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해봐."

"아."


집사인 준서의 입 안에 스프를 한 스푼.

준서의 볼이 잠깐 볼록해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간다.

덩치는 곰만 해서는 다람쥐를 연상시키는 모습. 귀여워.


"또 아 해봐."

"그만그만. 이제 괜찮아 틋순아."


준서가 두손을 내젓는다.

두손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살짝 붉은 것도 같다.


"뭘 부끄러워 하고 그래. 빨리 아 해봐."


남작의 딸이 되어 이세계에 전생한지 20년, 같이 전생해 온 준서는 내게 빛과 같은 존재였다.

워낙에 말이 서툴러 낯을 가리던 날 대신해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아버지 앞에서 떨고 있을 때는 내 입장을 대신해 말해주기도 하고.


결국 집사란 지위를 과시하는 듯한 그 상냥한 오지랖은

이제는 여심이 되어버린 내 가슴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전생 20년째임에도 어린 소녀처럼만 보이는 이 작은 체구 때문에

이 세계 남자들이 절대 여자로는 안 볼 콩알만한 체구 때문에

그리고 내가 남자였단 것 때문에

고백하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정작 한번 속마음을 밝히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지금의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아무도 없잖아. 아 해봐."

"배불러서 그래."

"그래...?"


아쉽지만 배부르다면 이쯤 해야지.

뾰로퉁해진 내 얼굴을 준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난 많이 먹었으니까 틋순이 너 먹어야지. 배 안 고파?"

"나는 방금 전에 먹었잖아."

"그랬어?"

"준서 오기 전에..."


아야.

머리가 아프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아프다.


왜지? 왜 갑자기 이러지?


"왜그래 틋순아? 말을 하다말고."

"머리가 아파... 뭔가 떠오르려고 하는데 기억이 안 나."


점점 더 머리가 아파온다.

뭐지? 뭐야?

뭐 때문에 이러는 거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에게 준서가 새하얘진 얼굴로 달려온다.


"틋순아 정신 차려! 틋순아! 틋... 아... 그 얘기... 그만 할... 잘못했..."


말이 흐릿하게 들린다.

화면이 깨진 게임처럼 중간중간이 비어서 들린다.

시야도 소리를 따라 흐릿해지느ㄴ ㄱ... ㅓㅅ...




"순아... 틋순아!"

"... 핫!"


흐릿해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소리도 조금씩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정신이 들어?"

"나... 어떻게 된 거야?"

"잠시 기절했어. 어디까지 기억 나?"

"... 너가 배부르다고 한 거까지."

"다행이다. 거기까지만 기억하는구나."


준서가 한숨을 내쉰다.

아직 머리가 얼얼하지만 많이 나은 것 같다.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준서야."

"왜, 아직 아파?"

"거기까지 '만' 이 무슨 뜻이야?"

"어?"


기분탓일까.

준서의 얼굴이 일순간 차갑게 굳었던 것 같다.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내가 기억해내면 안 되는 게 있다는 거야?"

"뭐? ... 아, 아니야. 내가 그냥 말을 잘못한 거 뿐이야."


준서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한다.

뭘까. 왜 무언가가 쎄할까.

혹시 준서가 나한테 뭔가 감추는 것이 있는 걸까?


하지만 뭘? 준서가 나에게 뭘 감추단 말인가?

공식적으론 비밀이라지만 나와 준서는 애인이 아닌가?

나한테 감출 것이 뭐가 있는 거지?


생각은 생각을 낳고

의심은 의심을 낳는다.


준서의 수상쩍은 언행에 내 도끼병이 폭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이 열린다.


"김틋순! 김틋순 나와!"



*



"그러니까... 영주님이 절 부르셨단 거죠?"

"그렇다고 몇번을 말해."


앞장을 선 사람이 지겹다는 얼굴을 내비친다.


준서에 대해서는

수상쩍긴 하지만 지금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일단은 발등의 불부터 꺼야지.

도대체 옆마을 영주님이 왜 갑자기 나를 찾는 건지...


그나저나

영주라면 아버지보다 높으신 분일까?

아버지는 남작이시니까 아버지보다 높으시려면... 백작? 자작?

어쨌든 아버지 외의 다른 영주를 뵈는 건 처음인지라 긴장도 된다.

어떤 사람일까? 왜 나를 보자고 한 것일까?


얼마나 걸었을까.

다리가 아파질 즈음 앞서 걷던 사람이 다리를 멈췄다.


