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다행히 트럭은 안 오네.'
오전 8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창빈이가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도중에도 시도때도없이 나타났던 트럭을 생각하며 창빈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빈이는 정동병이라는 아저씨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날은 그 때로부터 3일이 지나있었다.
'너도 두고 봐라. 이제 다른 수를 써줄 테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환생을 원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분명 환생을 갈망하게 만들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창빈이는 그 아저씨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이 창빈이를 더욱 더 불안하게 했다.

창빈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에 들어갔다. 바로 주방에 들어가 주방보조를 했다. 창빈이는 정동병이라는 자가 언제 무엇을 할 지 몰라 불길했으나 일단은 그 불길함을 생각 밖으로 밀어두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불길함은 얼마 가지 않아 드디어 현실로 다가왔다. 그 때는 일이 거의 끝나갈 때 쯤 점장님이 창빈이에게 말을 걸었을 때였다.
"저기... 아무래도 너 앞으로 아르바이트 못 나올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창빈이가 드디어 천계가 장난질을 쳤구나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프랜차이즈 체인점잖아.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생겨서 구조조정 들어갔어."
"대체 어째서...?"
"본점 직원이 애를 폭행했다나 뭐라나. 본점에서는 계속 부인하고 있긴 한데 사람들이 그걸 믿을 리가 없지. 그래서 이미지 실추되고 영업 이익 반토막 났어."
창빈이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정동병이 한 말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환생을 거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창빈이는 결국 조금 불만을 토로하다 수긍하고 이내 식당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점장님이 원래는 월급날에 줘야했던 급료를 그날 주면서 안쓰러워해했다. 창빈이는 별 말 없이 돈을 받고 식당을 나왔다.
창빈이는 이 모든 게 정동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합리화했다.

창빈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알바처인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여느 때와 같이 감자를 튀기고 주문을 받았다. 프랜차이즈 식당에서의 일이 신경쓰이고 걱정되어 설마 여기서도 잘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근심이 들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잡은 것은 일이 다 끝나고 나갈 때 점장님이 창빈이랑 또다른 아르바이트생인 배하원을 따로 불렀을 때였다.
창빈이가 그곳에서 본 점장님은 그들을 매우 가여워하는 표정이었다. 창빈이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점장님이 미안해하며 겨우 입을 떼었을 때, 창빈이는 그것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아무래도 너희들 당분간 아르바이트 못 나올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에요?"
창빈이가 천계가 여기도 손을 쓴 건가 하고 남몰래 이를 갈며 말했다.
"이쪽 상권이 망해서 우리 가게가 닫을 예정이야. 수익이 안 나니까 본사에서 그만 두라고 한 거지."
창빈이는 어느 정도 대비한 일이었고 두번째로 일어나는 일인지라 정신적인 충격이 적었다. 손님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눈치를 챈 바였고, 천계가 비슷한 일을 또 저질렀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 또한 짐작한 바였다. 그러나 또다른 아르바이트생 배하원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가 힘들게 얻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어진다는 말이었다.
"아니, 그래도..."
하원이가 따지려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미안하다. 본사의 지시라 어쩔 수가 없어. 그래도 나중에라도 폐점이 취소되면 다시 고용해줄게."
"그래도..."
"이번 달 월급은 지금 줄게. 미안하다."
창빈이는 별 반항 없이 그것을 받고 가게를 나섰다. 창빈이의 등 뒤로 점장님에게 매달리는 하원이의 소리가 들렸다. 창빈이가 그것을 듣자하니 천계를 향한 분노가 솟아올라 정동병에게 따질 준비를 하며 이를 갈았다. 마침 그 패스트푸드점이 정동병이 자꾸 트럭을 몰고 나타나던 그곳과 가까이에 있어서 짜증이 더 밀려왔다.

창빈이가 그곳을 나설 때 쯤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2개 남은 알바처 중 하나인 편의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창빈이는 설마설마하면서 전화를 받았으나 역시 해고통보였다. 패스트푸드점과 똑같이 상권 악화로 인해 점포가 폐점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창빈이는 역시 천계의 짓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환생 안 하겠다고 확고한 의견을 고집하는 게 그리 달못된 일이던가? 그리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했는가?
창빈이는 천계에 분노했다. 이렇게까지 하원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을 환생시키려는 천계에 분개했다. 창빈이는 그런 기분에 하마타면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릴 뻔 했다.

창빈이는 속으로 천계를 끝없이 욕하며 분노를 삭였다. 그리고 갈 곳도 없겠다, 채빈이가 있는 병실에 가서 시간이나 보내다고 생각했다. 지금 갈 곳은 이곳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 병상의 아저씨가 누워 있는 곳에는 언제 왔는지 여자아이 두 명이 병문안을 와있었다. 한 명은 그를 자주 방문하는 그 아저씨의 딸이었다. 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는데 매우 외향적이었고, 이름은 최씨라는 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또 한명은 처음 보는 애였는데, 아마 지난주인가 지지난주인가에 왔던 전학생이었던 것 같았다. 그 전학생도 외향적이라 아저씨의 딸이랑 금세 친해졌던 것이 생각났다. 그들은 수다를 떨다가 창빈이가 오자 말을 멈추더니 다시 수다를 재개했다. 대화를 보아하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했던 것 같았다. 창빈이에게는 멀고도 먼 세상이었다.

