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아르바이트 해고 통보가 연속으로 3개가 날아온 지 이틀이 뒤였다. 환생까지 남은 시간은 총 8일. 환생 가능 시간인 20일의 절반하고도 이틀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 새에도 창빈이에게 하나 남은 알바처에서도 또 하나의 해고 통보가 왔었다. 다른 알바처들과 한참 떨어져있는 대형마트의 주차보조 아르바이트인데, 지부 이전을 사유로 해고되었다.
창빈이는 이번에는 어떻게 자르게 하도록 유도했을까 추측보다가 해당 대형마트의 영업이익이 요즘 부진해 이미 폐점 공고를 내걸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때 창빈이는 깨달았다. 편의점이랑 패스트푸드점 주변에 짓겠다는 대형마트가 이것이라는 것을.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천계에서 아르바이트 해고 외에는 아직 별다른 방침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생각 외로 정동병이 하는 일들은 그 위력이 약했다. 창빈이를 다치게 하려고 해도, 의료사고를 내려고 해도, 또 금전적 피해를 입히려고 해도 누군가는 감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더이상 딱히 다른 일들을 벌이지 않는 것이었다. 창빈이는 이 생각에 미치자 그동안 심해졌던 경계심이 상대적으로 풀어졌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은 아직 여전했다.


창빈이는 오늘도 병실로 들어갔다. 그날은 마침 개교기념일이라 학교가 쉬어서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갔다.
그런데 언제나 같은 풍경을 자랑하던 그 공간에는 웬일인지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서있었고 한 명은 간병자 의자에 앉아있었다. 서있는 사람은 정동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창빈이는 이 사람도 천계에서 왔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창빈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 사람이 일어났다. 나이대는 정동병이랑 비슷했지만 확실히 트럭을 모는 정동병에 비해 피부가 확실히 깨끗해서 동안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채빈이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 사람, 수상하다.
"누구세요?"
창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남자가 창빈이가 왔다는 것을 눈치채더니 자기를 뭐라고 부르라고 할까 고민하다 이름을 알려주었다.
"천계에서 왔단다. 용화 아저씨라고 불러."
용화 아저씨의 목소리는 친근하고 다정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절대 환생시키려는 술수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창빈이었다.
"환생 거부합니다."
"아, 그래서 정동병이가 내 특수능력이 필요하다 하면서 부탁하더라고. 나는 채빈이를 보고 애잔해질 것 같아서 거절했는데 말이지. 그래도 천계의 그 뭐냐, 여자 동료가 이걸 해도 된다고 해서."
동정심이 풍부한 천계 사람이라고 창빈이가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 동정심으로 나를 좀 동정해주면 안 되나?'
창빈이가 순간 떠올렸지만 환생시키려는 것이 동정하기 때문이라는 결과에 도달했다.
"그래서 뭐하려고요?"
"너에게 이세계를 체험시켜주려고."
"아니, 환생 안 하겠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이번 거는 체험판이야. 네가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게 해줄게."
"왜 해야되죠?"
"이래야 네 마음을 조금이라도 변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거부합니다."
"하는 게 좋을 거야."
"거부한다고요."
"그래도 한 번 쯤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거부할거라고요."
"아이, 그러지 말고."
용화 아저씨 쪽은 끈질겼다. 창빈이는 계속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만 용화 아저씨가 하도 잡고 늘어져서 거부해봤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쫓아올 것임을 직감했다. 결국 창빈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승락했다. 만약 환생하더라도 완고한 모습을 보여주면 천계 측이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에휴, 그러면 한 번 가기나 해볼게요. 그래도 환생은 거부합니다."
"잘 생각했어."
용화 아저씨가 얼굴에 미소를 품었다.

얼마 뒤, 그들은 병원을 나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으로 가서 환생 체험을 준비했다. 용화 아저씨는 정동병과 창빈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 3명은 한순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 3명이 도착한 곳은 어느 별장 앞이었다. 강물이 흐르고 있어 아름다웠지만 주변은 한산했고 건물도 한 채밖에 없었다. 창빈이는 눈 깜짝할 새에 풍경이 달라진 것에 감탄했다.
