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우왕의 침전



"이런... 이런 발칙한!"


우왕이 이불을 걷어차면서 소리친다. 주상의 품에 안겨 있던 중전이 엉엉 울면서 아뢴다.


"전하... 이제 다 끝났사옵니다. 원자만은... 원자만은 살려야 하옵니다. 제발 이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소서."


"용상에 앉아서 조용히 있으라는 소리 아니오!"


우왕이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한 제장이 침전 안을 향해 말한다.


"전하, 무슨 변고가 있으시옵니까? 어찌 이리 옥음을 높이시옵니까?"


우왕이 한숨을 쉬고 중전을 꼭 껴안으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린다.


"과인이 눈멀고 귀먹어 그런 자를 충신인 줄 알았소. 나의 죄요. 과인의 불찰이요."


"전하, 이제 다 끝났사옵니다. 절대 저항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제발... 이제 원자의 보령이 겨우 아홉이옵니다..."


우왕이 원통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리친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 힘없는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 + +



도당에서 전권을 장악한 사대부들과 무장들이 걸어 들어온다. 시중 조민수와 수시중 이성계가 자리에 앉았고, 사대부들과 대신들이 줄줄이 앉는다.


최상석의 조민수가 묻는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났으니, 요동도행군도 해산할 때가 되었소. 어디, 언제 해산시킬지 다들 의견을 말해 보시오."


내가 즉각적으로 대답한다.


"오백에서 일천 정도의 병력만 남기고 즉각 해산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마 역시 모두 다시 역참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장마철에 거병하는 바람에 각 가정의 삶은 파탄이 나기 직전입니다."


조민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돌아본다.


"어디, 뭐 다른 의견은 없소?"


정도전이 발언한다.


"대사헌의 말이 옳습니다. 다만 당장 궁과 주변을 순시할 필요가 있으니 오백은 너무 적습니다. 이천 정도 합시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묻는다.


"아니, 어떻게 오백 병력을 4배나 올린단 말이오?"


"이천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속으로 혼자 키득거리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 나간다. 이성계가 발언한다.


"그렇다면 4천 정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해산시키도록 합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나랏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그것들도 모두 처결해야 할 것이오."


정도전이 말한다.


"지금 국고는 비었고 백성들은 소작인이 되거나 혹은 길거리에 나앉았습니다. 이 점 역시 시급한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동정벌에 많은 국고를 투입해 이제 정말로 한 푼도 남지 않은 실정입니다."


사대부들이 이리저리 말을 모은다. 내가 주먹을 쥐고 각오한 뒤 입을 연다.


"본디 농지라는 것은 농자에게 필요한 것. 사전을 개혁하여 소작인들에게 공정히 나누어 주도록 하는 방안은 어떨런지요."


그러자 깜짝 놀란 배극렴이 날 보며 묻는다.


"아니, 포은 대감,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계민수전(計民授田)이오. 백성들은 모두 자신의 밭을 가지고 그것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하오."


곧바로 반발이 튀어나온다. 변안열이 앞장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지주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노력하여 번 것을 정당히 물려받은 것이고, 자신의 능력껏 노력하여 땅을 넓힌 거요. 그걸 도로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정당히 물려받아서 능력껏 노력했다고 하셨습니까?"


내가 변안열을 노려보면서 사정없이 쏘아 갈겨붙인다.


"국가가 왜구와 홍건적의 난에 휘말려 사람들이 달아나니 그 땅을 자기 사병으로 접수하고, 땅문서를 위조하고 훔치고 농민을 때려서 빼앗고, 왕의 땅인 부곡과 소에서도 멋대로 지세를 걷고 울타리를 두르며, 심지어 다른 지주들끼리 자기 사병을 무장시켜서 내전을 방불케 하는 농장 전쟁을 벌이기까지 하는데, 그것이 '정당히' 얻은 땅이라 할 수 있는 거요? 국법을 무시하고, 왕실을 무시하고, 조정을 무시하고! 대소신료를 무시하고 국가의 안위를 무시하고! 그러고도 그것이 '정당히' 얻은 땅이오?"


배극렴이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도전이 곧바로 바톤을 이어받아 속사포처럼 난사한다.


"누가 지주들 집이며 땅이며 다 빼앗아서 나눠주자 했소이까? 누가 지주들을 알거지로 만들고 농민들에게는 감당도 못 할 땅이나 안겨주자 했소이까? 국법과 왕실의 체통과 권위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접수한 땅만 조사하여 회수하고 그것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자는 것 아니오. 왕의 땅이 아니라 지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지세를 바치고, 지주의 녹읍에서 나서 먹고 자고 죽으니, 도대체 이들이 고려의 백성이오, 지주의 백성이오?"


