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그거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기회가, 위기인 거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뭇 만화의 캐릭터들처럼

나도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공부도 평범하게 했고

운동도 평범하게 했다.

외모는... 우리 부모님 눈엔 특출나게 보였다던데 글쎄다.


취미생활?

<귀멸의 칼날> 유행 이후로 만화 보는 거에 빠졌다.

조금 옛날 만화부터

조금 최신 만화까지.


그뿐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는가.


그저 심심한 마음에

팬픽이나 몇개 끼적인 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것일 테지.



그리고 단 한번의 멍청한 발언으로

평범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윤곽조차 가물가물한 기억의 틈새를 되짚어가면 그날이 있다.


나에게

그 무엇보다 두려운 그날의 기억이 있다.



'영주가...'



이것인가?


아니다. 이게 아니었다.



'연주가...'



이것이었던가?


아니다. 이것도 아니었다.



'염주가... 죽는 건 좀 감동...'



맞다.


이것이었던 것 같다.


깨지고 찢어진 기억의 파편에서

반 친구라는 생물은 무한기차편을 즐겁게 봤던 듯 싶었다.


어쩌면 무한기차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무한열차였던 것도 같다.


흐릿하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젠이... 가 사형이랑...'



당시에는 귀멸의 칼날이라는 만화가 상당히 유행했다.


학교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친구들의 대화에 종종 참가하곤 했다.



'근데 그건... 답답해서...'


'그래도 그 정도면...'


'차라리 나였으면... 그렇게 하기 보다는...'



'였으면' 이 아니라 '였다면' 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 아니라 '이렇게' 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소한 꼼꼼함은

지나온 이 기나긴 세월 속에 녹아 사라졌다.


중요한 점은

나는

나란 멍청이는

지금까지도

몇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희대의 바보짓을

했다는 것.



'뭐야... 얘 갑자기 왜 그래?'


'모르겠... 말하던 ... 중에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고...'


'중2병... 아니야?'


'콜록콜록'


'입에서 피 토하는... 중2병 본 적 있어?'


'컥...'



지금으로서는

심증 뿐이지만 확신한다.


나였으면 어쩌고 하던 그 건방짐에

천벌이 내린 것이다.



'몸이 다시 편안... 하다.

나... 은 건가. 아니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내 수난이

이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죽은 ... 겠지. 넌 죽어서 저승으로 온 거다.'


'나...? 죽어...?'


'그래. 소... 어... 에 잘 왔다. 꼬맹이...'



죽고 새로운 세계에,

내가 봤던 어느 다른 만화에 들어온 것이었다.


귀신과 싸우는 만화.

조금은 옛날 만화.


이름조차 기억 나지 않는,

그러나 내게는 한없이 특별했던 세계였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특별했냐고 묻는다면

우선은 힘을 꼽을 것이다.


그 세계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그 세계에서 나는 수련했다.


그세계의 힘을 수련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너... 실력 많이 늘었네.'



그리고 추억을 얻었다.


존경하던 분의 담백한 칭찬은

한 그루 묘목에 떨어지는 단비와 같아

하룻밤 피곤함 따윈 날려버리고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긴긴 시간 속에서 그나마 선명하게 기억되는 추억을.



'잘하네. 곧 있으면 나보다 강해지겠다.'


'하계에? 같이 가자고? 놀러가는 줄 아니?'


'너, 은근 귀엽다?'



즐거웠다.


더없이 즐거웠다.


스승님은 아름다우셨고

강하셨고

상냥하셨고

사근사근하셨고

목소리도 예뻤고

순수하셨고...


모르겠다.


더 많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럼, 사귈... 까?'



우린 힘들게 사귀었고



'얘! 얘 정신차려!'



곧장 사별했다.


내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연애 시작하고 겨우 하루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슬픈 첫사랑이었다.



'이곳은...?'



죽은 줄 알았던 내 앞에는 두번째 이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은 온데간데 없었고

마을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초능력을 써댔다.


초능력자들이 즐비한,

그런 세계에서 학교를 다니는 주인공을 다루는 만화였다.


스승님은 없다. 이곳은 다른 세계이다.


절망에 몇달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하나 인간은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아저씨 여기... 사과 한알 얼마...?'



굶어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과일 가게 하나에 기어가다시피하여 물었다.


가게 주인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 씨.'



목이 쉬어라 불렀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몰랐다.


내가 아니라 아저씨가.


아저씨는 몰랐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아저씨의 눈 앞에서 춤을 추어도, 노래를 불러도 인식하지 못했다.


뺨을 때리거나 주먹질을 하면 아파하긴 했지만

그것이 나로 인한 것이라는 인식은 못했다.


아저씨 뿐만이 아니라 그 세계의 모두에게 그랬다.


나는

그 세계에서

투명인간이었다.



'콰앙'


'컥... 또야...'



다시 죽었다.


폭탄의 여파에 의해 죽었다.


두번째 죽음은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여긴... 설마 또...?'



그리고 다시 깨어났다.


이번에는 거인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였다.


만화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여보세요. 나 안 보여요? 여보세요!'



이번에도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세계에서도 나는 외톨이였다.



'케헥...'



다시 죽었다.


괴물이 무너뜨린 건물의 잔해였다.



'어째서...'



주황머리 주인공이 배구를 하는 만화였다.



'날 봐...'



네번째에 이르러, 나는 알아버렸다.



'날 보란 말이야.'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다.



'내가 여기 있어.'



어디를 가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을 걸 수 없다.



'왜 내 얘기를 듣지 못하는 거야!'



말을 나눌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살아있다고!'



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제발, 뭐가 문제인 건데...'



나 뿐이었다.




희망을 찾다 포기한 나의 칼은

심장에 구멍을 내어버렸고

다섯번째는 촉수괴물이 선생님을 하는 세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곳에도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섯번째

주인공이 해적왕을 노리는 만화였다.

역시, 외톨이였다.



일곱번째

고아원의 아이들이 괴물의 양식인 세계였다.

다를 바 없었다.



여덟번째

외계인이 무협을 하는 세계.

이번에도 똑같았다.



아홉번째

닌자들이 나오는 세계.

똑같았다.



열번째

연금술사들의 세계.

똑같았.


열한번째

스파이의 가짜 가족 세계

똑같.


열두번째

로봇이 드릴을 돌리는

똑.


열세번째

성기사가

.


열네번째

용사가


열다섯번째

괴물


열여섯번째

열일곱번째

열여덟번째


스무번째

서른번째

마흔번째


백번째

천번째

...



죽고 또 죽었으며

환생하고 또 환생했으며

외톨이였고 또 외톨이였다.


죽고 싶었다.

그만 죽고 싶었다.

다시는 환생하고 싶지 않았다.


묻고 싶었다.

수없이 물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야.

제발 누가 좀 알려줘.

다시는 안 그럴게.


하늘을 향해 빌었고

땅을 향해 빌었다.


손이 발이 되게 빌었고

눈물이 바다가 되게 울었다.



'한명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대화... 대화란 걸 하게 해줘. 제발...'


그리고

귀멸의 칼날의 세계에

일찍이 가장 좋아했던 만화에

기어이 그 세계에

떨어지고 말았다.


'안녕. 너도 오니니?'


명랑한 외모의

여자아이였다.


긴 어둠에 나비처럼 내려온

잠깐의 빛이었다.



*


귀멸의 칼날 대회용 연작 1화인데 피드백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