"영주님! 김틋순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와라."

'끼익'


크고 우람한 문.

하얀색 바탕에 붉은 장식을 수놓은 문이 열린다.

문 건너로 보이는 것은 마차만한 크기의 침상과 그 위에 앉아있는 남자.


"여자는 놔두고 너희들은 가봐라."


저 남자가 영주일까?

입고 있는 옷은 굉장히 고풍스러워 보이니 틀림없을 거야.

근데 왜일까.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무서워..."


무서운 걸까.

얼굴이 무섭게 생겼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얼굴은 잘생겼다.

시우보다도 잘생긴 것 같다.

근데 왜 무서운 걸까.

난 뭘 무서워하는 걸까.


"나, 나갈래."


영주에 대한 인사도 잊은 채

닫혀가는 문을 손으로 비집는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유도 모를, 원인도 모를, 원시적인 수준의 공포가 느껴진다.

저 남자에게서.


"뭐야 이거 왜 이래?"

"나갈래, 나가게 해줘!"

"손 치워!"

'끼익'

'쿵'


억센 문지기의 손길에 나의 조막만한 손가락은 밀려난다.

희망의 끝을 고하듯, 쿵 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진다.


"김틋순, 이쪽으로 와라."


피가 뭉텅이 져서 떨어지는 듯한 소름끼치는 목소리.

두려움에 겨워 다가간 그곳에는 영주의 발가벗은 하반신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


"시작해라."

"... 예...?"

"시작하라고 늘 하던 걸."


시작? 뭘? 늘 하던 거? 난 오늘 처음 여기에 온 건데?

게다가 뭐야. 왜 저 사람은 옷을 벗고 있는 거야?


내 마음을 따라 움츠러든 두 주먹을 무시한 채

영주란 사람은 내 복부에 손을 뻗었다.


""시작" 하라고."


영주는 그대로 내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아프다.

아파.

너무 아파.

아파.

아파!


"아악!"


명치.

인간의 급소.

아프다. 숨이 안 쉬어질 정도다.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아도 아픈 곳인데

'여자가 되어 나약하고 민감해진 이 몸이면 얼마나 아플까'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통이 열어젖힌 내 입을 보고 영주는 다시 한번 말했다.


"시작해."

"시... 싫어... 요."


무엇을 시작하라는 걸까.

영주의 발가벗은 하반신을 보면 뻔한 게 아닐까.

이 으슥한 야밤에 굳이 '침소' 로 여성을 부른 걸 보면 뻔한 게 아닐까.

명치를 파고 들었던 영주의 손은 한번 더 날 향해 뻗쳐왔다.


"커헉?"


복부 어딘가.

복부 어딘가에 날아들어온다.

이번에도 주먹이다.


"콜록콜록!"


눈앞이 아득해진다.

겨우 두방 맞았을 뿐인데.

이 작은 몸은 이렇게나 연약하구나.

여자의 몸은 이렇게나 연약하구나.

새삼스레 눈물이 날 것 같다.


"벗어라."

"시, 싫... 켁!"


끊어져 버릴 것 같다.

뼈가 으스러져 버릴 것 같다.

목뼈가 으스러져 버릴 것만 같다.


날래게 내 목을 가로챈 영주는

이번에는 그대로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좋은 손잡이를 얻었다는 의미일까.

영주는 목을 잡은 채로 그대로 나를 들어올렸다.


왜.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언제 나를 봤다고 이러는 거야.


토할 거 같아.

메스꺼워.

눈알이 빠질 거 같아.


목이 코가 혀가 머리가

부숴지는 것 같아.

썩어버릴 것 같아.

찢어질 것 같아.

터져버릴 것 같아.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아.

목이 끊어지는 것 같아.

몸이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아.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살려줘.

제발.


"케헥!"

"벗어라."


질리지도 않고 또 같은 주문.

말은 나오지 않고 미친 듯이 고개만 끄덕인다.

영주는 목을 놔준다.


산 건가?

살아남은 건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바닥에 엎어져버린 나를 보고 영주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프다.

여기서 저항하면 또 때릴 것이다.


그래, 옷만 벗기고 아직 뭘 한다고는 안했다.

혹시 몰라.

그냥 관음증이 좀 센 사람일 수도 있어.


그냥 옷만 벗자.

아픈 건 싫잖아 김틋순. 응?

말을 안 들으면 또 때릴 거야.

천천히 벗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응?


그만 떨고 벗자.

