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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뒷 글로 한 번 써 봄.  최대한 비슷한 스타일로.


 툭툭 살갖에 묻어 내려가는 빗방울은 그대로 늘어지며 남자의 회색 피부 위를 뒤덮는듯 싶었다. 


쏟아지는 폭우. 삐걱 삐걱, 접합부위에 물이 잔뜩 들어 차 연결부가 닿을 때 마다 빗소리를 뚫고 귀에 충분히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비가 그렇게 하늘이 갈라지듯 쏟아짐에도 굳이,  바깥으로 나아가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자가 바라 보는 방향에는, 잔뜩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이 아니더라도 누구하나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오는 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길게 난 그 정문에서 그 흐려진 길을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곳에서 올, 한 소녀를. 언젠가 그곳에서 터덜터덜, 녹이 슨 갑옷을 입고 찾아 올 것이었다. 자신을 처단하기 위한, 인류의 검으로서.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드러난 회색의 피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이 잔뜩 찬, 갑옷을 입은 이 남자의 정체는 인세의 악행이 한대 모여 세상에 현현한 악의 재림, 마왕.  


 남자는 마왕으로서, 스스로를 만든 인류를 대표하여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 오는 용사를 상대 하고자 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방향을 보는 그의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공허했다. 의문 투성이 였던 자신의 존재 의의. 죄사함을 목적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살막이 하기 위해  떠밀려 온 부모의 양녀들.  그들과의 끊임없는 싸움. 


 스스로 정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타인의 욕망에 의해 이어진 이 장대하고 지루한 선과 악의 혈투 속에서 남자에게 남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었다. 


 상대하는, 건너편의 소녀 또한 자신과 하등 다를 빠 없는 존재였을테니까.


 누구의 뜻인지 누구의 의지인지도 모른채 태어났다. 그저 정해진 운명이랍시고 자리에 서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이를 향해 온 힘을 

다 했다. 어깨를 누르는 그 힘을 빼내어들고,  남의 뜻을 위해 목숨을바쳐 싸웠다.


 색깔만 다를 뿐, 소녀는 그와는 데칼코마니였다. 흰색 종이에 칠해진 잉크를 접으면 나머지 반이 그대로 번져 나오듯이.



 하지만 연민과, 동정심을 품을 뿐. 그렇다고 소녀들을 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살아 숨쉬니까. 살아서, 다음의 삶을 이어나가고 싶으니까. 모질게도 텅 빈 마음 너머엔 내심 삶의 의지는 남아 있던 것이었으니. 그렇기에 남자는 이미 용사들을 죽인 마왕이고, 괴물로서 세상에 그 악명을 널리 떨치고 있었다.


 

  이번이, 예순 네번째. 


 남자는 정문의 앞에서 비를 맞으며, 자신을 베러 오는 예순 다섯 번째 용사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땅이 떠내려가듯 내리던 비는 그쳤다. 시야를 가리던 빗방울이 사라지자, 먹구름이 가득히 들어 차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야가 서서히 트였다. 그러자 높은 고도에 있는 성문 밑의 낮은 인간의 세상들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비할 바 없는 시력으로

서 눈앞의 세계를 찬찬히 훑어 나갔다.


 처음 성문 쪽에 가깝게 보이는 것은 가파른 비탈길. 구불구불, 산길을 타고 내려가다보면 보이는 것은 푸른 잔디가 지평선 끝까지 깔려 있는 긴 평야. 평야의 사이 사이에는 드문 드문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인간들의 작은 고을들. 또 그 사이 사이를 잇는 길들. 


 길을 따라 말을 달리는 마차꾼들. 큰 등짐을 매고 다니는 짐꾼들. 그들이 오고가는 길의 끝에 서 있는  차가운 돌로 쌓인 푸른 깃발의 성 하나.


