 인간 말을 할 줄 아는 오크임에 분명한 그는 다른 오크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깊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으나 부리부리한 눈매와 크게 튀어나온 아랫 송곳니는 그가 오크임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검은 늪이다. 우리 오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이틀 하고 8시간.”


“우리는 어떻게 되지?”


“노전사님의 결정에 따를 기다.”


“노전사?”


“가보면 안다. 부족장 님은 너거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겄다 하는데 노전사님도 그렇게 생각 할지는 내도 모른다.”


아인은 가만히 기둥에 묶인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더 물어볼 것도 없었으니까. 일단 자신들은 포로가 되어 오크들의 땅으로 잡혀 왔고 검은 늪에 있는 노전사라는 자에게 자기들의 목숨이 걸린 것이다.


“내는 샌디 라이언이라고 카는데, 니는 이름이 뭐꼬?”


“알아서 뭐하게?”


“니가 싸우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에 니가 죽는다 해도 다들 니 이름은 기억할기다.”


“…아인 발터.”


“글나, 그게 니 이름이가.”


“너는 어떻게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거지? 그것도 남부 지역 말투로.”


“내는 원래 인간의 노예였다. 어렸을 때 인간에게 잡혀서 노예로 키워졌제. 근데 20년쯤 전에 레드암스 님이 나타난 기다. 그분이 내를 풀어주고 갈 곳도 없던 내를 이렇게 써준 기다. 인간 말은 노예 할 때 배았다.”


아인은 과거 그를 노예로 부린 사람이 남부 지방 출신인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 왔다. 저가 검은 늪이다.”


아인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늪지대를 중심으로 책에서만 보았던 오크들의 집들이 즐비해 있었다. 레드암스의 군대가 돌아오자 마을의 주민들이 몰려나와 환호하기 시작했다. 무어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환호하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온 오크들에 환호하던 주민들이 이내 아인 일행을 보더니 서로 수근거렸다. 군중들 사이로 어린 오크들도 상당히 많았으니 아마 인간과 엘프, 드워프를 생전 처음 본 이들도 있으리라. 그때, 샌디가 조용히 말했다.


“만약에 상황이 나빠지면은 레드암스 님한테 결투를 신청해봐라. 분명히 들어줄기다.”


곧이어 아인일행은 마을의 광장 한가운데에 꽁꽁 묶인 채로 던져졌다. 그들의 주위로 오크들이 몰려와 둘러쌌다. 광장의 앞에는 왕좌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는 레드암스가 앉아있었고 그 옆에 흰 머리의 늙은 오크와 샌디가 있었다. 오크들이 환호와 야유를 퍼부을 때, 레드암스가 팔을 들자 그들은 일순간 조용 해 졌다.


“So, do you know why we have brought you on?”


그러더니 레드암스는 샌디를 팔꿈치로 툭 쳤다.


“Translate.”


“아… 음… 니들을 우리가 왜 데려왔는지 알겄나?”


“왜 데려왔지?”


아인이 모두를 대신해 물었다. 샌디가 자신들의 말로 번역해 레드암스에게 전했다.


“I liked you guys. Exactly, your skills”


“내는 니들의 실력이 마음에 들었다.”


“I want your alive. But, to decide is him”


“내는 니들이 살기를 바라지만 결정하는 것은 그분이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It’s me.”


그 말과 함께 레드암스의 옆에 있던 늙은 오크가 나타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장막의 어둠에 가려져 있어 그가 노인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지만 이제 보니 왜 그가 오크들에게 노전사라 불리며 추앙받는지 알 법도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근육질은 물론이고 그 근육들 위에 서린 수많은 흉터가 그거 얼마나 많은 전장에서 살아 남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레드암스와 귓속말을 나누더니 조용히 물러났다.


“Decided! You are the death penalty!”


“너… 너거들은 사형이다…!”


레드암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짓을 했고, 샌디는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주변의 병사들이 달려나와 아인 일행을 붙잡고 끌고가기 시작했다. 그때, 아인은 방금 전 샌디가 한 말을 기억했다.


“만약에 상황이 나빠지면은 레드암스 님한테 결투를 신청해봐라. 분명히 들어줄기다.”


“레드암스님! 저희의 목숨을 걸고 결투를 요청합니다!”


샌디는 그 소리에 슬쩍 미소를 짓더니 레드암스에게 아인의 말을 전했다. 레드암스도 따라 미소를 짓더니 손짓으로 경비병을 멈추었다.


“All right! But it’s not me fighting you.”