벗는 거야.


"빨리빨리 안 해?"

'푸욱'

"꺄아아아악!"


다리가 뜨겁다.

따갑다.

쓰라리다.


어디서 난 걸까.

영주의 손에는 단검이 한자루 들려 있다.


급하게 다리를 본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절대 얕지도 않은 자상이 하나.


조금씩 붉어지는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다리와 맞닿는 공기가 너무나도 따갑다.


눈물이 난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벗어라."


저승사자의 엄포 같은 영주의 명령.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낸다.

벗어야 한다. 벗어야 산다.

살고 싶잖아 김틋순. 벗자. 벗는 거야.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응?


'툭'


벗은 옷이 떨어지는 소리일까, 아니면 내 자존심이 떨어지는 소리일까.

눈물이 온 얼굴을 범벅으로 만들 때 쯤, 영주의 말소리가 들린다.


"허,참. '노예' 도 무시하는 영주라. 다른 영주들이 우습게 볼만도 한데 그래."

"'노... 예' ?"


노예?

귀족 영애인데?

나 귀족인데?

우리 아빠가 남작이란 말이야.

나...


"뭘 멍하니 서 있는 게야. 올라와!"


당연하다시피.

옷을 벗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그리고 뻔뻔하게.


영주는 그날 밤

나를 탐했다.


그리고 영주에게 범해지면서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빌어먹을 '노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거짓말쟁이."


틋순이가 돌아왔다.


"이준서 거짓말쟁이."


상처투성이에, 옷은 다 찢어져서 돌아왔다.


"거짓말쟁이."


또 영주에게 당하고 온 것일까.


"거짓말쟁이."


틋순이의 쉬어버린 목소리가 파르르 떨린다.


"다 기억났어 이 거짓말쟁이야..."

"... 미안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


엉엉 울면서 틋순이가 나를 때린다.

틋순이가 처한 상황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 상황에 고작 '이런 것' 밖에 못하는 내가 밉다.


"틋순아. 여기 봐봐."

"... 하지 마."

"봐봐."

"집어치우라고!"


틋순이가 동전을 날려버린다.

댕그랑 하는, 쇳소리가 이 좁은 지하감옥을 메운다.


"... 떨어지면 찾기 힘든데."


땅을 더듬으며 동전을 찾는다.

틋순이의 앙칼진, 그러나 눈물 젖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만 좀 해!"

"틋순아, 너 도와주려고 이러는 거야."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건데! 넌 나 없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건데!"


눈가에 틋순이의 차갑지만 따뜻한 손이 닿는다.

여기에 처음 들어올 때 영주에게 뺏긴, 두 눈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두 눈이 있던 자리에.

노예라는, 내 신분을 알려주는 듯한 그 자리에.

그곳에 틋순이의 손길이 닿는다.


"준서야..."


흐느낌이 들린다.

틋순이의 것이다.

틋순이가 울고 있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

"우리, 그냥 같이 버티자. 응? 너 혼자만 그런 무서운 현실을 보게 하는 건 싫어."

"..."

"너는 남자라지만 너도 노예야. 무서운 일 많이 있을 거 아니야. 응?"

"틋순아."


바닥을 매만지던 손끝에 동전이 걸린다.

동전을 따라가면 그 귀퉁이에는 실이 있다.

실을 똑바로 펴서 틋순이의 앞에 보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동전을 천천히 흔들면 된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할 뿐이다.


"싫어. 이러지 마 준서야."

"셋을 세면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미안해.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잖아."

"꿈 속에서 당신은 아직 귀족집 딸입니다."


미안해.


"연인 사이에는 다 터 놓을 수 있어야 되는 거잖아."

"당신을 노예로 만든, 가문을 멸망시킨 대귀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 밖에 못해서 미안해.


"서로 상담도 하고 할 수 있어야 하잖아."

"저에 대해서는... 가문이 멸망하기 전까지의, 집사시절의 저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도 꿈속에선


"너만 힘든 거 난 싫어. 응?"

"아, 까먹을 뻔 했군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당신의 저택입니다."


아프지 않으니까.


"나 이런다고 안 행복해. 응?"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택내에서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하니까.


"준서야..."

"셋"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발..."

"둘"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그러지 마..."

"하나."


꿈속을 즐길 수 있기를.


*

ts물 채널 대회 쪽 출품작인데 일단은 여기다가도 업로드 해둠.
해당 대회는 https://arca.live/b/tsfiction/46299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