 그것은 아마도 저 인간 세계의 심장부겠지. 또 자신을 척결하기 위한 꼭두각시들을 이 비탈길 위로 보내는 사람들의 보루일 것이었고.  남자는 아마도  예순 다섯번째 또한, 그곳을 통하여 이 비탈길 위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


 말 없이 성 밑을 내려보던 남자의 눈에,  한대의 마차가 들어왔다. 특별한 부분이 없는, 주변을 오고 가는 평범하디 평범한 한대의 마차. 마차 안에는 후드를 눌러 쓴 소녀와, 마부 하나가 타고 있었다.


 아직은 성 문을 나온지 얼마 안되었고 앞에 서 있는 수많은 고을들이 남아있었지만,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예순 다섯번쨰임을 눈치챘다.




 예상대로, 소녀를 태운 짐마차는 고을과 고을을 넘어가며 서서히 자신의 방향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마부의 표정은 고을을 넘어 비탈길에 가까워 질 수록 어두워지는듯 싶었다.


 남자는 그를 이해했다. 


 두렵겠지. 소문으로 아마 자신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그들에게 원색적인 공포로서 자리매김 했을 것이 뻔했기에. 이곳으로, 평범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온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목숨을 건 것과 진배 없을 것이었을테니까. 


 후드를 뒤집어 쓴 소녀의 얼굴에는 마부보단 좀 더 복잡한 표정들이 엿보였다. 전체적으론 눈이 반쯤 감긴 피곤한 표정. 살짝 살짝 드러난 눈매에선  수많은 임무 속에서 쌓인 지독한 고독과 자신을 짓누르는 고매한 의무감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  비탈길을 

넘어 성문앞에 도착했던 예순 네명의 소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소녀는 그렇게 몸집만큼 큰 칼을 껴앉고 쪼그려 앉아, 끊임없이 고심하며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툭 툭, 그친 빗방울은 다시금 하늘에서 조금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시야가 가려질때 쯔음, 마차는 비탈길의 앞까지 도착했다. 마부는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내린 소녀를 바라보았고, 소녀는 말 없이 마부를 힐끔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듯, 잠깐 서로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던 두 사람의 적막은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어 인삿말을 건내는 소녀의 모습으로 다시 지나갔다.


 마차는 말을 돌려 지나 온 길을 통해 나아갔고, 소녀는 저벅저벅 비탈길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비탈길에 소녀가 오르기 시작하자,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다시 거짓말처럼 그쳤다.



 걸어올라오는 소녀를 바라보며 남자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이 무려 예순 하고도 다섯번째의 일이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이것이 전혀 익숙치 않았다. 숙명이고, 자신이 만들어진 어떤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서도 남자에게 여전히 이 싸움은 의문 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싸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악의로서 잉태된 자신은 누구의 죄악인가? 죄악으로 잉태된 자신의 잘못은 어떤 것에 물을 수 있는 것인가?


 또, 악을 뒤집어쓰고 여기서 최후를 맞이한다 할 지라도 인간의 죄악은또 다른 마왕으로서 현현할 것인데 대저 스스로의 악을 대신 물려 처단한다는 행위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것인가?  선의를 대신하여, 악을 물리친다는 명분 하에 잔혹한 운명의 양 끝단에 서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 나가는 소녀의 운명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위한 정의인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었지만, 그와 그녀 누구도 알지 못하는듯 싶었다. 물어간 질문의 대답은 언제나 날아오는 칼의 

예기와 눈이 부시게 빛이 나는 영기 뿐. 아마도 그 질문은 남자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질문으로 남아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소녀 또한 그의 데칼코마니.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을 품고 태어난 사람일진데, 그가 모르는걸 그녀가 알고

있을리가.



 "......"


 힙겹게 비탈길을 올라 온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감길듯, 말듯한 졸린 눈. 피곤함이 잔뜩 서린 듯한 초췌한 모습. 어떤 결말이던 빨리 끝내달라 비명을 지르는듯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풀리지 않을 질문은 질문으로 남겨 두기로 하고 허리춤에 맨 검을 뽑았다. 스르릉, 칼은 소리를 내며 칼집을 밀어내고 검은 나신을 세상바깥으로 드러냈다.


"......"


 그리하여, 검을 쥔 남자, 마왕 바르바토스는 질문들로만 가득한 이 숙명적인 싸움을 이어 나가기 위해 소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