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가 없는 신은 죽지 않는 인간에 불과하다. 태초부터 내려온 법칙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비를 내리고, 사랑을 퍼뜨리고, 파도를 일으켰다. 하지만 우리의 권능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저 멀리 소아시아 너머에서 온, 나무에 달려 죽은 처녀의 아들은 우리를 올림포스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저 죽지 않을 뿐인 인간이 된 우리는 그렇게 한때 우리를 섬기던 인간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하지만, 권능을 잃은 신의 말로는 더욱 비참했다. 인간이, 그렇게 불완전했던 인간이 진리를 알아갈수록, 그 진리를 관장했던 신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다. 자연 속에 살아가던 님프들을 시작으로 하급 신들이 하나하나 사라졌다. 오래지 않아 인간들의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할 땐 자연물과 감정에 깃들었던 신들이 사라지고, 말 대신 바퀴가 달린 말 없는 마차를 타기 시작하자 점점 우리들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난 12신 중 하나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가장 먼저 온 이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헤스티아. 아직 살아 있었군.”


“하데스, 건강해 보이는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죽음은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존재니까. 하지만… 넌 아닌 것 같군.”


헤스티아는 수천년간 만날 때 마다 점점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먼저 사라질 거라 생각했건만… 다른 이가 첫번째가 되고 말았다.


“인간들이 화롯불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나도 얼마 남지 않은 거지.”


“여기선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다른 여자의 목소리에 둘 다 그쪽을 바라보았다.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한 남자가 탄 휠체어를 끌고 도착했다. 나도, 헤스티아도 그 둘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아프로디테, 헤파이스토스.”


휠체어에 탄 남자는 연거푸 기침을 하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인간들이 본 신화에선 둘은 결혼을 했지만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물론 신이었을 적엔 그랬다. 인간이 된 지금은 사이좋은 부부지만.


“헤파이스토스, 당신도…”


헤파이스토스는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대장간에서 물건을 만들지 않고, 화산을 두려워하지도 않잖나. 자네는 건강해 보이는구만.”


“하데스, 건강해보이는 군.”


그 다음으로 나타난 건 아레스였다.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곧이어 나타난 건 제우스였다.


“죽음이니 전쟁이니…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죽음을 택하는 거였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래서, 다른 녀석들은 언제 오는 거지?”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커다란 자동차가 멈춰서더니 그 안에서 나머지 9명이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서 나타난 이들 중 한 여자에게 나는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페르세포네.”


그녀 역시 미소를 지었다.


“하데스.”


두 사람의 따뜻한 만남이 이뤄지기 직전, 차를 몰고 온 헤라가 말했다.


“안부는 천천히 묻게나. 이제 시간이 없네. 헤르메스, TV 틀어.”


그 젊은 청년, 헤르메스가 TV를 틀었다. 벌써 자리 깔고 앉은 포세이돈이 말했다.


“디오니소스, 와인은?”


“여기 있습니다.”


순식간에 여기에 모인 15명의 앞에 와인이 놓여졌다. 그리고 TV에선 거대한 창 같은 것 -인간들은 이를 ‘로켓’이라 불렀다-이 연기를 뿜고 있었다. 아테나가 말했다.


“저렇게 커다란 게 하늘 끝까지 날아서 달까지 간다고?”


옆에 앉아 여동생을 부축하고 있는 아폴론이 말했다.


“예언이 그렇게 되어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모두 다 부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


아폴론의 부축을 받는 백금발의 소녀, 아르테미스가 말했다.


“앞으로 몇 시간…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그 순간, 이번엔 대지가 울렸다. 그곳의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헤파이스토스가 입을 열기 전까진.


“혹시… 아직 신격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나?”


“날세.”


대지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가이아였다.


“또 한 존재의 마지막을 지켜보러 왔다네. 아르테미스여.”


그리고, 데메테르가 소리쳤다.


“발사한다!”


그 거대한 로켓이 아틀라스 산 만큼이나 거대한 불길을 뿜으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침묵 속에서 헤라가 말했다.


“빠르구만… 헤르메스 보다도.”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와중에도 그 순간 만큼은 모두가 웃을 수 있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했는가… 그래, 먹고 마셨다.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모두가 그녀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TV 너머로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달에 도착한 기계 안에서 나와 달에 발을 딛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그리고, TV 속의 남자가 말함과 동시에 빛이 아르테미스를 감싸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말했다.


“잘 가게, 아르테미스.”


뒤이어 다른 이들도 그녀에게 작별은 건냈다.


“뒤따라 가겠네.”


헤파이스토스의 말에 아르테미스조차도 웃어버린 순간, TV 속의 남자가 깃발을 달에 꽂았고, 아르테미스는 웃음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조용히 바라보던 모두는 그렇게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그 후로도 하나 둘 사라졌다. 그때 그 농담 대로 헤파이스토스가 뒤를 이었다. 곧이어 헤스티아가 라이터의 보급과 동시에 사라졌고, 태양으로 탐사선이 도착하며 아폴론이 동생에게 떠났으며, 하늘과 번개의 비밀이 밝혀지자 끝내 제우스마저 사라져버렸다. 나를 비롯한 이들이 다시 모이게 된 것은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헤르메스마저 사라진 다음이었다. 아레스가 말을 걸었다.


“너희 둘은 아주 정정하구만.”


“전쟁의 신이었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가만히 듣기만 하던 아테나가 한숨을 쉬었다.


“지혜, 가정, 사랑, 죽음, 전쟁… 적어도 이 다섯은 끝까지 남아있겠네.”


내 옆에 서 있던 페르세포네가 항변했다.


“어머니나 포세이돈도 아직 살아 있어요! 디오니소스도요!”


하지만 아테나는 더욱더 차가운 말투로 냉소를 보냈다.


“얼마나 갈 것 같아? 디오니소스야 그렇다 쳐도, 저들은 금방 바다의 모든 것과 대지의 비밀까지 밝혀내겠지. 그러면 그 둘도 사라지는 거야.”


“거기까지 해, 아테나. 인간들의 행보를 보면 우리조차 언젠가 사라질지 몰라. 어쩌면 이건 오래 전 우리가 신이 아니게 되었을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아테나는 다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나는 최근들어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페르세포네를 한 손으로 껴안은 다음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답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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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타일로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