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옥좌의 위엄을 내세우며

그리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붉은 색 두 뿔의 위엄을 내보이며

마왕 '사탄' 이 말했다.


"다음 아이디어. 누구 없나?"

"제 생각으론 말입니다."

"오, 그래. 우리 마왕군 참모님. 기탄 없이 말씀해 보시게."

"예, 제 생각으론 숟가락이 휘어지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그것도 좋군."


이곳은 회의장.

마족들의 회의장이다.

지금은 하나 같이 저 잘난 줄만 아는 마족들이 마왕의 명에 따라 한데 모여서 회의를 하는 중이다.

참고로 회의의 목적이라 함은...


"그것만으로 인간들의 분노를 모으기엔 좀 힘들지 않을까요?"


인간들의 분노를 모으는 것이었다.

마왕, 사탄의 힘의 원천인 '분노' 를 모아 신계와 인간계를 지배하는 것.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였기에 사탄은 인간들의 '분노' 를 모으기 위한 방법을 물색 중이었다.


"제 생각에는 그것만으론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혹시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발레포르?"


이번에는 고고한 마계 공작으로 유명한 발레포르가 입을 열었다.

늑대 수인 출신의 악마인 발레포르는 마족 내에서도 나름의 꾀돌이로 통하곤 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왕님."

"오, 도대체 어떤 기 막힌 계략을 생각한 것인가."

"식사 시 숟가락이 휘어지게 한다, 그럴 듯한 제안입니다.

스푼이 휘어져 있어서야 제대로 뜨기가 힘들테니까요.

꽤 많은 분노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기왕이라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떻게 말인가.

회의장의 악마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그걸 누가 모르냐고."

"누가 수인족 출신 아니랄까봐 말도 뜸 엄청 들이네."

"헉 유 퍼킹 레이시스트!"

"설마 저거 말하려고 일어선 건 아니지?"

"그만그만! 발레포르가 아직 말하고 있지 않느냐!"


마왕의 호통에 회의장은 다시금 침묵에 빠졌다.

늑대 수인, 발레포르는 예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푼이 휘어지는 것이 인간의 분노를 유발한다면...

스푼을 아예 없애버리면 더 큰 분노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무슨 개소리야 저게?"

"헉 유 퍼킹 레이시스트!"

"그러니까, 스푼 없이 밥을 먹게 하면 인간들이 더 많은 분노에너지를 내뿜을 거란 거 같은데?"

"숟가락을 이 세상에서 지우자고?"

"어떻게 그런 악마적인 발상을!"

"흐으음..."


톡 톡 톡 톡 톡.

마왕이 회의장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고심 중일 때 그가 취하는 습관이었다.


"그래도 되는 걸까?"

"물론입니다 마왕님."

"우리도 그, 숟가락이란 건 쓰잖아. 없으면 우리도 곤란해."

"그런들 뭐 어떻습니까. 손으로 집어먹으면 되지요."

"그런가? 모르겠다. 채용!"


다소의 유치함과

다분한 유치함.


마족의 회의란 것은 늘 이런 식이었다.


오죽하면 천계에서도

마족의 회의가 열릴 때마다 시원찮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주님 아버지시여.

-왜 그러느냐 나의 아들아.

-또 마족들이 회의를 열어서 인간계에 불행의 씨앗을 퍼뜨리려고 한다 합니다.

-놔둬라.

-예?

-어차피 그녀석들 회의로는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천년은 걸린다. 놔둬라.


한명의 타천사가 천사 시절 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골머리를 썩이는 타천사와 달리

마족의 회의는 점점 달아올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스푼도 없겠다, 아예 밥이란 것을 없애버리면 어떻겠습니까 마왕님!"

"밥이 없으니 빵도 없애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마왕님!"

"아예 식사라는 행위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버립시다 마왕님!"

"그만!!"


