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삼천오백의 군대를 끌고 위화도에 도달했을 때, 기마하여 순시를 하던 이성계가 말 위에서 놀라 묻는다.


"아니, 포은 대감! 이 군대는 뭐요?"


"개경의 모든 수비군을 증원군 겸 도통사 견제의 명분으로 끌고 왔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개경에는 고작 천여 명 남짓의 병력뿐입니다. 최영 대감은 급체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이성계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이성계를 보며 질문한다.


"이성계 대감, 소생이 보낸 편지는 보셨습니까?"


"보았소. 가족들을 모두 동북면으로 보냈다고요."


내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당기며 말한다.


"이제 회군할 준비를 하시지요. 대감. 개경으로 갑시다."



+ + +



"뭐야! 이성계가 말머리를 돌려 평양성까지 도달했단 말이냐!"


우왕이 놀라서 용상을 박차고 일어난다. 정승가가 고개를 숙이며 참담한 목소리로 아뢴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서 방어군을 모아야 할 터인데, 정몽주가 삼천오백의 수비군을 이미 끌고 가 버렸고 게다가 제장들의 9할을 데려가 버렸기에 병력의 추가 모집도 어려운 형편이옵니다."


"허어... 어허... 이런 맙소사..."


우왕이 용상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 때 어떤 생각이 주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듯, 그가 고개를 들고 외친다.


"이성계의 가족들! 이성계의 가족들이 개경에 있질 않습니까. 그들을 어서 붙들어 인질로 삼으세요!"


"명 받들겠사옵니다!"


정승가가 절을 하고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간다. 우왕이 몹시 초조하여 일어나서 공연히 돌아다니는데 우왕의 비 근비 이씨가 편전에 든다.


"전하, 소첩 근비이옵니다."


"오, 그래요, 어서 드시지요."


근비가 들어 우왕 앞에 조아리고 앉는다. 우왕이 용상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묻는다.


"그래요, 내 편은 중전뿐이로군요."


"전하, 소첩이 아뢰지 않았사옵니까. 이성계는 믿을 자가 못 되옵니다. 소첩의 부친이신 광평군 이인임을 몰아내고 권신이 된 자입니다."


"내 이성계보다는 정몽주에게 충격이 큽니다."


우왕이 한숨을 쉬고 참담하게 중얼거린다.


"그런 자를 충신인 줄 알고 끼고 살았다니, 이러니 반란이나 당하는 무능한 국왕이지요."


"그러지 마시옵소서. 지금이라도 병력을 모아서 개경을 지켜내고, 어서 이성계 측과 접촉하여 협상을 시도하소서. 절대로 용상을 내어주시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알겠소. 밖에 누구 있느냐?"


그 순간 편전 문짝이 부서져라 열리고 정승가가 뛰쳐들어와 조아리면서 소리친다.


"저, 전하! 이성계의 집은 텅 비었고, 가족들은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으며, 정몽주 대감의 사병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나이다!"


"뭣이라!"


곧이어 궁 밖에서 함성소리가 들리고, 편전을 두른 궁담의 문들이 우지끈거리며 열린다. 수문장들은 용맹하게 맞서 싸우려 하지만 곧바로 목이 달아나고, 400여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쳐 창과 검으로 편전을 포위한다.


근비가 기겁하여 용상 뒤로 달려가 숨고 우왕은 딴에 왕이랍시고 편전을 박차고 나와 소리친다.


"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범궐하느냐!"


그러자 사병대장이 검을 들이밀며 마주 소리지른다.


"전하, 저희는 정몽주 대감의 사병들입니다. 전하께서 위험하실까 하여 보호해드리러 왔사오니 편전 안에 들어가 조용히 계시옵소서."


"지금 네놈들이 누구보고 오라가라 하는 것이냐! 비켜라! 내 수비병들을 이끌고 친히 이성계의 군대와 싸울 것이다!"


"수비병들은 최영 대감의 유지에 따라 모두 해산되었사옵니다. 편전으로 드시지요."


"최영이 왜 수비병을 해산한단 말이냐!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지껄이지 말고 썩 비키란 말이다!"


