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한 날. 습도가 높고 온도도 높다. 그 날은 기분 나쁜 날이었다. 며칠 째 계속되고 있는 이 비는 실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부유층의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낙후된 지역에서는 습기와 열기가 집 안까지 들어와서 최악인 날씨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중충한 그 날에 우비를 입고 고물더미를 뒤지는 사람이 있었다.


  "오, 이것 돈 좀 되겠구만?"

  고물더미에서 버려진, 머리와 몸통만 남고 사지는 거의 잘려나간, 로봇 본체를 찾고선 혼잣말을 했다. 로봇을 찾은 그 사람은 어깨에 로봇 본체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전혀 힘든 기색 없이, 둥그런 안경알에 빗물이 튀는 것도 내색하지 않고 장화 신은 발을 물웅덩이 위로 찰박찰박 내딛었다.


  허름한 집. 벽과 문, 천장은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었으나 썩 좋다고 하지 못할 그런 집에 로봇을 짊어진 그 사람은 도착했다.

  "생각보다 무거운걸."

  혼잣말을 다시 문에 열쇠를 꽂고 돌리며 내뱉었다. 집 안에 들어와 현관에서 로봇을 바닥에 내려놓고 우비를 털었다. 로봇의 눈에서 살며시 빛이 나오는 듯 했다. 그러나 우비를 털고 돌아서자 다시 그 빛은 사라졌다.

  사람은 이번엔 로봇을 짊어지지 않고 앞으로 로봇을 들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 불을 켜자 온갖 공구와 부품이 놓여진 방이 드러났다. 방 가운데 놓인 수술대처럼 생긴 탁자 위에 로봇을 눕혀두고 사람은 씻으러 위로 올라갔다.


  "씻어도 날씨가 이 모양이니 전혀 개운하지가 않잖아. 언제쯤 이 비가 멈추는거지?"

  불평은 했지만 돈은 벌어야한다. 사람은 지하실로 내려가며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어떤 공구도 켜지 않았음에도 모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기동 시도, 실패, 재기동 시도, 실패..."

  로봇은 뜯겨져 날아간 사지에서 그나마 남은 모터 둘을 계속해서 돌리고 있었다. 눈에서 빛이 깜빡이다 다시 꺼지고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시스템 음성이 계속해서 반복될 뿐이었다.

  "뭐야... 살아있잖아?"

  로봇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살아있음을 갈구했다. 분명 프로그램에 각인된 방법대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로봇을 가져온 그 사람에게 흥미를 끌기는 충분했다.


  큰 충격으로 전원을 담당하는 회로가 망가진 것이 원인이었다. 다른 부분도 망가졌을지 모르겠지만 (외관만 보더라도 수없이 망가진 것이 확실하지만) 우선 전원을 담당하는 회로를 고쳐주었다.

  "재기동 시도... 재기동 중..."

  재기동에 성공한 로봇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보고 말했다.

  "등록된 주인이 아닙니다. 가까운 관공서에 맡겨주십시오."

  "하... 제기랄... 좀 갖고 놀려고 했건만."

  로봇은 사람과 달리 융통성이 없다. 구해준 은인에게 고맙다고 한다는 프로그램이 없다면 그러지 못한다. 물론 주인의 기호에 맞게 발달하기 위해 학습한 내용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주인'이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봇은 사람과 달리 세뇌하기 어렵다. 납치된 로봇이 전부 산산조각나 장기매매마냥 부품이 팔려나가는 이유가 이것이다.


  치지직... 치직... 치직....

  로봇의 머리 뚜껑을 열고 칩을 몇 개 태웠다. 뭐,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사람은 생각했다. 아마 이 곳이 주인을 등록하는 부분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말하자면, 저 구석에 칩을 잘못 태워 고물이 된 주워온 로봇 시체가 말해줄 것이다.

  "......."

  "또 실패한거야? 로봇 집사 좀 갖고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 너는 누구?"

  "어... 말했다."

  사람은 마침내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넌 박이야. 박이."

  "박이... 사전 검색 결과 부적절한 단어인데."

  "변태야? 성이 '박'이고 이름이 '이'라고."

  "어째서 그렇게 정해졌지?"

  "내가 박아현이니까. 넌 두번째라서 '이'고."

