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탁에 앉아 있던 용사들 중, 마왕군을 믿고 있던 용사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왕군이 벌써 항복했다니!"


마왕군은 반정부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최소한 백만 이상의 마병과 수천 기의 네필림, 수백 마리의 붉은 드래곤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그 드래곤 하나하나, 네필림 하나하나가 용사 한 명을 패배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전력이었다. 이제까지 용사와 마왕이 싸우고 있을 때만 해도 무수한 용사들이 그 마왕군 앞에서 쓰러져갔는데. 수백 수천 개의 용사 파티가 그 마왕성 앞에 백골로 널브러졌는데.


그런 마왕군이 벌써 신정부군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붉은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왕군은 3천 기의 네필림과 116만 명의 마병을 동원했지만 고작 1만 2천의 신정부군에게 거의 전멸을 당했답니다. 마왕 아스카리온은 백기투항했고, 이제 이곳 노을의 산맥으로 신정부군이 진격하고 있습니다."


노을의 산맥. 이곳은 이제까지의 2,000년 동안 용사들이 수련해온 장소다. 그리고 지금은 반정부군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괜찮아. 신정부군의 해군은 배가 몇 척이라고?"


"5척이 있다고 했습니다."


"노을의 산맥으로 들어오려면 코카서스 항구를 뚫어야 한다. 코카서스 항구에는 최소한 300척 이상의 반정부군 해군이 있어. 게다가 그 해군을 지휘하는 인물은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카핀스키 대마법사이시다. 300대 5면 해볼 만 할 거야."


용사들을 지휘하는 인물이자, 마왕군이 쓰러진 지금 반정부군 거의 전체를 통솔하는 용사 카탈트는 젊지만 전쟁에서만큼은 노련했다. 구 제국에 마왕 아스카리온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마왕성 깊숙히 들어간 용사는 단 둘뿐이라고 했다. 카탈트는 그중 하나였다.


"성녀께서는 뭘 하고 계신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 밧줄 앞에, 10대로 보이는 어린 성녀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카탈트가 걸어들어왔다.


"에지아, 신께서는 뭐라고 하시지?"


"잘... 나도 잘 모르겠어. 신의 목소리가 안 들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그건 불길한 징조인데."


카탈트가 한숨을 쉬며 베란다 발코니에 섰다. 하늘은 화창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바람이 없으니 신정부군의 해군도 돛을 올리기 힘들겠지. 그럼 적어도 내일까지는 항구가 안전하겠군."


그 순간 항구 방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카탈트가 발코니 난간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이런 제기랄, 뭐야!"


거의 10km 가까이 떨어진 이곳 노을의 산맥에서도 굉음이 들렸다. 쾅! 쾅! 쾅! 하는 소름끼치는 포성이 수평선에서 일었고, 이어서 펑! 펑! 펑! 하는 끔찍한 폭음이 항구 전체를 뒤덮었다.


한때 제국의 광대한 바다를 수호했던 전열함들이 필사적으로 수십 문의 대포를 쏘아댔지만 포성만 일고 폭음은 나지 않았다. 전열함의 포가 맞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쏘고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수평선 건너편에서 발사하는 신정부군의 포탄은 한 발만 맞아도 전열함과 갤리온들을 완전히 수백수천 개의 조각으로 분해해버렸다.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다. 대마법사 카핀스키가 반격하는 것이다. 해전에서 가장 잘 쓰이는 마법은 이 워터스파우트 마법과 라이트닝 마법이니까.


그리고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수평선 너머에 있던 그 신정부군의 군함이 어렴풋하게 그 실루엣을 보였다. 그 군함은 길이가 웬만한 전열함의 네다섯 배는 되어 보였고, 무게는 그 어떤 전열함보다도 20배는 거뜬하게 나가 보였다.


군함의 측면에 일렬로 배치된 게 아니라 3연장 포탑에 올라가 있는 9문의 거대한 함포는 그 구경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으며, 돛 대신 함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거대한 굴뚝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 배는 바다의 소용돌이와 천둥번개를 맞아 주면서 진격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열함이었다면 진작 함대째로 가라앉고도 남았을 폭풍우를 맞으면서도 흠집 하나 나지 않고 거침없이 움직여왔다.


카탈트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밖에 있는가!"


병정이 뛰어들어와서 경례했다. 카탈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면서 외쳤다.


"당장 전군 전투 준비하라. 적들이 오늘 밤에 코카서스 항구를 점령한다면, 적어도 내일 오후에는 이곳 노을의 산맥에 도달한다!"


"예!"


병정이 급히 뛰어나갔다. 에지아가 쓸쓸한 표정으로 계속 기도에 매진했다.


카탈트가 에지아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신과 접신하게 되면 꼭 신께 물어봐 줘.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겠느냐고."