회의장의 원탁이

일찍이 자유로운 의견교환을 겉으로만 흉내내며

마왕이 만들었던 회의장의 원탁이 들썩하고 흔들렸다.


"아스모데우스, 달리 계책이 있는건가?"


분노하며 일어난 자는 아스모데우스.

색욕의 대악마인 타락천사였다.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검게 물든 천사의 날개를 펼치며 성을 내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인간계 정복을 하겠습니까!"

"난 괜찮은 거 같았는데..."

"너 인마 방금 식사 자체를 없애자는 그 놈이지?"

"뭐가 마음에 걸린 건가 아스모데우스?"


으르렁거리던 아스모데우스는 마왕의 질문에 금새 태도를 누그러 뜨렸다.


"마왕님 저희 마족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 지? 이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니까."

"아무리 인간들의 분노를 모으기 위해서라곤 해도, 식사라는 행위를 세상에서 없애버리면 저희도 타격이 큽니다."

"그런가?"

"그런 짓을 하면 저희 마계에도 타격이 오니까요. 마족도 밥을 안 먹으면 죽잖습니까."


'그런가는 뭔 얼어죽을 그런가에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아스모데우스는 초인적인 수준의 인내심으로 그것을 집어삼켰다.

마왕, 사탄이 한참 동안 고민하는 낯빛을 취하더니 말했다.


"그렇네. 우리도 안 먹으면 죽었지. 야 이거 어쩌냐 이거."

"밥이나 빵을 없애자는 의견도, 그리 되면 저희 마족들까지 배를 곯아서 군사력이 떨어지니 아니 됩니다."

"그렇네. 천사들이 공격이라도 하면 전멸이잖아."

"걔넨 이슬만 먹고도 사니까."

"큰일인데 그럼. 어쩌냐 이거. 달리 방도가 없는 게냐?"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무슨 대단한 이치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마왕과 그의 측근들.

아스모데우스는 뒷목이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그냥 간단히 하급악마 몇마리 지상에 현신시키시죠."

"응? 그런 방법으로 인간들의 분노를 모을 수 있겠느냐?"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린 인간계에 함부로 현신 못하잖나."

"맞아맞아. 천사들 정보망 얕보지 말라고. 바로 걸린다니까."

"걸리면 한바탕 전쟁이란 말야!"


아스모데우스는 타락천사 특유의 검고 아름다운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조용! 하급 정도론 안 걸립니다! 기원 전에 시험해 보았던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오오..."


회의장의 악마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감탄의 표시였다.


"그럴듯해. 훌륭하다. 아스모데우스."

"말 되는데? 하급 악마면 200년 쯤 전에도 몇마리 풀었을 때 안 걸렸잖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스모데우스가 난 놈이야. 타락천사들 중에 보면 쟤가 제일 머리 잘 굴리더라 야."

"보면 타락천사 출신이 머리가 비상한 애들이 많더라."

"천사 때도 꽤 높은 자리였다고 들었는데."

"5252 아스모데! 믿고 있었다고!"


실상은 너무나도 뻔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해답인 것을 두고

아스모데우스의 계략이 출중하니 어떻니 하는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회의장.

오랜만에 열렸던 마족 회의는 그렇게 맥 없이 해결책을 찾는 듯 했다.

다들 환호했기 때문이다.

딱 한명, 마계 공작 발레포르만 빼고.


"풉."

"왜 웃는 거지 발레포르?"


발레포르의 콧방구를 놓치지 않은 마왕은 의문을 가졌다.

왜 웃는 건가?

이토록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앞에 두고 무엇이 아니꼬운 건가?


"별 거 아닙니다 폐하. 풉큭..."

"뭔데 그러나, 말해보라니까 그래."

"아뇨. 그저 아스모데우스경의 계획의 치명적인 문제를 아무도 못 본다는 게 안타까워서 말이죠."

"아스모데우스의 계획에?"