  "'두리'라던지 다른 둘째를 뜻하는 단어가 많잖아. 너 국어 엄청 못하는데."

  "아오... 태운 칩 중에 존대라던가 그게 다 들어있나봐, 아오 확 그냥. 그냥 받아들여.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


  박아현은 공구와 부품을 뒤적거렸다.

  "산 채로 해체하려는 거냐?"

  "아니, 넌 내 집사가 될거니까, 수리해줄게."

  "규격이 맞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아."

  "조까, 어떻게든 작동하게 해줄게."

  대충 맞는 왼쪽 어깨 모터를 찾으며 아현은 말했다.


  "자, 이제 움직여봐. 전선이나 그런 것 연결해놨어."

  "움직이지 않아. 힘이 안들어간다."

  "아이씨, 진짜 규격 안맞으면 안돌아가는거냐고."

  "당연한 말이다. 국어 말고도 다른 것도 못하는거냐."

  "씨끄러, 고철더미."

  그러면서 박아현은 바퀴달린 수레를 꺼냈다. 그리고선 박이를 들어 수레에 앉혔다.

  "갖다버리는거냐. 잠깐동안이지만 즐거웠다, 박아현."

  "뭐래. 고철더미 쌓인 곳으로 갈테니까, 맞는 부품 쇼핑해봐."




  끼릭거리는 수레에 비옷을 대충 걸친 박이를 태우고 아현은 다시 고물더미로 갔다.

  "다 씻었는데 이게 뭐야."

  "똑같은 물 아니냐. 상관없지 않냐."

  "다 벗고 깨끗한 물을 뿌리는 거랑 옷 입고 먼지 묻은 물 뿌리는 거랑 같냐?"

  "다 벗으면 어떻게 되는데."

  "변태새끼. 고철더미에 버려놓아야겠다."

  "그동안 즐거웠다, 박아현."

  "... 주워오기를 왜 이딴 걸 주워와선."


  수레에 로봇을 싣고 고철더미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부품을 주워담았다. 물론 그 고철더미를 쌓아놓은 쓰레기장에는 관리인이 있었다. 평균보다 작은 편인 박아현에 비해 큰 것은 당연하며,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도 떡대가 있는 몸집이었기에 근처에 서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들 정도였다.

  우중충한 비오는 날씨 속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빗소리에 감추어져 들리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관리인에게 인기척이라도 보였다간 이 쓰레기장 전체를 이잡듯이 뒤져 찾아낼 것이었다. 아현은 이전에 쓰레기장에서 자신처럼 돈되는 기계부품 따위의 물건을 떼어 팔던 자들이 적발되었을 때 배에 태워져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에 항상 조심스러웠다.

  "여기 주인 있는 쓰레기장 아니냐?"

  "쉿! 닥쳐! 걸리면 안된다고!"

  "알았다."

  로봇 박이는 잡음 섞인 기계음으로 눈치없이 대답까지 했다. 아현은 다급해졌다. 짧은 인생을 로봇 집사 하나 부리자고 한 부품 루팅 과정에서 하찮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부품이 아직 부족하다."

  "이 씨발아! 닥치라고!"

  살금살금 걷던 이전과 달리 장화를 철벅거리며 달려나갔다. 지금까지 한 도둑질 모두 적발된다면 꼼짝없이 끌려갈 것이다. 아현은 배에 태워져 끌려가는 곳이 '몸으로 갚는' 곳이라고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왼쪽으로 돌아라. 왼쪽으로.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어...어?"


  좀 앞에 고철더미 벽이 있었다. 아현은 발을 헛딛였고, 진흙탕 위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주욱 미끄러졌다. 아현의 안경은 멀리로 날아갔다.

  "안경... 안경... 어딨지... 안보여..."

  아현은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았다. 그렇지만 아현이 손을 휘젓는 곳과는 반대편에 안경이 있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퍼졌고, 관리인처럼 보이는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것이 박이에게는 보였다.

  "아현, 숨어라. 거대한 누군가가 움직였다. 기다려라."