성균관 대사부 조준이 그대로 이어받아서 다시 긁어내듯이 갈긴다.


"작금의 고려는 수천 리의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수천 리의 농토를 가지고 있고, 수백만의 농민을 거느린 국가인데, 실제로 조정에 걷혀 들어오는 조세는 갈수록 줄고 있소이다. 아무리 대풍이 들어도 나라로 오지 않고 모두 지주의 곳간으로 들어가 이제는 고려 전토 각지에서 지주들의 각 곳간과 곳간마다 쌀과 보리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소. 백성들은 그 앞에서 입에 풀칠할 것도 다 빼앗기고 굶어죽으며 시체들도 쌀 썩는 냄새만 맡고 있질 않소?"


우현보가 말한다.


"허나 사전은 태조대왕 왕건께오서 고려를 건국한 이래 500년을 이어온 제도요. 어떤 제도가 오랫동안 고착하는 데에는 그만한 타당성과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그 전통과 유례를 존중하여 일단 지켜보아야 합니다."


내가 차갑게 쏘아붙인다.


"말씀 잘하셨소! 지금까지 고려의 선대왕 서른 분이 그 사전 제도를 지켜보고 있었소. 그리고 드디어 그 크기가 조정의 땅보다 커지고 나라에 심각한 해악을 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장 불로 태우고 칼로 치고 망치로 두들겨서라도 없애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오!"


"이보시오, 포은 대감! 어찌 이러시는 것이오! 본디 그렇게 입이 험한 분이셨소이까?"


"자신의 끝없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백성을 학대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탐욕스러운 기름덩어리들이 대신이랍시고 뚱뚱한 배를 내밀고 도당에 앉아 그 뱃살의 더러운 기름을 튀기며 아무렇게나 혀를 놀려 지껄이는 작금의 행태를 보아하니, 고려가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를 이 우둔한 사람도 통탄스러우리만치 잘 알겠소이다!"


도당의 대신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기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조민수가 날 보며 말린다.


"이보시게, 포은, 이곳은 도당일세! 뜻은 알겠네만 말을 삼가시게. 대신보고 기름덩어리라니! 일단 사과하시게."


"기름덩어리를 기름덩어리라 하지, 뭐라 합니까? 저자들의 배에 심지를 끼워 불을 붙이면 뱃속의 더러운 기름이 끝없이 흘러 석달 열흘은 타고도 남을 것인데!"


"이보시오 포은!"


우현보가 탁자를 내려치며 일어나서 소리친다.


"어찌 이토록 같은 관리를 능멸할 수 있단 말이오!"


"능멸당하기 싫으시다면 상황을 직시하고 자네의 농장에 대한 탐욕을 버리시오! 농지란 본디 농사짓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외다! 대감께서는 평생 낫을 쥐어 보셨소? 쟁기 끄는 소에게 채찍질 한번이라도 해보셨소? 농사를 짓지 않는 자에게 무슨 농지가 필요하단 말이외까!"


"그 땅을 소작인들에게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하지 않소이까!"


"어차피 밭 가는 자가 똑같은 소작인이라면, 그 땅이 대감의 땅이든 그들의 땅이든 무슨 의미가 있소이까? 대감은 일을 하지 않고, 그들은 일을 하고, 벼 이삭은 자라고, 그럼 그 곡식이 대감의 곳간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라의 국고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소이까?"


배극렴이 실소하면서 소리친다.


"허허, 내 생전 들어 본 모든 궤변 가운데 단연 으뜸이외다! 그렇게 따지면 신료들과 귀족들은 모든 것을 다 나라에 헌납하고 무료로 나와 국정을 보아야 하는 것이겠구려!"


정도전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하면 아무도 신료가 되고자 하지 아니할 것이기에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오!"


조민수가 호통친다.


"그만! 다들 그만하시게! 이 일은 나중에 따로 논의해야 할 것일세! 오늘은 이만 해산하도록 하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내가 탁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정도전과 조준도 함께 자리를 뜬다.


토지개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치러야 하는 고비이다. 국고를 다시 채우지 못하면 개혁은 없다. 새 나라 새 왕조도 없다. 고구려의 부활도 없다. 백성들의 기쁨과 찬양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