그러자 에지아가 슬픈 눈을 치켜뜨면서 카탈트를 보고 말했다.


"그걸... 물어봐야 알겠어?"


카탈트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한숨을 쉬고 계속 말했다.


"싸우겠다는 사람 힘빠지게 하고 싶진 않은데, 카탈트, 누가 봐도 이건 못 이겨. 마왕군 백만이 고작 신정부군 1만 명 앞에 쓰러졌어. 우리 머릿수는 3만도 안 돼. 용사들도 이제 23명밖에 남지 않았어."


"항복은 없어!"


카탈트가 못을 박고 걸아나갔다. 그러자 에지아가 카탈트의 뒤통수에 대고 염장을 질렀다.


"레파이스 때문이야?"


카탈트가 쥐고 있던 검을 그대로 휘둘러 에지아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그가 격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 개새끼의 이름을 내 앞에서 언급하지 말라 했는데!"


"한때 너하고 같이 마왕 아스카리온의 얼굴을 본 유이한 용사야. 제국에서 가장 현명한 용사이기도 했어."


"그 새끼는 배신자야! 우리 용사들을 배신하고 신정부에 붙어 장령직을 얻어먹고 있는 새끼라고!"


"바로 그래서, 도저히 레파이스를 용서할 수 없어서, 지금 네가 신정부군에 대한 항복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레파이스에 대한 분노 때문에! 복수심 때문에!"


"닥쳐!"


카탈트가 돌아섰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 개새끼의 이름을 내 앞에서 운운하지 마라. 그럼 그때는 아무리 너라도 벨 거니까."


그가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에지아가 열린 문을 쓸쓸하게 쳐다보았다.


"성격도 참 고집스럽다니까..."


에지아가 다시 기도하려던 찰나, 임시 신전의 천장이 박살나고 큼지막한 원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에지아가 그걸 보고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원통이 폭발했다. 에지아는 그 폭발과 함께 덧없는 비명을 지르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 광경이 온 노을의 산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4발 프로펠러 엔진을 가진 초거대 신정부군 폭격기들이 네이팜탄을 산맥 전체에 퍼붓고 있었다.


"으아아악!"


어린 용사 한 명이 불붙은 채로 땅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카탈트가 그 어린 용사에게 급히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이미 그 용사는 강렬한 열에 온몸의 수분을 빼앗기고 미라처럼 굳어 죽어 있었다.


카탈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천지가 다 죽음, 죽음, 죽음이다. 폭격이 시작된 지 1분도 안 되어 온 산맥이 불길에 휘말렸고 나무, 집, 무기고 할 것 없이 모두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체 타는 냄새가 산 전체를 자욱하게 매웠다. 열기에 고통받던 한 용사가 급히 산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일제히 그 강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에 나오는 쥐 떼 같았다.


그리고 이어서 강 주변으로 불길이 치솟으며 강물이 끓어올랐다.






다음날 아침, 땅속에서 콜록거리며 카탈트가 기어 나왔다. 폐허가 된 노을의 산맥 곳곳에서, 재투성이가 된 용사들과 병사들이 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산을 덮고 있던 푸르른 숲은 완전히 앙상한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곳곳에 불길에 쪼여 미라처럼 굳어버린 병사와 용사들이 나뒹굴었다.


간밤에 끓어오른 강은 역겨운 냄새를 풍겼고, 강물에는 삶겨져 죽은 시체 수천 구가 둥둥 떠다녔다. 지옥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카탈트는 생각했다.


하늘로 신정부군의 전투기 편대가 날고 있었다. 아마도 정찰 목적으로 온 것이겠지.


그가 문득 뭔가가 생각나, 급하게 달려서 신전으로 향했다. 완전히 불타 잿더미가 된 신전 안에, 미라처럼 굳어 버린 에지아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카탈트가 에지아의 시체를 붙들고 절규했다.


"레파이스, 이 빌어먹을 놈아!"


그 때, 뒤에서 재투성이가 된 병정 한 명이 달려와 보고했다.


"용사님, 신정부군입니다! 어림잡아 5,000명은 되어 보이고, 지금 노을의 산맥 바깥쪽에 진을 친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탈트가 검을 짚고 일어나면서 격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은 용사와 병사는 몇이나 되나?"


"용사분들은 카탈트 용사대장님을 비롯해 10분 남으셨고, 병사는 7천 명 정도 남았습니다."


"대기시키게."






그리고 그날 정오, 노을의 산맥 앞 벌판에서 10명의 용사와 7,000명의 병사들이 신정부군 앞에 정렬했다. 용사 미워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어떡할 생각이지? 카탈트, 저놈들을 다 쓸어버려도 적들은 계속 몰려올 거야."