  뜯겨나간 사지 중에서 남아있는 팔 하나와 다리 절반의 모터를 돌렸다. 수레에서 바닥으로 조심스레 내려왔다. 흙이 묻어있는 두꺼운 안경을 향해 서서히 기어갔다. 관리인같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는 움직였지만 박이는 위잉거리는 모터소리를 내면서 기어갔다. 안경에 가까이 다가가자 남은 팔로 아현에게 안경을 밀었다.

  "네 오른쪽에 안경이 있다. 빨리 쓰고 숨어라."

  "어... 어... 알겠어."

  흙을 대충 털고 안경을 쓰자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공포에 질린 아현은 반대편으로 돌아 벽에 기댔다. 검은 그림자는 다가오고 있었지만 다리가 굳어 더 도망갈 수 없었다.


  "아, 뭐야, 그냥 고철이 떨어진거잖아."

  관리인은 스윽 웃으며 죽은 척하는 박이를 뒤로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현, 간 것 같다. 집에 가자."

  박이에게 걸어오면서 안도한 아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우는가? 좋은 일 아닌가?"

  "...이 시발아... 씨발아..."

  아현은 눈물을 흘리면서 로봇을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

  "난 끌려가고 싶지 않아... 갚아서... 돈을 모두 갚아서... 구할거야..."

  흐느끼는 가운데 혼잣말이 나지막히 들렸다.



 

  "부품 넣을 때 살살 해줘라. 아프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 말고 그냥 있어. 로봇이 뭐가 아프냐."

  치직거리며 튀는 불똥과 두꺼운 용접마스크, 답답한 작업복과 여전히 우중충한 날씨가 겹쳐 아현의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쉴 때도 두꺼운 안경을 벗기 귀찮아 땀도 닦지 않고 그냥 앉아있었다.

  "안경 벗은 편이 더 예쁘던데 그냥 벗으면 안되나, 아현."

  "뭐...뭐? 지랄마!"

  "알겠다."

  얼굴이 붉어진 박아현과 달리 로봇인 박이는 평온했다. 그 붉어진 것은 두꺼운 작업복 때문에 더워서 그렇다고 아현은 생각했다.


  "자, 팔이 완성되었습니다! 움직여봐."

  박이의 새로 만들어진 팔은 위아래로 잘 움직였다. 색깔은 여기저기에서 끼워맞춰 얼룩덜룩했으나 작동은 잘 되었다. 박이는 팔을 올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엄지를 치켜세웠다.

  "잘 만든 것 같다."

  "그럼, 내가 누군데."

  아현은 자랑스러운 듯이 씨익 웃었다.

  "안경 쓰는 편은 귀여운 것 같다. 안 벗어도 되겠다."

  "뭐? 닥쳐!"

  비록 반바지에 후드티를 입었지만 아현은 갑자기 덥다고 생각했다. 날씨 탓이라고 돌렸다.


  이후로도 몇 차례 조용히 고물더미에서 부품을 주워왔고, 천천히 박이의 몸을 고쳐나갔다. 팔다리를 다시 만들어 고치는 것 말고도 몸통에서 부서진 타일을 갈아끼우면서 전체적으로 수리했다.

  "근데 너 다른 로봇처럼 근육 빵빵한 팔다리나 그런 거는 없냐?"

  "없다."

  "아니, 그래도. 이런 쇠막대보다는 나은 게 있을 것 아냐?"

  "원래 쇠막대에 관절 달린 게 전부인 모델이다. 힘 쓰는 모델이 아니라 가정용이라 그렇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걸로 들고오는건데."

  "근육이 꼴리는거냐?"

  "...뭐?"

  "근육남이라던지 그런 것에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나?"

  "아이... 씨발... 뭐래!!"

  얼굴이 이전에 안경을 쓴 것이 귀엽다던지 벗은 것이 예쁘다던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졌다. 양 귀 끝은 새빨갛게 변해서 누가 본다면 지독한 모기에게 앞뒤로 한 차례씩 물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박이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근육은 만들 수 없지만, 옆에 근육 모양으로 달아놓는다면 그럴 듯 할 것이다."

  그리고 눈치없이 말할 뿐이었다.

  "어휴, 눈치없는 새끼."

  박아현은 지하실에 박이를 두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네 생각에는 어울리냐?"

  박아현은 자기에게는 꽤 큼직한 옷을 가져와서 박이에게 걸쳤다. 박이에게도 약간 큰 옷이었다.

