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이가 순간적으로 느껴진 엄청난 고통과 함께 자리에서 눈을 떴다. 바닥은 울퉁불퉁한 흙길이어서 살짝 등이 저렸다. 사방에서 여러 소리들이 들려왔다.
창빈이는 바로 몸을 일으켜 낙상대학병원을 찾아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떠서 바라본 광경은 강가를 사이에 두고 창이며 마법이 날아들고 검이 휘몰아치는 유혈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에 익숙한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환생한 거야?"
창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얼떨떨하게 말했다. 자신이 어째서 환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횡단보도에 있었다는 것은 기억났다. 그렇다. 트럭에 치인 것이었다.
창빈이는 그런 생각은 집어 치우고 일단은 살고 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창빈이의 주변에도 싸우는 자들이 검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 때문이었다.
창빈이가 어리벙벙하게 있던 사이 옆에서 검을 들고 뛰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창빈이는 깜짝 놀라 그 남자를 막으려고 닥치는대로 물건들을 소환했다. 바리케이드에 나무에 철벽에... 이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물건들만 나오지 않았을 뿐 수많은 물건들이 그 남자 위로 떨어졌다.
그걸 보고 적들은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해 창빈이에게 달려들었다. 창빈이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마구잡이로 소환시켰다. 수레에 소파에 건물 기둥에 말 등등... 나중에는 창빈이가 사각형을 소환해도 된다는 걸 기억해내고 더 신속하게 피하기 위해 사각형을 엄청나게 불러대며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한편 같은 전장에서 하프란, 세차일드, 체이브너도 활약하고 있었다. 다 합해서 4명, 실질적으로는 3명밖에 없는 소규모 파티였지만 실력이 뛰어났기에 조금씩 마왕군을 소탕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보낸 지원군과 함께 싸우는 그 모습은 든든해보였지만 한 편으로는 힘겨워보였다.
그 소란 와중에 창빈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세차일드였다. 세차일드가 적을 탐색하던 도중 엄청난 양의 사각형이 박혀있는 곳을 본 것이었다. 세차일드가 신참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주위를 둘러보니 창빈이가 적진 한가운데에서 겁에 질려 사각형으로 임시 터널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서 그 안으로 도망다니고 있었다.
"창빈아!"
창빈이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얼마 있지 않아 세차일드를 발견했다. 창빈이는 계속 사각형을 생성해대면서 세차일드에게 달려갔다.
창빈이가 세차일드에게 다가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아니, 이게 지금 뭔 상황이야? 저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잖아!"
"마왕군이야. 그것도 아주 센 마왕군. 너는 환생해서 잘 모르겠지만."
창빈이는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들, 즉 파티원이나 천계 사람들이 있나 살펴보았다. 하프란은 부상을 입은 지원병들을 치유중이었고 체이브너는 정부의 지원군과 함께 그녀의 주변에서 날아오는 창들과 돌격하는 군사들을 저 멀리 전송하고 있었다.
창빈이가 뭐가 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러면 나도 싸워야되나?"
"그러면 우리야 좋지."
창빈이는 그 말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대충 야구장 크기의 납작한 사각형 하나를 마왕군이 몰려있는 곳 위에 소환했다. 사각형은 마왕군 위로 떨어져 그들을 압사시켰다.
갑자기 창빈이의 몸에 뻐근함이 밀려왔다. 처음 왔을 때 이것저것 소환해낸 데다가 지금 너무 큰 것을 소환해 마나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창빈이는 균형을 잃을 뻔하다가 다시 자세를 잡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돼?"
"그렇게 하면 되긴 한데, 뭐야 이거 쩔잖아..."
세차일드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자동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창빈이는 너무 많이 쓰면 의식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용량을 조절하기로 했다.
창빈이가 마왕군들을 보면서 일단은 살기 위해 소환마법을 썼다. 사각형이 마왕군의 장기 안에 소환되면서 마왕군이 픽픽 쓰러져나갔다. 세차일드는 창빈이를 보면서 천재인지 사이코인지 문득 떠올리며 경이로워했다.

