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실패했네..."
천계의 사무실에 있는 남자가 정동병에게 말했다.
"이쯤되면 그냥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는 게 낫지 않아?"
정동병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말렸다.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지."
"그래도 걔 고집을 봐봐. 뭔 짓을 해도 환생은 절대 안 할 거라고."
그러더니 정동병이 남자 옆에 앉은 여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능력은 어떻게 되먹은 거야? 이렇게까지 거부하는데 네 능력 왈 프로젝트 성사 확률 100%라니."
"어떻게 성사되는 지 모르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 능력은 절대 틀리지 않아."
"아무리 뭔 짓을 해도 안 갈 것 같은 놈이 환생을 한다고? 이거 미친 거 아니야? 웃기려고 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환생을 안 시킬 때 지 혼자 환생한다고 뜨는 게 훨씬 더 재밌겠군요, 아줌마."
정동병이 참지 못하고 여자를 비꼬며 폭언했다. 여자는 자존심이 상해 속으로 품은 독한 마음을 추스르면서도 그 선택을 하면 나타나는 결과를 계산해냈다.
그러나 결과가 나오자 여자는 너무 뜻밖이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이 이상한 결과를 공유하고자 입을 열었다.
"진짜로... 그렇게 나오네요."
정동병 또한 장난으로 한 말이 사실이 되자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는 믿지 못하며 말끝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한편, 창빈이는 병원과 병실 이름을 잊었다는 허무함에 빠져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바로 발걸음을 옮겨 그 횡단보도로 향했다. 마음에 다급하고 초조해져 그 속력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횡단보도에 도착했다.
정동병의 트럭이 나타난 것은 대략 2시간 정도 뒤였다. 창빈이가 그의 트럭을 급하게 멈춰세우려고 손을 흔들었고, 정동병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바로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툴툴거리며 내려왔다.
창빈이는 그를 보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따졌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그, 뭐냐, 제 친구의 이름이랑 얼굴이랑 입원한 병실이랑 이런 거를 전부 다 까먹게 할 수 있는 거죠? 이게 어떻게 하면 돌아오죠? 평생 못 돌아오나요? 제가 없으면 걔는 어떻게 하라고요? 그리고 다른 거는요? 어떻게 된 거에요? 예?"
창빈이가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내었다. 정동병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뭐긴 뭐야, 기억 잃으라고 걸어놓은 마법이지. 그래서 그런 거 잊는 거도 자연스러운 거고."
"아니, 뭐가 자연스럽다는 거에요? 저에게 소중한 존재를 빼앗아가서 그 다음은 뭐 하려고요?"
"뭐, 그건 네가 살기 나름이지. 잘 살아보라고. 뭐, 천계와 관련된 기억들도 죄다 없어지니까 지장은 없겠지."
창빈이의 울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럼 이제 뭘 더 하실 건데요? 기억을 잃으면 그 다음은 뭔데요?"
"아무것도 안 할건데?"
창빈이는 예상 밖의 대답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다.
"천계에서 너 환생시키는 거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에 그쪽에서 어차피 니 혼자 알아서 환생할거라 그랬으니까 기억 지우는 거는 계속 남겨두려고."
"제가 알아서 환생한다고요? 제가 그럴리가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에요!"
창빈이가 정동병의 예언이나 선전포고 같은 말에 더 정신이 이상해졌다.
"그보다도 제가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뭐 없을까요? 네?"
"하나 있지."
"제발 알려주세요. 기억은 무조건 찾아야 합니다. 저는 걔 없이는 못 살아요."
창빈이가 간절하게 정동병에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정동병이 기분 나빠하면서 알려줬다.
"그거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어디선가 접하면 된다. 그러면 어디까지 떠올려질 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에 대한 기억은 떠오를거다. 어쩌면 전부 떠오를 수도 있고."
창빈이가 또다시 정동병에게 들러붙었다.
"제발 시켜주세요. 제발 그렇게 만들어주세요. 네?"
"내가 그걸 할 수 있겠냐? 그러니까 빨리 바지 좀 놔라. 바지 내려가겠다."