"그럼 거기서 잘 돌아다니고 있어. 나는 어디 갔다올 테니까."
"가긴 어딜 가, 나 없으면 울고불고 난리 피울 놈이."
용화 아저씨가 가는 것을 정동병이 막아세우며 말했다. 용화 아저씨 특유의 동정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창빈이는 생각했다.
한편, 창빈이에게는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머리 위에 있는 이건 뭐에요?"
창빈이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의아해했던 것을 말했다. 그가 가리킨 것은 밝게 빛나는 붉은 정팔면체였다. 그것은 머리 위에서 둥둥 떠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아, 곧 있으면 알게 될거야. 그럼 용화야,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자."
정동병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창빈이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정동병이 사양했다. 그리고 정동병의 리드 하에 그들은 별장 뒤로 돌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때 창빈이와 나이가 같은 노란 머리의 여자가 별장 밖으로 나왔다. 그 여자는 평범하게 걸어가다가 창빈이의 머리 위에 떠있는 것을 보고 창빈이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창빈이는 신체적인 접촉이 있을까봐 순간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그 여자는 적의 없이 정팔면체만 툭 치더니 방긋 웃을 뿐이었다.
"오예, 좋았어."
창빈이가 상황파악을 하던 도중 머리의 정팔면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삥삥해하며 말했다.
"뭐하는 거야...?"
"뭐긴 뭐야, 환생자 입단 절차지."
그 여자의 말투는 매우 생기발랄하고 기분이 좋아보였다.
"환생자 입단 절차? 그게 뭔데?"
창빈이가 혼란스러워하면서 경계하며 물었다.
"환생자라서 모르겠구나. 뭐, 자세히 설명해주지. 네 머리 위에 정팔면체 모양의 붉게 빛나는 뭔가가 떠있었을 거야. 그게 바로 환생자 표식이야. '나는 환생자입니다'라는 걸 알리는 거지."
"그래서 그게 뭐에 쓰는 건데?"
"그러니까 그 환생자 표식을 먼저 건드린 사람이 그 환생자를 가져가는 거지.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우리 파티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잠깐, 그러면 나 노예같은 거 되는 거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아까 그 환생자 표식을 건드리면 자동으로 파티가입이 되는 거지. 종속은 아니고 파티원 등록. 물론 탈퇴도 가능하고."
창빈이는 속으로 안심했다.
"그런데 네가 뛰어올 때 웃던 건 뭐 때문이야?"
"아, 그거. 환생자들은 기본적으로 마법 하나가 딸려오더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파티로 영입할 때보다 더 좋고. 그리고 우리 파티가 사람이 적어서 누구라도 영입해야 했고."
창빈이는 속으로 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마법이라고? 창빈이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이게 그런 의미였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확인하기 위해 마법을 걸어보았다. 그러자 창빈이가 손을 향한 곳에서 바위가 소환되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세계에서도 매우 흔한 바위였다.
"이런거?"
"응! 그런거!"
그 소녀는 감탄하면서 창빈이를 매우 환영했다.
"맞다. 내 이름은 '히드리어 하프란'이고, 포지션은 힐러. 잘 부탁한다!"
"어어, 그래."
창빈이가 이러다가 환생이 확정될 것 같아서 자기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 파티에 가입하게 되었으니 안쪽으로 들어가보자고. 작은 파티지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창빈이와 하프란은 별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창빈이는 정동병과 용화 아저씨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이미 어딘가로 가버린 뒤라 하프란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별장의 거실에는 살짝 피곤하게 앉아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도 창빈이와 나이가 같았다.
그 남자는 별장으로 들어오는 하프란이 다른 사람과 동행하는 것을 보며 마중나왔다. 그리고 창빈이에게 다가가며 엄청나게 반가워했다. 역시 인력난에 고통받던 파티답다.
"신입이야?"
"뭐, 그런 거죠."
창빈이가 별로 내키지 않아하며 말했다.
"우와, 신입이다! 하프란,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별장 앞에 환생자 표식이 떠있는 애가 있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지."
