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까 인류가 멸망해있었다.


그냥 그게 다다. 뭐 더 할 말이 없다. 그냥 아침에 기분 좋게 햇살 받으면서 일어나보니까 멸망해있었다.


흔히 멸망이라고들 하면, 꼭 사람들은 이상하게 거창한 걸 떠올린다. 좀비라든지 외계인 침공이라든지, 아니면 불타오르는 대지와 시끄럽게 폭발하는 화산, 하늘에서는 불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내가 멸망을 방금 당해봐서 좀 아는데 멸망은 그런 게 아니다. 멸망은 뜨겁다기보다는 싸늘하고 요란하기보다는 슬그머니 찾아온다.


피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며, 결과도 사실 뜨뜻미지근한 편이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글을 보는 재주만 있지 쓰는 재주가 없는 나에게 이와 같은 일기를 쓰는 일은 참으로 귀찮고 또 거슬리는 일이다.


그래, 그게 좋겠다. 나는 이 인류 멸망 방식을 "증발"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인류는 "증발"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부터 찾았다. 없길래 밖으로 뛰쳐나가서 온 단지 초인종을 다 누르고 다녔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어제 보다 만 소설을 좀 더 본 뒤 오토바이를 타고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며 누구 없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대답이 없었으므로, 지금 상황은 나만 빼고 세상 사람들이 다 없어졌든지, 아니면 온 세상 사람들이 짜고 나를 왕따시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픈 상황이긴 매한가지이고, 어느 쪽이든 나는 혼자라는 사실이 확실하다.


사실 첫 번째 것이 훨씬 지금 상황에 가깝게 생각되지만,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첫 번째 것보다는 두 번째 것이 더 현실성 있고 더 말이 되는 것 같아서 인지부조화가 왔다.


그렇다면 어쩌면 세상이 망한 게 아니고 내 인생이 망한 것은 아닐까? 그러게 평소에 대인관계나 잘 관리하지, 집에 틀어박혀서 웹소설이나 보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혼자다. 그럼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왕따시키고 있는 것인가? 나는 병신인가?


...아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병신이 아니기 때문에(혹은 병신이 아니고 싶기 때문에) 그냥 세상 사람들이 모두 증발하고 인류가 멸망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쯤에서 자기소개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반갑다, 미래의 고고학자여, 내 이름은 탄이다. 외자 이름이다.


성씨가 방씨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아니고, 그 흔한 김씨나 박씨나 이씨도 아니고, 한씨다.


대체 부모님은 내 이름을 왜 그렇게 지으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뭐 흔한 이름인 하준이, 민준이, 아니면 특이하게 짓고 싶으면 독자라든지 금태양이라든지 엘리자베스라든지 뭐 많지 않은가.


내가 친구가 없는 건 다 내 이름 탓이다. 그리고 너무 재미있는 소설도. 너무 재밌는 웹소설들을 보느라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못 했으니 그 작가들은 나한테 배상 좀 해야 한다. "관계훼손죄"라든지 아니면 뭐 "소설을너무재밌게써서사람시간낭비시킨죄"라든지 그런 걸로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차피 그동안 다른 사람과 교류도 하지 않고 방에서 웹소설이나 읽고 있었으니, 별로 문제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 보자, 이런 내용의 웹소설이 있었나? 아, 그러면 혹시 내가 소설 주인공처럼 아포칼립스물에 빙의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두 시간 동안 상태창 나오라고 허공에 대고 소리지르고 다녔다. 나오지 않았고 나는 내가 소설에 빙의한 게 아니든지, 아니면 주인공은 따로 있고 나는 엑스트라이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빙의한 사람이 엑스트라인 아포칼립스 소설이라니... 이건 귀하네요. 그게 아니면 진짜로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증발해 버렸다는 건데 그것보다는 내가 소설에 들어갔다는 편이 더 말이 될 것 같다. 사람 하나를 책 속으로 던지는 게, 사람 70억명을 없애는 것보다는 쉽지 않을까?


잡담은 이쯤해 두자. 영양가 없는 잡소리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오늘 하루 종일 고찰을 해 보건대, 사람이 모두 없어진 게 맞다면, 나에겐 엄청나게 큰 재앙이 닥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있는 소설들의 작가들도 모두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이런 젠장,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나는 이 대재앙을 체감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었다!


내가 보던 소설들이 전부! 한 편도 남김없이 전부! 몽땅 다 연중해버린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 좀 더 진지해지자면, 상술한 대로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증발했으므로, 내가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버렸다. 앞으로 나는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수도,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실 수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도 없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다 안 하던 것들이다. 다행이다. 난 방에서 소설만 봤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전기 문제다. 나는 발전기가 사람 없이 얼마나 돌아갈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영원히는 아닐 것이다. 조만간 전기는 끊길 것이고 세상은 어둠 속에 빠져들 것이다.


전기가 끊기는 상황을 생각해 보니 문제가 좀 더 생긴다. 모든 집의 냉장고가 다 정지할 것이다. 집만이 아니라 모든 마트, 슈퍼마켓, 백화점, 식당의 냉장고가 다 정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온 도시에서 썩은내가 진동할 것이고, 바퀴벌레, 파리, 쥐, 고블린 같은 유해조수들이 들끓기 시작하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고는, 혹시나 내 생각보다 전기가 빨리 끊겨 상하기 전에 우유와 요구르트부터 부지런히 먹어 치웠다.


그리고 나름대로 계획도 몇 가지 세웠다. 어쩌면 지금 지구 서버 점검 중이라서 오류가 좀 난 것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나는 앞으로 3일간 기다릴 것이다. 인류증발 3일차가 되었는데도 세상에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나는 모든 법과 규범을 무시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혹시 몰라서 재밌게 보던 소설을 다운받아 소장한 다음, 종이로 인쇄했다. 전기가 완전히 끊기면 컴퓨터와 휴대폰도 무용지물이 되니까. 그리고 펀치로 구멍을 뚫고 고리로 묶었다.


결말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 전 부분의 내용만이라도 봐야겠다는 심정. 그렇게 다운받은 소설은 무려 14편, 3,472화나 되었다. 고리로 묶어 쌓아놓고 보니 높이가 1미터를 상회하길래 기겁했다.


아마 이 "인류증발" 상태가 이어진다면, 앞으로 서점과 도서관을 털어서 종이책을 주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행히 본인은 종이책이건 웹소설이건 가리지 않고 잘 먹으므로 좀벌레나 곰팡이로부터 책을 잘 지키면 별 걱정은 없을 것이다.


몇 가지 더 고민해봐야 하겠는데... 예를 들어, 상술한 대로 음식들이 썩기 시작하면 바퀴벌레나 고블린 같은 유해조수들이 모여들 것이고, 특히 모기, 파리, 쥐새끼 등은 나에게 병을 옮길 것이다. 페스트로 방에서 소설 껴안고 뒈지고 싶지 않으면 도시를 떠나야 할 것 같다.


도시를 떠나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그것도 또 나름 문제다. 아포칼립스물들을 생각하면 시골로 가야 할 것 같긴 한데 시골에 내가 지낼 만한 집이 존재할까? 실수로 석면으로 지은 집에 기어들어갔다가는 이세계로 환생하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판국이니까: 나는 그냥 내일 아침에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겠다.





* 2화없음 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