창빈이가 그 말에 일단은 정동병에게서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의 애걸복걸은 멈추지 않았다.
정동병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매정하게 창빈이를 떨어뜨리고 트럭 운전석 문을 큰 소리나게 열고는 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내려 한 마디 한 다음 인정사정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아무튼 환생 안 시키기로 했으니까 여기서 잘 살아보셔."
떠나가는 트럭을 보며 창빈이는 희망을 잃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은 얼마 뒤면 모조리 사라진다. 오늘이 환생 시도 12일째니까 앞으로 8일. 그 안에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되찾아야 했다.
창빈이는 바로 집으로 달려가 그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6일이 하루아침에 지났다. 뭐라도 정보를 꺼내보고자 했지만 불행히도 기억을 잊어버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심지어 일기장은 초등학교 이후로는 숙제가 아니라서 전혀 쓰지 않았고, 초등학교의 일기장에도 그녀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애초에 일기장이 제대로 쓰여져있지가 않았다.
창빈이는 슬퍼하고 또 괴로워했다. 무기력함이 그를 지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퍼하는 이유조차 까먹었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는 자괴감이 그를 반쯤 미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기억을 잃어가면서 점차 없어져갔다.
이제 트럭기사와 용화 아저씨에 대한 것 등 천계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이 날아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 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소환 마법의 사용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것이었다.

창빈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패스트푸드점 직원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알바를 짤렸다가 다시 복귀해 오랜만에 감자를 튀겨보니 기분이 썩 괜찮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은 감출 수 없었다.
한편 창빈이의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 동료 하원이가 창빈이의 달라진 점을 보고 의구심을 품었다. 그는 창빈이와 다른 고등학교였지만 그가 정신적으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두 번째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친해지고 싶어도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겨서 말도 꺼내지 못했던 창빈이였지만 요즘은 왠지 모르게 창빈이가 많이 풀어진 것 같기 때문에 하원이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 너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보이는 데 괜찮아?"
"뭐가 달라졌다는 거야?"
채빈이라는 소녀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린 창빈이가 답했다. 하원이가 걱정하면서 말했다.
"예전에는 뭔가 어두운 표정으로 '접근하지 마라.'라는 포스를 물씬 풍겼는데 지금은 그런 게 완전 없어졌단 말이지. 지금은 얼굴이 풀려서 그냥 간단하게 고민이 있는 사람 정도로만 보인달까..."
"그런가..."
창빈이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원래 아무 일 없이 이렇게 갑자기 전환되지는 않는 법이잖아."
"그런 거 없었는데."
창빈이는 적어도 근 몇년간은 웃음 없이 살아왔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원이가 기억을 떠올리게 해보고자 여러 가능성을 던져보았다.
"예를 들면 다시 알바하니까 기분이 좋다던가? 최근에 상권 다 죽어갔는데 대형마트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활발해졌잖아. 덕분에 우리들이 일자리를 되찾은 거고."
창빈이는 깊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런 걸로는 그의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러면 최근에 네가 짤렸던 식당에서도 다시 알바로 고용시켜줬다던가? 거기 본사 직원이 폭행시비에 휘말렸다가 CCTV 보니까 알고보니 직원이 손님을 지켜주는 거였더만. 그래서 거기 주가랑 인지도랑 이미지가 확 오르고 그 덕에 너도 다시 알바할 수 있게 됐고."
창빈이가 그것도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폭행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고 브랜드 주가가 치솟았을 때 약간의 희열을 느끼긴 했다. 그러나 창빈이는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님을 왠지 모르지만 단번에 느꼈다.
"아니."
"그러면 뭘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나도 궁금해 죽겠다."
창빈이가 책상에 푹 늘어지면서 신세를 털어놓았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그는 속으로 놀라면서 사람이 이렇게까지도 변할 수 있구나 실감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음날에도 지속되었다. 서채빈의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없어지며 그는 조금씩 밝음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학교 내 따돌림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남아있었지만 중학교 때랑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창빈이에게는 매우 땡큐였으므로 평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지금 보니 학교 교복이 생각보다 어울렸다. 누군가가 생각났지만 기분탓으로 치부했다.