"진짜야? 이야, 반갑다. 나는 사이어드 세차일드. 여기서 딜러를 맡고 있어. 그냥 세차일드라고 부르면 돼!"
"어어, 잘 부탁해."
창빈이는 그곳에서 매우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줄곧 혼자의 삶을 살아왔던 창빈이에게 이런 느낌은 자신과 유일하게 친했으며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소녀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빈이는 매우 감격했다. 그가 그동안 원했던 포근한 안식처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이 있는 가족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창빈이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소녀? 분명 실루엣은 기억이 난다. 지금 병상에 있다는 것도, 그녀와의 과거도.

'잠깐, 걔 이름이 뭐더라?'
창빈이의 기억에서 그 소녀의 서채빈이라는 이름이 잊혀져 있었다.

창빈이는 정동병과 용화 아저씨, 더 나아가 천계에 깊은 원망을 느꼈다. 환생을 거부한다면 소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겠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와있었다. 창빈이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천계에 대한 노여움이 합쳐져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다.
하프란과 세차일드가 창빈이의 정신 상태를 보고 걱정하며 말했다.
"창빈아, 방으로 가자. 너 이러다가 쓰러지겠다."
"그래, 침대에 누워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창빈이는 그 말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환생시키려는 천계가 겹쳐보여 짜증이 났다. 그러나 지금 창빈이는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 단지 세차일드의 부축을 받으면서 따라갈 뿐이었다.

방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각각 서랍장이 놓여있었다. 그것 말고 가구라고 할 것은 창문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옷장밖에 없었다. 옷장 위에는 작고 납작한 나무상자가 올려져있었다.
세차일드가 창빈이를 침대에 눕혔다. 창빈이는 이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고심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 바퀴 돌았다.
'ㅅ... ㅅ... 그래, 시옷 뭐였어. 그리고 치읓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런데 이름이 뭐지? 소청빈? 사차빈? 왜 기억이 나지 않지? 어렸을 때 학교 따돌림으로 고통받던 나에게 생긴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이자, 고등학교 입학식을 남겨두고 교복을 사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잊을 후 없는 친구! 그 친구의 이름이 뭐였지? 어디보자, 그러니까 얼굴은... 응?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리카락 길이는 딱 어깨정도였고, 안경은 안 썼고, 키는 나보다 살짝 작았고... 아, 뭐야! 얼굴만 기억이 안 나!'
창빈이가 소녀가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평생 쭉 같이 있어주겠다고 한 그 약속을 어찌 이렇게 간단하게 깨버릴 수가 있었는지가 그의 의식을 더욱 더 나락으로 빠뜨렸다.
하프란은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하면서 푸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방을 나갔다. 세차일드는 창빈이의 상태를 보고 환생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혼란이라고 보고 위로의 말을 걸었다.
"너 환생한 거 맞아. 저쪽세계에서 죽어서 이쪽으로 넘어온 거겠지. 네가 저쪽세계에서 무슨 일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에서 잘 하면 될거야!"
"잘 하면 된다...라고요?"
창빈이는 그 말이 싫었다. 자신의 처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누구를 두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제대로 된 환생 절차가 아닌 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불쾌했다.
"애초에 나는 환생자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환생 체험자란 말이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 죽었다는 것 때문에 고통받는 것 같아? 저쪽세계에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잊어버렸다는 거에 고통받고 있다고!"
세차일드가 그걸 듣고 의아해하며 말했다.
"환생 체험자라고?"
"그래. 나는 원래 환생을 거부했는데 계속 환생하라고 졸라가지고 체험만 해보는 거야. 어차피 환생 안 할 거지만."
창빈이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토로했다. 세차일드가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말했다.
"음... 아, 기억을 잃는 거라면 그건 흔한 거야. 대충 환생자의 20% 정도가 기억을 조금씩은 잃고 돌아오거든. 그리고 너보다 더 심한 사람도 꽤 많이 있다? 우리 파티에도 한 명 있고."
"그게 누군데?"