한편 적들이 거의 소탕될 즈음이 되자 창빈이도 어느 정도 힘이 딸리기 시작했다. 사각형을 하도 많이 소환해서 최대한 작게 해서 쓰고 있긴 한데 아까 마나를 야구장만한 사각형을 소환했을 때 너무 많이 써버려서 지금은 이상한 곳으로 소환되곤 했다. 창빈이는 결국 마법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런데 그 때 마왕군이 창빈이와 세차일드가 있는 쪽으로 화살을 쐈다. 죽음을 직감한 창빈이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에 사각형으로 된 큼지막한 천막을 소환해버렸다. 그 즉시 창빈이는 마력부족으로 현기증이 왔다. 천막은 다리가 균형이 맞지 않아 앞으로 넘어지면서 보호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그 때 화살이 또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창빈이가 막아보려 할 새도 없이 빠르게 복부를 갈랐다. 창빈이는 자신의 배에 죽을 듯한 고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하프란이 그걸 듣고 달려왔다. 화살을 막기 위해 체이브너도 달려왔다. 그리고 창빈이의 옷이 달라진 것을 보고 살짝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프란이 창빈이의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상처를 확인했다. 하프란은 단번에 매우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화살에 독 마법이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이브너, 창빈이를 별장의 침대 있는 방으로 보내줄 수 있어? 창빈이가 머물렀던 방 말이야. 거기라면 치료할 수 있어."
"할 수 있지. 근데 마나가..."
그 때 화살이 또다시 날아와 체이브너가 반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화살 하나가 체이브너의 어깨에 박혔다.
하프란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안 되겠다. 너도 가야겠다. 치료제가 어디있는 지는 알지? 설명서 있으니까 그거 보고 해. 나는 여기 치유해야 되니까. 그리고 거기서 마력도 더 채우고."
"어, 알았어."
창빈이는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체이브너는 전송 마법으로 창빈이와 자기자신을 그 방으로 전송시켰다.

창빈이와 체이브너는 무사히 방으로 돌아왔다. 별장은 적의 습격을 받지 않는 곳에 있어 평화로웠다.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잔혹한 소리들이 아직 전장이라는 것을 계속 상기시켰다.
체이브너는 배에 화살이 박힌 창빈이를 바닥에 눕혔다. 침대에 눕히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그리고 화살을 뽑고 침대 옆 서랍장에서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일반인도 쓸 수 있게 하프란이 만들어놓은 마법 해독제를 체이브너가 유리병 뚜껑에 있는 스포이트로 창빈이의 상처 부위에 살짝 떨어뜨리면서 걱정해주었다. 해독제는 매우 잘 들어서 독마법으로 인한 상해가 빠르게 호전되었다.
체이브너는 그 후 자신이 입은 상처에도 해독제를 떨어뜨려 치유시켰다. 그리고 서랍장의 또다른 칸에서 상처에 바르는 치료제와 마나회복을 위한 회복약을 꺼냈다. 그리고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한참동안 통 안 보이더만 갑자기 나타나서 네모난 거 크게 떨어뜨리고 마왕군들 죽어나가고..."
창빈이가 자신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생각하면서 본인도 생각하기에 어이없고 불행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저번에 온 게 환생체험이라 그랬지? 그래서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 다시는 안 오려고 했지. 그런데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트럭에 치여가지고 나도 모르게 환생되버린 거지, 뭐. 그리고 눈을 떠보니 전장이었고."
"너도 그 환생법이야? 나도 트럭에 치여서 왔거든."
체이브너가 창빈이의 상처 치료제의 뚜껑을 열면서 말을 받아쳤다.
"그런데 어떻게 달려갔길래 트럭에 치이냐. 웬만해서는 안 치일 텐데."
체이브너가 창빈이의 상처부위에 약을 떨어뜨렸다.
"내가 거기서 소중한 사람이 있었거든. 내 인생의 유일한 지주. 저번에도 설명해준 그 애. 환생 안 하겠다고 해서 기억을 잃어버렸는데, 다행히 다시 되찾았었지. 그 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감격과 흥분 때문에 주변을 신경쓰지 못했던 거야."
"그 애 참 좋겠네, 이렇게까지 신경써주는 사람이 있다니."
체이브너가 자신의 상처에도 치료제를 바르고 마나회복제를 따서 마셨다.
"그래서 걔 어떤 애야?"
창빈이가 회상하면서 미소를 품었다. 체이브너가 건네준 회복약을 마시면서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어. 그래서 고아원에 맡겨졌지. 그런데 반 애들이 그걸 알고는 괴롭히고 따돌렸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그 때 나타난 소녀가 있어. 내가 지금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온 게 아니라 이름이랑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중학교 때 만난 그 소녀도 같은 처지였는데, 그 덕분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지. 서로 의지했고 계속 붙어다녔어. 그리고 마침내 나이도 됐겠다, 우리 둘 다 독립을 했고 고등학교도 같은 곳에 붙었어. 여기까지는 정말 행복이었지.