창빈이의 이런 변화는 학교에서도 나타났다. 평소에 풍기던 '건드리지 마라'라는 아우라가 사라졌기 때문에 살짝이긴 하지만 이전보다는 사람들이 피하는 정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애들이 창빈이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창빈이는 다른 때와는 다르게 수업도 열심히 듣고 집중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채빈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천계는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창빈이의 이런 변화는 오후가 될 수록 사람들이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남학생 여학생 상관 없이 그의 성격에 뭔가 위화감을 느껴 '뭐지?'하면서도 대부분의 급우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넘어갔다.

시간이 흘러 학교가 끝나는 종이 울렸다. 담임선생님의 조회 끝에 창빈이는 책상에 걸어놓은 가방을 메고 걸어나가려 했다. 그러던 중 책상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편지는 하트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뭐지, 러브레터인가?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학교 끝나면 학교 뒤의 작은 길로. 기다리고 있겠음.'
창빈이는 이게 장난인지 진심인지 의아해했다. 그리고 러브레터라고 확신했다. 창빈이는 그쪽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창빈이에게는 그 어떤 설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성격이 변한 거랑 상관 있는 건가?'
창빈이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면서 아무 느낌 없이 학교 뒤 작은 길로 향했다.

장난은 아니었는지, 학교 뒤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교복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같은 학교의 여자아이임이 분명했다. 아까 그 편지는 확실히 러브레터였다.
창빈이는 그 러브레터를 들고 타박타박 발걸음을 전진했다. 어느정도 형체가 보이는 지점까지 오니 여자의 표정에 두근거림이 역력한 것이 보였다. 평소의 인싸같은 이미지와 대조되게 매우 긴장하고 있었고 두 손은 등 뒤로 감추고 있었으며, 다리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완전 수줍어했다. 또한 그 작은 길은 의외로 로맨틱하고 아늑해보였다. 딱 고백하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창빈이는 그의 안에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는 기억 때문에 전혀 설레지 않았다.
창빈이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최씨라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창빈이를 보자 그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그 여학생은 완전 티나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 꼬고 있었다.
"어, 왔구나?"
"너 이름이 뭐더라?"
아무 감정도 없이 다짜고짜 이름이나 묻는 창빈이었으나 그 여학생은 기쁘게 답했다.
"내 이름은 최다경. 우리 같은 병실에서 종종 봤었잖아?"
창빈이는 병실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에 다경이의 말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래서 왜 부른 건데?"
"아, 그거..."
창빈이가 여전히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다경이를 보면서 한심해했다. 다경이는 한 껏 더 움츠라들더니 말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계속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는데 용기가 안 나서... 그래서 지금 말할게. 사실 나 너 좋아해!"
다경이가 한참동안 말을 돌리더니 드디어 고백을 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창빈이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전혀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창빈이는 그런 자신에게 속으로 놀랐다. 그래도 일단은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네가 이상한 애인 줄 알았어. 그래서 뭐지 싶어서 피했었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사고로 입원하고 거기에 보호자로 있는 동안 너를 봤어. 학교에서와는 다르게 한 여자를 간호하는 한없이 다정한 너의 또다른 면을 보면서 생각했어. 이 남자, 의외로 좋은 면이 많구나."
창빈이는 자신의 기억에 없는 그 말에 살짝 놀랐다. 잘 하면 자신의 성격이 바뀐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최대한 경청했다.
"그때부터였을 거야. 그때부터 나는 너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품었어. 계속 네가 지켜주던 그 아이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학교에 있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 네 생각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전학생이 말했지. 용기를 내보라고. 나랑 친해진 그 전학생은 내 그 고민을 들어주면서 나를 응원해줬어. 고백에 대한 준비도 많이 해주고 조언도 많이 해줬어. 그래서 지금 네가 컨디션이 좋아진 때를 노려서 용기를 내서 고백하는 거야."
창빈이는 이 말을 들으며 정작 자신에게 중요한 부분이 없었다는 것에 은근히 실망스러워했으나 이게 고백을 받는 남자가 가져야 할 태도인지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다경이는 이제 배배 꼬다 못해 땅굴을 파버릴 정도로 수줍음을 타면서 등 뒤에 있던 꽃다발을 꺼냈다.