그 장면을 대충 흘겨보고 창빈이는 보호자 전용 의자에 앉았다. 채빈이의 얼굴을 보니 창빈이의 화가 금방 풀렸다. 그래서 평온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잔잔히 모든 사정을 토로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나 싶어 천계가 밉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옆에 있는 침대에서는 조금 수군거리다가 창빈이가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나갔다. 이제 혼수상태인 아저씨를 제외하면 창빈이와 채빈이 둘 만의 공간이 되어있었다.
이처럼 조용한 때를 노렸을까, 창빈이의 어깨에 손을 짚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동병이었다. 창빈이는 정동병을 보자마자 오늘의 기억이 마구 떠올라 분노를 표출했다.
"아니, 그렇다고 알바하는 곳 죽이는 건 아니지 않아요?"
정동병은 매우 성공적이라는 표정을 짓고는 바로 반박했다.
"거기는 별로 별로 보지 않게 해놨으니까 걔네들은 괜찮아. 너만 손해보는 구조로 만들어놨어."
창빈이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프랜차이즈 식당은 폭행 때문에 이미지 떡락했는데 어떻게 다시 끌어올리겠다는 거죠? 그리고 패스트푸드점이랑 편의점이 있는 상권은요? 거기는 어떻게 할라고요?"
정동병이 대답했다.
"천계에는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지. '행복은 고난에 비례한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창빈이가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서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며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고난을 받으면 나중에 그 고난에 비례해서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걸 받는 곳이 천계이든 이세계든."
"그래서 그 식당은 어떻게 살리려고요?"
정동병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바로 답했다.
"일단 프랜차이즈 식당부터 말할게. 그 폭행, 조작이야. 실제로는 본점 직원이 솔선수범해서 폭행을 막으려 든거지. 거기가 무명 브랜드니까 이번 사건으로 유명세를 키울 수 있을 거고 진실이 밝혀지면 덩달아 이미지도 급상승하겠지. 이로서 '행복은 고난에 비례한다.'는 성립."
"그러면 원래 폭행하려던 사람은 죄없이 불행해지잖아요?"
"그 사람은 원래 옆집인 약국에서 폭행하려고 했었어. 그대로 뒀으면 약사가 죽었을 거였고. 그래서 순찰 중에 발견해서 '마침 잘 됐네.'하고 내가 사고를 조작시켜서 거기로 보낸거지."
"그럼 그쪽 상권은?"
"거기에 조만간 대형마트 하나 박을거야.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면서 상권은 복구되겠지. 애초에 거기가 아파트단지 근처인데, 주변에 큰 가게가 거의 없어서 사람 모으기에는 제격이지."
"그럼 대형마트는 어떻게 박게요?"
"지금 한 대형마트 지점이 경쟁에 시달리다가 다른 곳에 마트를 세우려고 땅을 알아보고 있거든? 지금 폐점공고는 했고 후보지도 좁혀졌으니까 그 사람들 마음을 이쪽으로 끌면 대형마트 박는 거는 식은죽 먹기지."
뭔가 설득력있었다. 정동병의 말이 맞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절대로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이 맞았다. 오히려 계획에 들어가는 모든 것에 축복이 불어지고 있었다. 오직 창빈이만을 제외하면.

"그리고 채빈이에게도 생각보다 피해가 가지 않아. 어쩌면 네가 이번에 한꺼번에 받은 월급으로 입원비를 선불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알바할 시간에 이쪽으로 와서 채빈이랑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 뭐, 그래도 이미 떠난 애를 계속 보살펴봤자 네 손해지만."
창빈이가 정동병의 마지막 말에 기분이 크게 상했다.
"그러면 제가 환생하면 어떻게 되죠?"
"원래는 바로 심장을 정지시킬 생각이었는데, 널 보다보니까 하도 답답해서 네가 남긴 병원비로 생명을 어느정도 유지시켜볼까도 생각중이긴 하다만."
이 말을 듣자 창빈이의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환생하면 채빈이는 죽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창빈이는 자신이 환생한 댓가로 채빈이가 죽은 것에 마음이 무거워질 것임이 필연적이었다.
"그러면 환생 거부합니다."
"왜? 어차피 너는 앞으로 10일 안에 환생할 운명인데?"
"바로 죽일거라 했잖아요. 저 때문에 채빈이가 죽는 거는 절대로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뭘 해주면 환생할거야?"
"채빈이랑 같이 가는 조건이라면 환생 고려해보죠."
"그럼 못 가겠네. 아니, 어차피 가야할 운명이지만."
"어째서 이 방법은 안 된다는 거죠? 천계 쪽이라면 살릴 수도 있지 않나요?"
정동병이 고뇌하다가 말했다.
"천계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 그렇게 알아."
"그러면 무조건 환생 거부합니다."
정동병이 그의 결정에 갑갑해했다.
"하... 말이 도저히 안 통하네. 그리고 지금 말해두겠는데, 지금 기억을 잃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오늘이 환생기한의 딱 절반이니까, 곧 있으면 본격적으로 기억을 잃기 시작할 거다. 외부자극이 없으면 기억도 하지 못할거야. 그래도 환생을 거부할거냐?"
"당연하죠. 뭘 어떻게 한다 하더라도 환생은 거부합니다."
정동병이 말이 안 통한다는 것에 울연한 한숨을 내쉬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정동병이 나가자 창빈이의 속은 시원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기억을 잃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기억을 잃으면 더이상 채빈이를 보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채빈이를 더이상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면 채빈이는 어떻게 될까?
창빈이는 채빈이가 깨어나 기억을 잃은 자신을 볼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자기 자신을 잊었다는 것에 충격을 먹고 우울해질 것이었다.
창빈이는 채빈이가 그렇게 생각하게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복습하고 또 머리에 새겼다. 그녀의 이름, 나이, 병실의 위치, 병원 이름, 생김새 등등... 끝없이 되뇌어도 창빈이에게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