"'시아 체이브너'라고 우리 파티의 탱커 한 명 있어. 걔도 환생자인데 걔는 아예 거의 다 잊어버렸어. 그때 입고 있던 옷이랑 일부 어렴풋한 추억만 빼면 전부. 참고로 걔는 십오 분 정도 뒤면 올 거야. 지금 전투 준비로 물자비축 중이거든. 걔가 방금 시장에서 전부 집에 전송시켰으니까 그 쯤 되면 오겠지. 아, 내가 너무 많이 말했나?"
그 말은 창빈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 창빈이가 다시 한 바퀴 돌면서 말했다.
"하... 지금은 그냥 혼자있고 싶다."
"그래? 그럼 나가줄게."
세차일드가 순순히 나가주었다. 그 때 창문으로 별장 뒤쪽에 있는 정동병과 용화 아저씨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비행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동병과 용화 아저씨는 창문 바로 맞은편의 옷장 앞에 멈추어섰다.
"이세계는 어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기억도 잃고 이게 뭐가 좋냐고요!"
창빈이가 분통을 터뜨렸다. 창빈이가 몇십 초 동안 욕설을 퍼붓고 조금 진정되자 정동병이 말했다.
"기억 잃는다는 건 이미 말 했잖아? 환생 거부하면 차근차근 기억을 잃게 될거라고."
"제가 언제 환생 하겠다 그랬어요? 다 그쪽의 강요 때문이지!"
창빈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쏘아붙였다.
"그냥 원래 세계 말고 여기서 살아보는 건 어때? 이런 가족같은 분위기는 네가 항상 꿈꿔왔던 바였잖아."
"그게 말이나 되요? 그 친구가 없는 포근함은 저에게 있어서는 어딘가 허전한 포근함일 뿐이라고."
"하... 이거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냐. 천계 쪽이 왜 환생이 성공한다고 보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네. 이 정도 고집은 살다살다 처음 본다, 야."
창빈이가 속이 꽉 막히면서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창빈이는 오른손을 꽉 쥐고 정동병을 한 대 치려고 했다. 그러나 정동병은 깜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피했다. 결국 주먹은 옷장에 맞았다. 옷장은 의외로 튼튼해서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그 위에 위태롭게 놓여있던 나무상자가 떨어지면서 한쪽 면이 창빈이의 머리를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모서리나 뾰족한 부분으로 떨어진 게 아니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용화 아저씨가 살짝 움찔하더니 정동병에게 이제 그만 가자고 했다. 정동병은 조금 생각하다가 그의 말을 따랐다.
"조금 뒤에 다시 오지. 그때까지도 변함이 없다면 다시 원래 세계로 되돌려 놓아주고."
정동병이 용화 아저씨를 이끌면서 창문 밖으로 순식간에 비행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뒤, 시아 체이브너가 별장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창빈이와 동갑이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물자를 옮기느라 꽤나 힘들어보였다. 하프란과 세차일드가 그녀를 보고 새로운 동료가 왔다는 말을 알려주었다. 체이브너도 새로운 동료를 원했기 때문에 기뻐하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든 상자에는 침대 옆 서랍에 넣을 마법 해독제와 마나 회복제 등 각종 치료제들이 들어있었다.
체이브너는 방에 들어와 환영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나무상자를 보고는 황급히 그쪽으로 가 상자를 들어서 옷장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게 왜 떨어져 있어?"
"아, 그게..."
창빈이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도 정동병이나 용화 아저씨같은 천계의 이야기나 원래 세계에 있는 그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여기서 해봐야 별로 득이 되지 못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 그렇구나. 난 또 이거 열어보려는 줄 알았네."
"이거 열면 안 되는 거에요?"
"응. 열면 안 돼. 내가 여기로 소환될 당시의 추억을 담은 상자라 웬만해서는 절대 안 보여줄거야. 같은 파티원들에게도 열게 해주지 않은 거라고."
체이브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안심하면서 이야기를 밝게 이어갔다. 
"아무튼, 내 이름은 시아 체이브너. 이 파티에서는 탱커를 맡고 있어. 네가 나에 대해서 소개받았다는 거는 이미 세차일드한테 들었어."