"예. 전체적으로는 괜찮으니 딱 한부분만 손보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치명적인 문제? 그런 게 있단 말인가?"


그 말에 발레포르는 대뜸 정색했다.


"모르셨습니까?"

"어? 그, 그래. 몰랐네."

"어떻게 이걸 모르신단 말입니까?"

"미안하군. 짐이 부덕해서 그런가 보네."


악마가 부덕하다면 칭찬이 아닐까 좌중은 생각하면서도

점점 떠들썩하던 회의장의 분위기는 걷혀갔다.


"아니 폐하. 진정 모르시겠단 말이십니까?"

"모른단 말일세. 이것만으론 모자라다고 말하고 싶은겐가? 보완책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작전은 전체적으로 글러먹은 책략이었으니까요. 보완이고 나발이고를 할 수가 없습니다."

"... 쟤 방금은 '전체적으론 괜찮으니까 한부분만 손보면 되겠다' 고 말하지 않았나?"


몇몇 악마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쑥덕였다.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겁니다."


발레포르는 아스모데우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매서운 눈이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순애충이란 사실이죠."

"? 아니 이보시오 그게 침공작전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이오!"


자리에 앉았던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벌떡 일어섰다.


"발레포르 공작, 나는 지금 전략에 관한 의견을 낸 것이오. 반론을 할 거면 말이나 되는..."

"마계의 법은 NTR이오. 어찌 더러운 순애충 따위가 계책을 입에 담는단 말이오!"

"이보시오! 나는 순애충도 아닐 뿐 더러 그건 지금 작전과 아무런 관련..."

"뭐, 아스모데우스가 순애충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색욕의 악마라는 녀석이 그런?"

"그렇소 아스모데우스는 순애충이오. 증거도 가지고 있거늘."

"이보시오 발레포르!"


아스모데우스가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발레포르는 한치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저번에... 언제던가. 500년 쯤 전이었던가? 소녀 한명한테 빙의해서 소녀의 남편을 죽이고 소녀를 구해오지 않았소."

"뭐? 원래 남편을 죽이고?"

"구해왔다고?"

"그렇소. 해당 소녀는 남편에게 부당한 폭력을 당하며..."

"... 근데 그러면 NTR 아니야?"

"행복하니 순애이오. 말 끊지 마시오."


순애라기 보단 NTL이나 NTR에 더 가까운 이야기였으나 발레포르는 개의치않고 밀어붙였다.


"소녀의 이름은 사라로 알고 있소. 내가 확인해 본 결과, 아직도 경의 저택에서 살고 있지."

"그건 낭설이란 말이오! 나 아스모데우스, 마왕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그만! 어디 더러운 순애충이 입을 연단 말이오!"

"음... 증거는 있는가 발레포르?"


회의장 내 기류가 점점 기이해져갔다.

마왕은 다시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증거는 없습니다 마왕님."

"쟤 방금 전에 '증거도 가지고 있거늘' 이라고 하지 않았냐?"


누군가가 회의장 한쪽 구석에서 속닥거렸다.


"증거가 없는 겐가?"

"하지만 마왕님! 저 자는 순애충이 아닙니까! 더럽고 부정한 자입니다! 저런 자의 계획을 채용하실 겁니까?"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도 같고..."


흔들리는 마왕의 태도를 따라 좌중의 입장도 갈대마냥 흔들렸다.


"순애충이라니, 저런 게 어떻게 여기에 당당히 들어온 거야?"

"어쩐지 수상하다 했어. 타천사들 중에서도 쟤가 제일 고상한 척 하더라."

"저 말 듣고 보니 역시 식사 자체를 금하자는 계획이 전략적으로도 더 합리적인 것도 같고."

"보면 타락천사 출신 애들이 꼭 저렇게 흠이 있는 계획을 짜는 애들이 많더라."

"쯧. 천사 때도 꽤 높은 자리였다더니."

"5252 아스모데! 안 믿고 있었다고!"