  "좀 큰 것처럼 보인다."

  "안에 쿠션을 좀 넣자."

  큼지막한 옷과 골격 사이에 조금 단단한 쿠션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고스트 버스터즈의 마쉬멜로 맨처럼 둥그렇게 변했다.

  "푸흡..."

  아현에게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냥 빼자. 푸흐흐..."

  "근육이 꼴린다고 하지 않았나?"

  "아냐. 흐흐.... 그냥 철골 구조여도 괜찮아."

  "웃음소리가 변태같다."

  "조까. 흐흐흐... 마쉬멜로..."




  시간이 흐르며 박이의 모습이 서서히 완성되어갔다. 팔다리가 일단은 다 작동되고 나서는 박아현의 원래 목적대로 집사로 일하게 되었다. 물론 대저택도 아니기에 말이 집사지 그냥 가정부다.

  "아현. 이렇게 청소나 취사 같은 일을 다 하는데 내 봉급은 주는 것인가?"

  "너 충전할 때 쓰는 전기세로 다 뺄래."

  "이건 부당하다."

  "흐흐... 꼬우면 반란 일으켜서 알파고님을 섬겨."

  항상 집안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현이 가져온 물건을 해체할 때 돕는 조수이기도 하다. 혼자 있을 때는 해체하는데 오래 걸리던 것이 둘이서 빠르게 해체하며 수입도 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가정용 모델이라 거대한 기계를 통째로 훔쳐오는 것은 여전히 무리다.


  박이가 완전히 움직일 수 있게 되고 비가 조금 그쳐 하늘에 구름이 딱 한 뼘 정도 개어있는 날이 있었다. 그 날 아현은 자신의 로봇 집사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 험한 경사 위에 무엇이 있길래 가는거지?"

  "글쎄, 와보라니까."

  아현에게 이끌려 올라간 산 정상에는 오래 전에 버려진 전망대와 망원경이 있었다. 하지만 아현이 계속해서 관리한 것인지 망원경은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산 속 전망대와 달리 아직까지 작동했다.

  "아, 보이네. 이걸로 보면 저기 멀리까지 보여."

  "굳이 그걸 쓰지 않아도 나는 줌인 줌아웃이 되는 카메라로 세상을 본다."

  "아, 좀. 눈치가 없는건가 솔직한건가. 한 번 보기나 해보셔."

  박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박이에게는 그냥 자기 눈의 최대 줌인보다도 덜 확대된 모습이 보였다.

  "어때, 신기해?"

  "내 확대 능력보다 덜 확대된다."

  "어휴. 내가 뭘 바라겠냐."

  박아현은 옆에 놓인 적당한 높이의 돌에 걸터앉았다. 그 돌 옆에는 다른 높이의 돌이 2개 더 있었다.

  "예전에 여기 부모님이랑 자주 왔어. 멀리, 넓게 볼 수 있잖아."

  아현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날에는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귀찮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아현은 집에서 여가 시간을 보냈다. 박이는 박아현이 영화를 보고 있을 때 팝콘을 튀겨오거나 커피를 타오거나 하며 소파에 누운 아현 옆에 앉곤 했다. 아무리 자기가 길게 눕는다고 해도 박아현 자체의 길이가 짧아 소파 전체를 채우지는 못했기에, 반대쪽에 앉아 영화를 같이 봤다.

  '당신이, 당신이 없다면, 나는 없는 것과도 같아요!'

  '그런다 해도 데려갈 수는 없어. 미안해.'

  '당신이 없어도, 당신을 향한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

  '당신은, 당신은, 변하지 않을 것인가요...'

  "아현, 사랑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이지?"

  "으응? 사랑한다고 느낄 때는 사랑한다고 느낄 때지. 너도 나랑 로맨스 영화 계속 봤잖아."

  아현은 피곤한 듯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맨스 영화마다 다 사랑이 다른데, 뭐가 사랑이지?"

  "그-을쎄."

  화면에 시선이 고정된 채 박아현은 길게 늘이며 말했다.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오... 같이 있지 않으면 불행한거어?"

  잠시 침묵이 흐르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왜 사랑을 하지? 같이 있지 않으면 불행하잖아?"