“알겄다. 하지만 너와 싸우는 건 내가 아니다.”


“Liglet!”


레드암스가 리그렛이라는 자를 부르자 군중 들 사이에서 다른 오크들 보다도 거대한 몸집의 오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아인은 그 오크를 알고 있었다. 그때, 아인과 마누엘을 압도했던 그 오크였다.


“He will fight you.”


“리그렛… 리그렛 잭슨이 내를 대신하여 니랑 싸울기다.”


아인은 샌디의 말이 떨리는 것으로 그가 굉장히 강한 전사임을 눈치챘다.


“Get him a sword and shield.”


레드암스의 말에 다른 오크가 아인에게 아인이 가지고 있던 검과 방패를 넘겨주었다. 아인이 그것을 넘겨 받자 다른 오크들이 잔 일행을 관중들 앞으로 옮긴 다음 아인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If you attack another Orc, all of soldier shot arrow for you.”


“만약에 니가 다른 오크를 공격하면, 모든 오크가 니에게 활을 쏠기다.”


“And fight!”


“시작하라!”


그 말과 동시에 오크와 인간은 무기를 고쳐 쥐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앞에 서있는 리그렛이라는 오크는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덩치도 다른 오크의 두 배, 아인의 세 배에서 네 배는 되어 보였고 들고 있는 양손검은 아인의 키보다도 길었다. 잠깐의 대치상태가 이어지다 리그렛이 아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덩치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속도로 움직이는 몸놀림에 아인은 가까스로 칼을 피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땅을 박차고 달려가 리그렛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그는 쉽게 회피해 버리고 동시에 칼로 아인을 반으로 갈라버릴 듯이 내려찍었다. 

아인은 본능적으로 방패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공격을 막으려 들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아인의 몸이 아래로 휘청거렸다. 그야말로 엄청난 힘이 아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인은 그 힘을 감당하기 위해 이를 강하게 악물었다가 자신의 이가 조금 깨진 것도 모를 정도로 저 거대한 힘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다음 아인은 바깥쪽으로 기울여 칼이 미끄러지게 한 후 강하게 방패를 올려 칼을 튕겨냈다. 리그렛의 공격을 튕겨낸 이가 없었는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크들이 환호했다. 그러고는 칼을 휘둘러 리그렛의 팔을 잘라내려 하는 순간, 왼손의 방패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옴과 동시에 아인은 오른쪽으로 몇 미터가량 튕겨나가 버렸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착지한 아인은 리그렛이 자신의 칼이 튕겨 나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역공을 가했음을 알았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아인은 다시 리그렛을 향해 돌격했다. 깨나 긴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하늘이 석양빛에 붉게 물들 무렵, 먼지 투성이가 된 둘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은 그 동안 수백 합을 나누며 서로의 무기에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 치열한 싸움에 주변의 오크들은 활로 겨누는 것조차 멈추고 둘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때, 둘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번 공격으로 끝날 것임을. 마침내 리그렛이 마지막 힘을 짜내 돌격했다. 지켜보던 오크들과 잔 일행은 아인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기 위해 자연스레 아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인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잔이 소리쳤다.


“뭐해 아인! 뭐라도 하란 말이야!”


오크들도 자신들의 말로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아인은 그들의 환호와 야유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수백 합을 맛붙었음에도 몸은 마치 8시간은 자고 일어난 듯이 가볍고 호흡도 전혀 가쁘지 않았다. 마음도 무언가를 각오한 듯 떨림 없이 굳세었다. 그리고 아인은 다시 눈을 떴다. 리그렛은 이미 엎어지면 코 닿을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와라.”


리그렛이 아인의 목이 있는 위치에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순간, 아인의 검이 리그렛의 대검의 날을 타고 빠르게 미끄러 졌다. 아인은 순식간에 칼을 피하고는 그대로 주저 앉으면서 달려온 반동으로 미끄러졌다. 그와 동시에 리그렛의 왼쪽 무릎이 굽혀졌다. 아인의 검이 그의 허벅지를 배어버린 것이다. 그가 무릎을 꿇고 쓰러지자 아인은 목에 칼을 겨누었다. 한순간 광장 전체가 모기 한 마리 날갯짓도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마침내, 레드암스가 오른쪽 손을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뻗더니 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쳤다. 그러자 다른 오크들도 그를 따라 그 동작을 하더니 이내 모두가 환호했다. 아인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온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구속이 풀린 잔 일행이 달려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인을 꽉 껴안았다. 샌디는 아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인이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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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쌘 주인공과 동남방언을 쓰는 오크라는 환장의 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