아직 증거도 안 나온 가짜 순애충의 말은 그렇게 기각되었다. 계획의 문제가 정확히 뭔지는 알지도 못한 채.

결국 아스모데우스의 계획을 기각시킨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마족들은 식사라는 행위를 없애버렸다.

후일 마계의 악마가 절반이나 굶어죽은 대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이 바로 이번 회의에서 나온 결과였다.

물론, 회의가 끝나자마자 성이 난 아스모데우스가 발레포르를 죽이려 들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리라.




*




"주님."

"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이곳은 천계.

신을 앞에 두고 천사 하나가 보고를 하고 있었다.

본래 신의 보좌를 하던 아스모데우스가 타락한 후, 후임으로 들어온 신임 보좌천사였다.


"마계에서 또 회의가 열렸다고 합니다."

"또냐? 저번에 아스모데우스가 타락하기 전에 열려놓고 몇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번에야말로 가만 두어선 안될 것이라 사료가..."

"그러면... 아니다, 냅둬라."

"예?"

"어차피 그 놈들 지능으로 뭘 하느니 부자가 바늘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빠르다."

"... '낙타가 바늘 구멍 속으로' 아닌지요."

"조크야 조크."


이걸 아재개그라고 하면 혼나는 걸까 저울질하던 천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어 근데..."

"응? 왜?"

"타락한 아스모데우스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만."

"말해."

"순애충이라는 소문 때문에 천계복귀를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러냐?"

"제 동기 천사들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성공했군."

"예?"


마시던 포도주를 기울이며 신은 여유롭게 웃었다.


"사라 어쩌고 하는 그 소문이잖아?"

"예. 소녀의 몸에 빙의해서 어쩌고 하던."

"그 소문 내가 퍼뜨린 거거든."

"예?"

"원체 머리가 비상해서 지옥에 가면 걔가 브레인 역할할 거 같았단 말이야. 골치 아팠다고."

"설마 타락 소식을 듣자마자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것인가요?"

"그렇지. 그럼 걔 발언권이 약해질 테니."

"그럼 소문의 진위는..."

"걔 NTR하다 타락한 건데?"

"아."

"남의 라면 뺏어먹는 게 제일 맛있다면서 유부녀한테 손대다가 타락한 거야."

"혹시 그 사라라는 소녀가..."

"걔가 한 NTR의 희생자. 남편이랑 금슬도 좋았는데?"


천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신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누구세요?"

"주님 접니다."

"아. 그래, 오늘 마계 회의 있었다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신이 긴장을 풀었다.

먼 곳으로 파견시킨 자신의 종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 드린 것입니다만."

"어때, 잘 됐냐?"

"마계 놈들 성질 아시지 않습니까."

"하기는 잘 됐을 리가 없지. 그래도 아스모데우스 같은 머리 돌아가는 애들도 있잖아."

"아스모데우스가 뭐라 쫑알대긴 했는데 그건 곧장 기각 당했으며, 그외에 다른 악마들은 이렇다 할 책략을 못 내놨습니다."

"수고했다. 그외 별 문제는 없지?"

"딱히 없습니다만... 선악과파이를 못 먹는다 정도일까요?"


하하하.

전화기 너머로 능글능글한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신도 그 말에 피식하며 반웃음을 지었다.


"그래, 임무 끝나고 돌아오면 배가 터지게 만들어주마."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네가 내 덕분에 고생이 많구나."

"고생이라니요. 제가 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말만 이라도 고맙다. 들키겠네 빨리 끊자."

"예."

"그럼 내년 즈음에 또 전화해라."


스파이 역할을 자처하는 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혹시 자신과 내통하는 것을 마왕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게 뻔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전화를 끊었다.


"선악과 파이라. 요즘 안 만든지 꽤 됐는데 연습이나 할까."


신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손수 요리를 할 심산이었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 자신의 충실한 종인 천사를 위해.

발레포르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