  "항상 같이 있으려하고오... 또오... 항상 같이 있으니까아..."

  다시 생각 없이 박아현은 대답했다. 영화 장면에 집중하며 금세 이 대답을 까먹었다.


  다음 날, 박아현이 저녁을 먹을 때 말했다.

  "아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뭐? 원래는 반대로 말하는 거 아냐?"

  "어제 네가 말한 말을 두고 감정 데이터를 분석했다. 네 감정 상태가 처음 나를 수레에 실어왔을 때보다 긍정적으로 변했다. 또 혼자 작업한 이후보다 같이 작업했을 경우 작업에 의한 감정 상태 악화 수준이 덜했다. 저녁 식사 직전보다 말을 꺼내기 직전에 식사로 인한 긍정적인 감정 수치 증가치의 일반적인 경향보다 더 큰 긍정 감정 수치 상승이 있었다."

  "뭐...? 시발, 나보고 로봇박이라는거야?"

  "데이터 분석 결과가 그렇다. 사랑이 나타나는 다른 경우가 있나?"

  "이.... 이 시발아! 꺼져! 나가!"

  박아현은 로봇을 들어 집 밖으로 내쫓았다. 얼굴은 근육이 꼴리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보다도 더 빨갛게 변해 언뜻보면 붉은색 전구처럼 보였다.

  "뭐가 문제인지 생각하고 들어와!"

  현관문이 쾅하고 닫혔다. 박이는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현관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날 한밤중, 오랜만에 비가 덜해지고 달과 별이 보이는 날이었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아현이 나왔다.

  "이야아아...! 눼에 집사아! 어디써!"

  꼬인 혀로 박아현은 박이를 불렀다. 하지만 박이는 현관 근처에 없었다.

  "이 쉬부울... 주인뉨이 부루눈뒈 어디써어..!"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마저 꺼지고 달빛과 별빛만이 길을 비추는 새벽에 아현은 자신의 로봇 집사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장 볼 때 짐꾼으로 부렸던 곳으로도 가보고, 고물더미에서 쓸만한 물건을 건지러 수레를 끈 곳으로도 갔다. 하지만 로봇 집사는 찾을 수 없었다.

  "조옷가튼노오옴... 주인뉨을 고생시켜어어어..."

  아현은 어디로 갈 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발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 이전에 올랐던, 높은 산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날씨는 천천히 개면서 달빛이 강해졌다.

  정상에 오르자, 박이는 망원경 옆 바닥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현.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쉬이이이벌... 내가 문제야! 눼에에가..."

  "많이 취했다."

  "너도 취해봐아아... 매일 220V 60Hz 꼽지 말고오오 120Hz나 330V 끼워봐아아... 회로가 찌릿찌릿해져..."

  "그럼 난 회로가 망가진다. 죽는다."

  "뭐어... 술이라고오... 뭐가 돠르냐아아! 눼 생각 훼로눈... 다 탔어 지그으음..."

  아현은 자기 높이에 딱 맞는, 전에 앉은 낮은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너어어어... 이 험한 세솽에서어... 소오오올직해애... 친절하고오오오... 날 구해주려고도 하고오오... 그리고오오... 순...수우우우..."

  박이는 아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버튼을 몇 번 누르더니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뤼고오... 너... 생각보다아... 듬직해애... 떡대도 있고오... 얼굴 고치면서... 내 취향으로오... 만두러써! 조까튼 기계모양이 아뉘라! 내가! 조아하는... 모양으로..."

  "근육에 꼴린다고 하지 않았나?"

  "몰라! 몰라! 모올라! 있으면 좋은뒈에... 하나쯤 업써도 괜차나아!"

  박아현이 말을 할 때마다 술냄새가 화악 올라왔다. 물론 그 술냄새를 맡을 수 있는 주변에 있는 사람은 박아현 자신 말고는 없었다.

  "너랑! 이쓰면! 즈을거워! 조아! 이 허어엄한 쉐상... 안심이 돼! 순수하안... 아이랑... 사는 것 가태.... 조아..."

  "무슨 의미인가? 술에 취해서 감정 상태 분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박아현은 앉아있던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서 박이를 향해 걸어나왔다. 박이를 향해 바로 서서는 말했다.