"그럼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야겠나?"


카탈트가 검집을 꽉 움켜쥐면서 말했다.


"철갑기병들은 돌격하여 적들의 진형에 돌파구를 내라! 우리 용사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병사들은 우리 용사들을 따르라!"


곧 기사들이 일제히 랜스 차징을 시작했다. 그러자 신정부군 병사들이 일제히 볼트액션 소총을 들어올리더니, 그 기사들이 반도 오기 전에 모조리 쏴서 거꾸러뜨려 버렸다.


아직 진격조차 하지 않은 용사들이 그대로 겁을 집어먹고 발을 떼지 못했다. 카탈트도 놀라서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철갑을 두른 기사들은 화살이나 드래곤의 불결조차 막아내는데, 고작 저까짓 쇳조각 따위가 그 철갑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리다니.


하지만 카탈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검을 뽑았다. 용사들이 그를 보고 용기를 얻어 일제히 검을 빼어들었다. 카탈트가 소리쳤다.


"돌격하라아아!!!"


"와아아아아아!!!!!"


용사들이 검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병사들이 마치 물결처럼 쏟아져 나갔다. 그러자 신정부군은 볼트액션 소총을 거두고 대포 비슷한 것을 꺼내들었다.


신정부군의 뒤쪽에서 달려오는 반정부군을 바라보던 한 장교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명찰에는 "레파이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지휘봉을 뻗으면서 지시했다.


"격발!"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섬뜩하리만치 기계적인 기관총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몰려오던 반정부군이 태풍 맞은 보리밭 이삭들처럼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횟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나는 그 두두두 소리가 날 때마다, 그 총구에서 뿜어져 나간 탄환 한 발 한 발이 죽음으로 변해 반정부군의 몸을 뚫어버렸다.


순식간에 용사 다섯이 죽고 셋이 다쳤다. 병사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용맹한 카탈트도 기관총 앞에 가 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카탈트가 옆구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그가 입고 있던 그 제국에서 가장 견고한 카이버 갑옷조차도 기관총탄 앞에 종잇장처럼 뚫리고 말았다. 장교가 지휘봉을 들며 말했다.


"사격 중지!"


기관총들이 사격을 멈췄다.


대체 몇 초나 걸렸을까? 30초? 40초? 그 시간 동안 7,000명에 이르던 반정부군은 30명도 안 남았다. 카탈트가 옆구리를 움켜잡고 비명을 지르면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병사들이 그에게 소총을 겨누었다. 장교가 큰 소리로 명령했다.


"쏘지 마라!"


병사들이 소총을 거두었다. 장교가 진형을 뚫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카탈트가 피를 토하면서 소리질렀다.


"레파이스! 이 비열하고 비겁한 배신자!"


"카탈트. 그러게 내가 신정부에 가담하자고 했을 때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아."


"진정한 용사는 단 한 명의 주군만을 섬긴다! 단 한 명의 황제! 단 하나의 제국만을!"


"더 이상 제국은 없어! 황제도 없어! 오로지 우리 공화국과 대통령 각하만이 계신다!"


레파이스가 그렇게 쏘아붙이고 천천히 카탈트에게 다가왔다. 카탈트가 검을 간신히 고쳐 잡고 소리쳤다.


"용사의 상징인 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그 용사의 검! 대체 어디다 갖다 버린 것이냐!"


그 말대로 레파이스의 허리에는 검 따위 채워져 있지 않았다. 그의 허리에는 권총집과, 콜트 45구경 권총만이 매달려 있었다.


"카탈트, 이제 낭만의 시대는 끝났어. 마법사와 용사의 시대도 끝났어. 지금부터는 기술의 시대야. 근대화의 시대고,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국가는 모두 다른 국가에게 잡아먹히는 시대야."


"현실적인 척 하면서 네놈의 배신을 정당화하지 마라! 너는 네 동료들을, 용사들을 죽였어! 저기를 봐! 너 때문에...!"


"세상이 바뀌고 있어, 카탈트."


레파이스가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간신히 주저앉아 있던 카탈트의 이마에 그 권총의 총구를 댔다.


"그럼 우리도 바뀌어야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있을 거야."


"닥쳐, 이 배신자!"


카탈트가 검을 들고 레파이스를 베어버리려는 순간, 레파이스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레파이스가 천천히 막사로 들어와 앉았다. 그가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노을의 산맥은 구시대적인 이름이다. 이벨렌스 산맥으로 이름을 고치도록."


"알겠습니다."


레파이스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병사에게 명령했다.


"카탈트의 시신을 잘 묻어줘라. 비록 적이었지만 용맹했다."


"예."


병사가 밖으로 나갔다. 레파이스가 벽에 걸린 검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그럼 우리도 바뀌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