창빈이는 그녀의 성격이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다 생각했고, 하프란과 같이 지내다보니 물든 것이라고 어림잡았다. 딱 하프란의 하위호환이었다 
"그나저나 환생 체험자 뭐시기 하더니 그건 무슨 일이야?"
"내가 저쪽 세계에서 소중한 사람이 있거든. 내가 환생해버리면 걔 혼자 남아버려서 계속 환생트럭에 치이려는 걸 거부한 거고.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체험판이랍시고 온 거고."
"걔도 복받았네. 나도 원래 세계의 친구가 그렇게 나를 생각해왔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하지. 아, 이야기가 딴 데로 샜나?"
"아, 괜찮아. 그런 거 익숙해."
"그래? 어쨌든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
"뭐, 내가 환생할 리는 거의 없지만."
창빈이가 '하, 하.'하는 속이 빈 웃음과 함께 답했다. 체이브너는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물자가 잘 왔는지 확인하러 갔다.

방이 또다시 비자 천계의 그 두 명이 다시 찾아왔다. 정동병은 용화 아저씨를 뜯어말리고 있었다. 용화 아저씨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있었다.
"으아아, 빨리 가자. 아무래도 조금만 더 있다가는 뭔 짓 할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마음 제발 좀 집어쳐라. 너 때문에 내가 다 고생이다."
아무래도 용화 아저씨의 동정심이 발동해서 터지기 직전까지 간 모양이었다고 창빈이가 생각했다. 정동병이 몸으로는 용화 아저씨를 제어하면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환생 할래 안 할래?"
"이런다고 제가 행복해질 일은 결코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 말하잖아요. 환생 거부한다고."
"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자고. 나도 끈질기게 버티고는 싶지만 얘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단 말이지."
정동병이 할 수 없다는 투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 말에 창빈이는 화색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창빈이는 현관문 앞에 섰다. 문을 열려던 찰나, 파티원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체이브너가 먼저 '다음에 보자!'라고 인사했고 하프란과 세차일드도 잇따라 인사했다. 그리고 창빈이 기준으로, 어쩌면 그들에게 해주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나갔다.
"그래. 내가 또 올 지 어떨 지는 모르겠만, 다음에 보자고."
창빈이는 마침내 문을 열고 별장 밖으로 나섰다. 별장을 반 바퀴 정도 돌아 아까 있던 방의 창문 쪽으로 가보니 역시나 정동병과 용화 아저씨가 있었다.
"준비 됐지?"
"당근이죠."
용화 아저씨의 말에 창빈이가 즉답했다. 용화 아저씨는 마법을 걸어 그들과 함께 다시 원래 세계로 되돌아갔다.

돌아온 것은 처음에 출발했던 어느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그 길로 정동병은 용화 아저씨의 여린 마음을 보다듬어주며 창빈이와 멀어졌다. 그러다가 정동병이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혹시 환생하고 싶거나 나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너를 치려고 했던 마지막 장소인 그 주택가 횡단보도 쪽으로 오면 된다. 평상시에는 거기가 순찰 경로 중 종착점에 거의 가까운 곳이거든. 알겠지?"
"알겠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붙들어 메시죠."
"아, 그리고 그 마법으로 꼭 물건이 아니더라도 소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각형이라던가. 그리고 타임머신같이 네가 있는 세계에 없는 물건은 소환 불가능하고, 돈이처럼 소환하면 사회적으로 혼란이 올 수 있는 위험한 물건도 소환 불가능하다."
정동병은 그 말을 하고 바로 용화 아저씨를 데리고 한순간에 천계로 사라졌다.

창빈이는 이세계에서 돌아왔겠다, 그 소녀를 찾아가려고 했다. 소녀를 찾으면 그의 기억도 완전히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창빈이가 알지 못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었다. 창빈이는 그것을 알고 바로 바닥에 엎드려 절규했다. 그가 그 사이에 또 잊어버린 것은 바로 그 소녀, 서채빈이 입원한 병원과 병실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