그러자 사병대장이 그대로 검을 휘둘러 우왕의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민다.


"들어가십시오, 전하의 안전을 지켜드리러 왔사옵니다!"


"날 위협하고 있는 것은 네놈들이 아니더냐!"


"저희의 지시에 따르시면 위험할 일도 없으시옵니다!"


충격을 받은 우왕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나고, 정승가가 밖으로 나와 소리친다.


"네 이놈들! 감히 그분이 누구신 줄 알고 겁박을 하고 있는 것이냐!"


사병대장이 고개를 까닥인다. 곧바로 궁사들이 활을 매겨 쏜다. 화살 20여발이 날아들고 정승가는 고슴도치가 되어 편전 계단을 나뒹군다. 우왕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사병대장이 또박또박 우왕의 얼굴에 대고 말한다.


"들어가소서. 소인들이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우왕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편전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근다. 근비가 용상 뒤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겁먹은 표정으로 말한다.


"저, 전하... 이를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과인도 모르겠소."


우왕이 비틀거리면서 용상에 주저앉는다. 그 순간 문짝이 부서져라 열리고 사병대장이 들어와 칼을 겨누며 외친다.


"중전께서는 안에 계실 수 없습니다. 즉시 나오시옵소서! 아니면 베겠사옵니다!"


우왕의 눈이 뒤집혀 곧바로 벽에 걸린 보검을 집어들고 뽑아서 사병대장에게 겨눈다. 그리고 이제껏 내 보지 않은 호통으로 사병대장에게 엄포를 놓는다.


"네 이놈들! 중전은 절대로 내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서 용상을 빼앗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서 면류관을 빼앗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서 옥새를 빼앗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서 용포를 빼앗아갈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중전은 절대로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 중전을 베겠다면 먼저 나부터 베어라!"


그러자 사병대장이 피식 웃고 그대로 용상을 향해 걸어 올라간다. 우왕이 몹시 노하여 검을 휘두르자 사병대장이 그대로 우왕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보검을 쳐서 튕겨낸다. 이어서 용상 뒤에 숨어있던 근비의 덜미를 잡고 끌어낸다.


우왕이 울부짖으면서 사병대장을 몸으로 들이받아서 넘어뜨린다. 그러자 편전 안으로 사병 30여 명이 들이닥쳐 우왕을 떼어내어 용상에 던지다시피 앉히고 근비를 질질 끌고 간다. 사병대장이 일어나면서 엄포를 놓는다.


"전하, 이성계 대감이 도달하여 도당회의를 열기 전까지, 모든 국정을 중단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게 정몽주의 뜻이더냐?"


우왕이 용상 팔걸이를 내려치며 분통을 터뜨린다.


"그게 정몽주의 뜻이냐고 묻지 않느냐! 부부가 한 건물에 있는 것조차 막는 것이 정몽주의 뜻이냐고 묻질 않느냐!"


사병대장이 말없이 그 따짐을 듣다가 돌아서며 한마디 흘리고 간다.


"중전마마는 안전하게 정몽주 대감의 댁으로 모시겠으니 걱정하지 마소서."


우왕이 절망한 표정으로 용상에서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혼절한다.



+ + +



내 사병들이 개경 성문을 연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어떠한 저항도 없이 개경으로 무혈입성한다. 내가 이성계 바로 뒤로 말을 타고 입성하고 있다. 백성들이 수군거린다.


"이건 반란 아니여? 어찌 나랏님 명령을 거부하고 독단으로 군대를 돌린단 말이여?"


"아유, 이 멍청한 사람. 상황에 따라서는 군 지휘관이 그런 걸 재량껏 판단할 수 있는 거여."


"이 사람이! 나랏님이 못하게 하면 못하는 거여."


나는 말을 타고 그대로 내 집으로 향한다. 어차피 궁에서 일어날 일은 불 보듯 뻔하고, 난 내 집에서 이야기할 문제가 있다. 집으로 가니 사병 10여 명이 내 집의 문을 지키고 있고, 집의 곳간에서 누군가 안에서 문짝을 두드리며 소리치고 있다.