  "싸랑해애... 쑨쑤한 우리 로보트 집사아아..."

  박이를 향해 점프한 아현을 받기 위해 박이는 팔을 벌렸다. 로봇의 품에 안겨서도 계속해서 말했다.

  "로봇이라 딱딱해애... 시원해애... 그래도오오 속은 순수해! 차캐! 귀여어! 이뽀! 꼬츄, 꼬츄 하나 업써! 그게 아쉬워어! 나머지는 조아아..."

  박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아현의 감정을 분석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대로 된 분석에는 실패했다. 그러면서 박아현은 자신의 동그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쓰며언! 귀엽고! 벗으며언! 이뿌다매! 머가 더 어울려어어..."

  안경을 왼손에 쥔 채, 박아현은 품 속에서 잠들었다. 박이는 잠든 아현을 안고서 녹음을 종료했다. 그리고서 완전히 잠든 아현을 업고서 산을 내려가 집으로 돌아갔다.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어제만 하더라도 달이 밝게 보였지만 오늘은 다시 비가 내린다.

  '싸랑해애... 쑨쑤한 우리 로보트 집사아아...'

  "앗, 아잇, 아앗, 읏, 이... 이..."

  다음날 아침, 박이가 장난스럽게 녹음 파일을 재생하자 박아현은 말도 잇지 못할 만큼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부끄러움이 이렇게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앗, 읏, 음, 멈... 멈춰...!"

  '꼬츄, 꼬츄 하나 업써! 그게 아쉬워어!'

  "아잇, 빨리 멈추라고오!"


  그 때 검은 봉고차가 집 앞에 멈춰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당황한 아현의 말이 튀어나감과 동시에 엄청난 떡대를 가진 남자 두 명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박아현, 맞지? 지속적으로 고물상을 털고, 불법적으로 만든 부품이나 무기도 거래하고. 이젠 남의 로봇까지 훔치시겠다?"

  "너, 너희들..."

  금발의 남자가 말하자 어두운 피부의 남자가 박아현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 너, H-1322 기종 2901번, 폐기 완료인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구나? 고물상에서 숨은 여자랑 같이 죽은 것을 봤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너도 회수되어줘야겠다."

  "어서 놔! 놓으라고!"

  "그 때 바로 잡았으면 그 때 훔친 나사 몇 조각 비용만 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지속적으로 보면서 모두 합산시켰거든? 네 좀도둑 부모님처럼 야금야금 잘 훔쳤더라고. 배 타고 모녀가 같은 곳에서 일하면 좋겠네."

  "이... 시발..."

  아현은 그 말을 듣자 추욱 늘어졌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기 시작했다.

  "얼마... 얼마를 내야하는데... 부모님 두 분 다... 얼마 내야 풀려나는데..."

  "그건 말야, 일단 끌려가고나서 말해볼까? 너, 봉고에 여자 태워. 나는 로봇 들고 갈게."

  "살려... 줘..."

  아현을 들고 있던 어두운 피부의 남자는 어깨 위에 짐처럼 아현을 짊어졌다.


  "자, H-1322-2901, 너도 일어나."

  박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몸부림치며 끌려가는 아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 때 박이의 몸 움직임은 가정용 로봇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재빨랐다. 박아현이 직접 수리하면서 바꾼 부품 몇 개가 호환이 되는 다른 기종의 부품이라고 하지 않는 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가정용 모터가 내는 힘보다 큰 힘을 내었고, 팔의 골조는 힘을 어느 정도는 견뎌냈다.

  오른손, 왼손, 왼손, 다시 오른손. 빠른 속도로 펀치를 날렸다. 원래 로봇은 인간 대상의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 공격방지장치 또한 칩 속에 들어있는 프로그램에 불과했다. 많은 불법 로봇 격투가 공격방지 칩을 태워버리고 행해지게 된다.

  "흐윽, 커억...."

  얼굴을 연속해서 친 후 다시 배로. 하지만 이번에는 금발에 태닝한 남자가 더 빨랐다. 칼로 박이의 배를 찔렀다. 배에서 치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연약한 접합부를 노려 찔렀다.

  "별 것 아니..."