"나랑 사귀어줘!"
창빈이는 그 말에 아무런 사랑도 기쁨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캐물을 뿐이었다. 기회는 이 때밖에 없었다.
"아까 내가 간호하고 있었다는 부분 자세히 말해봐봐!"
창빈이가 막무가내로 물었다. 다경이는 눈에 콩깍지가 씌인 지라 자신의 말이 행복해서 다시 들려주기를 바라는 거라고 착각하면서 설명했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네 옛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를 걱정하고 있었잖아. 아마 개학식 전날이랬건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낙상대학병원에 찾아오면서 걱정해주는 너를 보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인건가 생각했다고."
"그 외에는? 뭔가 이상한 걸 들었다던가?"
창빈이가 퍼즐조각이 맞춰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글쎄, 나가는 길에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와서 환생이니 뭐니 하는 얘길 듣긴 했는데..."
창빈이는 그 때 거의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의지했던, 소중하게 여겼던, 지켜주고 싶었던, 사랑했던, 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었던 사람. 개학식 전날 교통사고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사람. 자신이 따돌림으로 고통받을 때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정동병과 있었던 일들과 이세계로 환생 체험을 한 것 까지.
얼굴과 이름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관 없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아니, 고백은 내가 마음이 없어서 받아줄 수 없고."
"어? 잠깐만!"
"고백은 거절할게!"
창빈이는 몹시 흥분하며 병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경이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쫓아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옆에 알바하러 가는 하원이가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냥 뛰어갈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창빈이를 보고 하원이는 뭔일이지 하고 어리둥절했다.

창빈이는 계속 앞만 보고 뛰었다. 지금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과 병실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를 가득 채웠다. 그곳에 가면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해내는 것도 쉬운 일이리라.
그렇게 창빈이는 끝없이 달리고 달렸다. 학교에서 병원까지의 걸이가 멀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곧 다가올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깜빡였다.
창빈이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창빈이의 그 희망은 순찰 중이던 트럭에 의해 치이고 말았다. 인적없는 횡단보도에서 들려오는 신호등 울리는 소리가 꺼짐과 함께 창빈이는 그대로 사고로 인해 솟구쳤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도로를 선홍빛으로 물들였고, 뼈는 우드득 소리를 내며 안팎으로 으스러졌다.
창빈이는 하늘에 붕 떠있는 상태에서 시간이 천천히 감을 느꼈다. 눈 앞에는 주마등이 새겨졌고 몸은 힘이 빠지면서 점점 눈이 감겼다.
창빈이는 결국 그대로 사거리 중앙에 내팽겨지며 나뒹굴었다. 이미 창빈이의 영혼은 떠나버린 상태였다.

트럭을 몰던 정동병은 갑작스레 뛰쳐나오는 창빈이를 보지 못하고 치어버린 것에 아연실색했다. 눈앞에 펼쳐졌던 믿지못할 광경이 여자의 능력에 오점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정동병이 허탈하고 황당한 웃음을 내뱉으며 트럭을 계속 운전했다.

한편 창빈이를 뒤따라가던 다경이와 하원이는 창빈이가 사고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창빈아!"
그들은 동시에 외치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가 기껏 고백했는데, 내가 기껏 마음먹고 고백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다경이가 정신줄을 놓고 자신도 죽고 싶어 도로에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다경이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막아섰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채윤아! 창빈이가, 창빈이가..."
"어, 알아."
그 전학생은 잘 됐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심지어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다경이는 그걸 보고 맛이 가서 전학생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아니, 창빈이가 죽었다고! 어떻게 이렇게 좋아라 하는 투인데? 너 내가 쟤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냐하면 계획대로거든."
전학생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특수능력인 변신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채윤이라는 이름의 전학생은 40대 중반의 유부녀라는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다경이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은 치어 죽었고 자신에게 조언해주던 친구는 알고보니 아줌마였다.
"누구...?"
"아, 천계 사람이야. 그냥 편하게 채빈이 엄마라고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