"네 이놈들!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나는 완전 군장한 모습 그대로 장검을 차고 곳간 문을 열어젖힌다. 그 안에 근비가 통곡하면서 주저앉아 있다. 내가 근비를 내려다보며 조롱조로 말한다.


"중전마마, 강녕하십니까?"


"네 이놈! 이 역적놈이 어찌 감히 나를 곳간에 처넣고 이렇듯 학대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칼을 뽑아서 그녀 앞에 확 꽂아버리자 겁을 먹고 조용해진다. 노비들에게 명령한다.


"문을 닫아라!"


곳간 문이 닫히고, 근비가 몹시 두려우면서도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내가 장검을 땅에서 빼어 그녀의 목에 들이밀며 위협한다.


"중전마마, 오늘 소생이 중전마마를 누추한 집으로 모신 것은 해야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원하느냐. 내가 너에게 살려달라고 엎드려 빌기라도 바라느냐?"


"아닙니다. 왕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왔습니다."


내가 근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슬며시 웃으며 쏘아붙인다.


"용상을 잃어버린 왕에게 기다리는 것은 사약뿐. 중전마마도 주상 전하도 사약 맛이 궁금하지는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이성계 대감과 저희는 꼴사나운 찬탈을 원치 아니하고, 중전마마와 주상 전하는 사약 맛이 궁금하지 않으시니, 분명 틀림없이 둘 간에 어딘가 타협점을 찾을 수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네...네 이놈... 네놈이 지금 감히 나에게 흥정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약을 받으시던가. 우린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당신 아들, 정창부원군, 왕위에 올려놓았다가 보기 좋게 옥새를 넘겨줄 사람은 차고 넘칩니다. 다만 괜히 살생하고 싶지 않아서 한번 흥정이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근비가 질질 짜면서도 꼴에 중전이라고 나름 기품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좋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단지 용상을 원했다면 나에게 이렇게 와서 흥정조차 하지 않았을 터. 원하는 것을 말해 보거라."


"궁극적으로는 용상이 맞사옵니다. 이제 우린 반역자입니다. 용상을 쥐는 것 외에는 살아날 도리가 없지요. 허나 소생은 용상을 쥐고 나서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체제를 완비하고, 현 주상과 중전, 그리고 당신 아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마련하고 나서 보기 좋게 용상을 넘겨받고자 합니다."


근비의 표정이 약점 잡힌 여고생처럼 변한다. 그녀가 덜덜 떨면서 애걸하다시피 주문한다.


"아... 아아... 워, 원자는... 원자의 목숨만은 제발..."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난폭한 개는 마음껏 뛰어놀게 산에 풀어놓으면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이 그 개를 붙들고 묶어두려 할 때 무는 것이지요."


내가 근비의 뺨을 툭툭 치며 감히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하신 여인을 능멸한다.


"하나뿐인 원자의 목숨이 아깝다면, 감히 원자를 저 용상에 앉힐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 주상까지는 봐드리겠지만, 만약 그 다음이 이성계 대감이 아니라면, 용상에 앉는 족족 다 5년 안에 폐위되고 사약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욕심내지 않는다면, 조촐한 사가에서 의식주의 걱정 없이 아이를 키우며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오."


"내... 내 명심하겠다. 제발 원자의 목숨만은 살려다오. 아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포은 대감."


"그렇다면 지금부터 소생이 아뢰는 것을 꼼꼼히 기억했다가 오늘 밤 침소에서 전하께 아뢰소서."



+ + +



잠시 후

만월대 편전



내가 우왕 앞에 엎드려 있고, 우왕의 서안에는 재가를 기다리는 서류 한 장이 놓여 있다. 우왕이 그 서류를 읽으며 분통을 터뜨린다.


"뭐라, 조민수를 문하시중에, 이성계를 수문하시중에?"


우왕이 피식 웃고 옥새를 꺼내서 탕 찍으며 소리친다.


"오오냐, 내 찍어주마! 다 찍어주마! 마음대로 하라! 다 마음대로 하라! 다 너희 마음대로 농단하고 활개치거라! 이 나라를 너희 원하는 대로 마음껏 휘두르고 가지고 놀거라!"


내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 어명, 심신이 다 부서지도록 받들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