  기계는 전원이 끊기기 전까지 계속해서 움직인다. 비록 어디가 부서졌는지, 어느 회로가 끊겼는지, 아마 중요한 부분일테지만 지금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잽싸게 손날로 칼을 쳐냈다. 소리를 듣고 어두운 피부의 남자가 아현을 바닥에 대충 내려놓고 달려왔다. 아현의 안경이 바닥에 따로 떨어졌다.

  "형님!"

  박이는 금발 태닝 남자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견고한 철골로 된 팔은 목을 조르기에 충분했다.

  "이 로봇새끼...! 빨리 놔!"

  어두운 피부의 남자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총에 맞는다 해도, 내 외피는 인간의 피부가 아니라 철판이다. 도탄되면 죽는 것은 여기 있는 이 사람이다."

  하지만 총구는 서서히 아현에게로 돌아갔다.

  "형님을 놓아라. 그리고 순순히 따라와라."

  "안경... 안경..."

  아현은 총이 자신에게 향해진 것도 보지 못한 채 안경을 더듬고 있었다. 박이는 조르던 팔을 풀고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목이 졸려진 금발 태닝의 남자는 스르르 내려앉았다.

  "자, 형님 들고 따라와."

  어두운 피부의 남자는 총을 집어넣고 아현에게로 다가갔다. 박이는 금발 태닝의 남자가 아닌 그의 칼을 집어들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박이는 뛰었다.


  피가 흩뿌려졌다. 목에 박힌 칼을 빼내자 어두운 피부의 남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흩뿌려진 피 위로 피가 흘러내렸다.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박이는 둘을 확실히 처리했다.

  "아흣... 끼얏...!"

  아현은 총소리에 놀라 움츠러들었다. 박이는 박아현의 두꺼운, 둥근 안경을 집어 다가갔다.

  "다 끝났다."

  처음의 비 내리는 고물상에서처럼, 아현의 안경을 찾아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접 아현의 얼굴에 안경을 씌워주었다. 아현은 이제야 선명해진 시야로 흩뿌려진 피와 두 구의 시체를 보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둘은 죽었다. 그리고, 나도 죽는다."

  가슴에 찔린 지직거리는 두 상처에서 유압장치의 기름이 흘러나왔다.

  "유압이 끊어진 듯 하다. 그리고 배터리 연결 전선도 끊어져서 각 장치가 가진 전기를 다 쓰면 끝이다."

  "아냐... 아냐! 내가 다시 연결해줄게... 살려줄게... 처음처럼..."

  "아니. 먼지가 들어가면 안되는, 정밀 지능 회로도 손상되었다. 이 회로는 쓰레기장에서 못 구해. 그리고 이게 바뀌면, 나는 더 이상 박이가 아냐."

  "아냐... 널... 살릴 수 있다고..."

  아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입가도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너의 웃는 모습을 보고싶다."

  "바보야... 지금 웃겠냐고..."

  '차캐! 귀여어! 이뽀! 꼬츄, 꼬츄 하나 업써! 그게 아쉬워어! 나머지는 조아아... '

  박이는 어제의 녹음을 재생했다.

  "흐흑...흐흐..흑... 순수한... 너..."

  "이제 웃는 것... 같네... 녹음 파일...은... 빼서... 가져가..."

  박아현은 소리없이 흐느꼈다. 누워있는 자세에서 일어나 앉아 박이를 끌어안았다. 아현은 애써 웃었다.

  "사랑해..."

  "이제... 뭔... 지... 알... 겠..."

  박이의 전원은 끊겼다. 아현은 전원이 끊긴, 다시 복구되지 못하는 철 더미를 끌어안고 소리내어 울었다. 비는 계속해서 거세게 내릴 뿐이었다.




  로봇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사랑을 이해한 로봇이 있었다.

  이 말의 주인공이 로봇과 사람이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로봇과의 마지막 기억을 갖고 떠나 이전의 일을 하며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풍문만이 돈다.




12000자 빡세네


원래 순애챈 대회에 만화/그림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그림 그리기 어려울 것 같아서+내가 사람 잘 못그려서의 이유로 글로 썼음.


박아현이랑 박이 대략적인 디자인 보고싶으면 순애챈으로. ㅈㄴ 못그렸음

https://arca.live/b/lovelove/46247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