그런데 개학식 전날이었어. 교복을 사고 오는 길에 그 소녀가 교통사고를 당했지. 그 소녀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계속 옆에서 간호해주는게 내 일상이 되었지. 참고로 지금 입고 있는 교복이 그 때 산 옷이야. 그리고..."
"잠깐만, 잠깐만 있어봐."
서랍장을 닫고 병을 치우려던 체이브너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이 황홀해하면서 옷장 위에 있던 나무상자를 가지고 방 밖으로 나갔다. 세상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창빈이는 후다닥 떠나는 그녀의 모습에 뭔 일인지 궁금해했다.

방 밖에서 체이브너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옷을 벗고 상자 안에 있던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와이셔츠에 치마에 조끼에 넥타이에 가디건 등등...
체이브너가 표정에 기대감을 품고 방으로 들어왔다. 창빈이는 그것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의 여자 교복이었다.
체이브너가 자신과 창빈이의 교복을 대조해보며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창빈이도 교복을 입은 체이브너를 보면서 익숙한 사람에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창빈...?"
"서채빈...?"
둘은 서로가 자신이 2년간 그리워하던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달려들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을 기쁨의 눈물로 이별의 끝을 고했다. 천계가 창빈이를 이세계로 보내려던 이유, 그것을 창빈이는 이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이렇게 끝나는구나."
정동병이 창빈이가 있는 방에 보이는 언덕에 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오른편에는 용화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잘 됐네, 잘 됐어."
용화 아저씨의 눈물의 의미는 동정심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동정심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은 창빈이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의 마음은 순전히 다른 의미로 채빈이에게 향해있었다.
정동병이 그를 보면서 잘 됐다고 살짝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잘 된 일이지. 그렇지, 채빈이 아빠?"
"그래, 드디어 이 아비가 뭔가를 해줄 수 있게 되었네."
용화 아저씨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의 본명은 서용화, 채빈이의 아버지였다.
그들 옆에는 천계의 사무실에서 프로젝트를 맡고 있던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남자의 특수능력인 천리안으로 별장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던 그들도 드디어 프로젝트가 성사됐다는 기쁨에 서로를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을 보고 정동병이 말했다.
"창빈이 엄마 아빠도 잘 됐네. 이제 창빈이가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
"그래. 잘 됐지."
창빈이의 아버지가 로켓을 꺼내 그 안에 든 사진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창빈이의 어릴 적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있었다. 창빈이의 부모님이 흘린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 마침내 방울져 떨어졌다.
"자, 그럼 나는 이제 저쪽 세계를 다시 맞춰놓으러 가볼까? 일이 예상 밖으로 진행되어 가지고 말이지. 일단 사건을 목격한 2명에게는 축복을 내려줘야지. 아니면 둘을 이어주는 게 좋으려나?"
"먼저가. 나 여기 좀 있다 갈게."
서용화가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생각에 말했다.
"이야, 부성애 보소. 그래, 나 먼저 보내주라."
그렇게 서용화가 마법을 부려 정동병을 이동시켰다. 서용화와 창빈이의 부모님은 여전히 별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동병이 도달한 곳은 병실이었다. 병실에는 다경이의 아버지와 채빈이의 바이탈 사인만이 남아있었다. 정동병은 창빈이가 트럭을 미처 피하지 못했을 때를 떠올리면서 살짝 웃으며 다경이의 아버지가 의식을 되찾게 해주었다.
"옆에 있는 혼수상태 환자가 이 프로젝트의 열쇠가 될 줄이야. 이 분은 천계에서도 상관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러고보니 고유능력을 설명해줄 때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거짓말을 한 게 생각나네. 여기서 살려버리면 그쪽 파티가 붕괴되니까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정동병이 회상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이게 다 내가 순찰 중에 실수로 서채빈을 쳐서 시작된 일이지. 그때 안 쳤으면 어땠으려나."
그때 다경이 아버지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 정동병은 그가 완전히 깨기 전에 다음 마법을 걸었다.
"이제 저쪽세계에서 행복하게 지내자."
정동병이 최종적으로 채빈이에게 마법을 걸자 채빈이의 바이탈 사인이 끊어졌다. 저쪽에서 의사들이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정동병이 그 소리를 듣고 들키지 않기 위해 천계로 가는 마법을 걸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채빈이를 바라봤을 때,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