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노인의 오두막으로 온 날은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하루였다.

마치 자명종이라도 맞춘 듯이, 노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의 뒤편으로 잠옷 바람인 채 걸어가서는 장작더미에서 장작을 집어 들어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노인은 크바스 - 러시아 음료의 일종 - 와 약간의 사슴 고기를 저며 구운 것으로 요기를 마쳤고, 항상 하던 것처럼 현관 밖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도끼를 집어 들고 숲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으며, 그의 시야는 이제 침침했다. 하지만 노인은 도끼를 휘두르는 데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수백 년은 더 되었을 전나무가 굉음을 내며 그의 도끼에 의해 넘어가자, 그는 도끼의 날에 두 손을 올리고 자루를 눈에 박은 다음, 마치 죽은 적에게 명복을 빌어주는 기사와도 같이 고마움을 표했다. 이 나무, 그리고 나무에 살던 새와 동물과 곤충과 열매들에게.

ㅡ그리고 그의 빠른 죽음을 기원하며.

그는 1858년에 태어나, 이제 막 100세를 넘겼다.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제국의 멸망, 공산주의자들의 집권, 레닌으로부터 스탈린의 정권 교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가 겪어보지 않은 러시아 현대사의 현장은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손자와 손녀를 보게 된 노인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공산당원들의 잦은 방문에 지쳐 어느 날 갑자기 숲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 그의 가족은, 놀랍지 않게도, 그를 내버려두었다. 노인은 스스로가 이제 자유라고 만천하에 선포했고, 도끼 한 자루를 들고 - 도끼의 이름은 프리야텔이었다. - 홀연히 숲속으로 사라졌다.

사실 그는 자유나 고요함,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며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이름모를 곰이 - 만약 곰들이 자신들의 동족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면 - 자신의 몸을 해체하거나, 혹은 대자연이 자신의 몸을 따뜻한 얼음으로 덮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이 특이한 노인에게 방문하는 사신은 지난 10년간 없었다. 이제 101살 생일을 맞은 노인은 쓰러진 전나무 앞에서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노인은, 자신이 입고 있었던 재킷의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크 수통을 꺼냈다. 지난달, 온종일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선로에서 주운 것이었는데, 아마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보드카를 즐기던 어느 공산당원이 기관차가 내뿜는 경적에 놀라서 떨어뜨린 것이리라. 하고 노인은 그 장면을 상상하며 고뇌였다.

이제 수통에는 그가 직접 만든 수제 밀주 크바스가 가득 들어있었고, 노인은 수통의 뚜껑을 연 뒤에 바로 그것을 들이켰다. 평범한 크바스는 겨우 1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약한 술이었지만, 노인이 만든 크바스의 알코올 함량은 무려 20%를 넘어갔다. 그저 시간이 남았기에, 수백 번에 걸친 증류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취기가 오른 노인은, 자신의 골반보다 8배는 더 큰 전나무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왼쪽 춤에서 작은 은색 리볼버를 꺼냈다. 나강트 박사의 역작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무엇보다 이 삶을 빠르게 끝낼 수단은 없을 테야. 그는 또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는 것이 옳을까? 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ㅡ 그래. 이게 옳다. 

그는 리볼버에 조심스럽게 탄약을 장전했다. 탄약은 이제 30년은 묵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리볼버의 약실이 폭발하여 그 파편이 노인의 뇌를 헤집든, 총탄이 격발되어 노인의 뇌를 관통하든, 죽음에 차이란 없었다.

그래도 노인은 고통 있는 죽음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총알 하나하나를 일일이 확인하고 약실에 끼워 넣었다. 실린더를 한 바퀴 돌리고 나서, 해머를 뒤로 꺾은 다음, 노인은 리볼버의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

노인은 하마터면 그 소리에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그는 자신이 환청을 듣는가 하고 의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환청을 보고 있는가 하고도 의심했다.

붉은색을 주 색상으로 채택한 사라판 - 러시아 전통의상 - 을 입구,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순백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자신의 두 어깨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 소녀가, 어디선가 나타나 노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키는 대략 155cm 정도 되었고, 그녀의 백옥같은 얼굴엔 마치 누군가 상처를 입어 백색의 평원 위에 피를 흘린 듯이 붉은색 눈이 황홀한 빛으로 빛났다. 약간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 위에 있는, 11월의 추위로 인해 조금 빨개진 작은 코가 그녀의 작은 입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소녀는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모습에 황망해하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정말로 여기서 그러실 생각은 아니길 빌어요. " 

소녀는 리볼버에 시선을 두며 조용히 말했다.

노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녀가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의 머리를 여전히 노리고 있는 리볼버를 내릴 생각도 않고, 노인은 입을 열었다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곰이나 늑대, 순록 보다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녀는 훨씬 안전하다고 말할수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엔 여전히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담겨있었다.

" 넌 도대체 누구냐? "
" 안나 카레니나. "

소녀는 미소를 유지하며 이번에도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어린 시절 책을 굉장히 좋아했기에, 안나 카레니나라는 톨스토이의 대작은 물론 전쟁과 평화, 죄와 벌, 예브게니 오네긴, 아버지와 아들 등의 문학을 탐독했다. 소녀의 그와 같은 대답에 노인의 적개심은 한순간에 풀어졌다.

" 브론스키 백작이라면 여긴 없다. "

소녀는 대답 없이 그저 그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넬 뿐이었다.

"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
" 상관이 없다니? "
" 우선 거머쥔 총을 내려놓으시지 그러세요? "

그제야 노인은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있던 리볼버를 거친 전나무 그루터기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총을 내려놓자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두 걸음을 내디뎠다. 노인은 이 신비한 경험에 정신이 혼미했다. 도대체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이 세상에서 오지 않은 듯이 아름답고, 게다가 아마도 노인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소녀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노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 이름이 무어냐? "
" 이미 소개했다고 생각했는데요. "

노인은 소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정말로 안나 카레니나가 그녀의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소녀의 태도가 마치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에게 농담조로 건네는 헛소리를 하는 것만 같았다.

" 전 이미 제 이름을 알려드렸으니, 브론스키 백작이 아니신 신사 분도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려주시겠어요? " 
노인은 소녀가 상당히 불공평한 제안을 하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는 조용히 또박또박 대답했다.

" 막심 코폐킨. "

소녀는 노인의 이름을 듣고는 눈을 감은 채 몇 초 동안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인은 소녀의 입 모양을 보고 그녀가 그의 이름을 외고 있으리라, 하고 추측했다.

" 막심 코폐킨. "
" 그래. 그게 내 이름이란다. "
"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셨다고 생각하세요? "

소녀가 마지막 단어를 내뱉고 나서야, 그는 그녀가 노인의 이름이 막심 코폐킨이냐고 되묻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막심은 라틴어 이름 막시무스에서 오는 이름으로 '위대한 자'를 뜻했다. 듣는 사람에 따라 조금 거북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한 세기를 살아가며 들을 수 있는 모욕, 욕설은 다 들어본 바가 있는 노인은 이 정도는 모욕 취급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노인은 소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 아니. 긴 삶을 살기는 했지. "

노인은 곧이어 대답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 대답을 듣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을까? 한참 동안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들이켰던 크바스로 인해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지자, 노인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난 이제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로 돌아갈 생각인데, 누추한 곳이지만 안내해주랴? 네 부모님이 어디서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가까운 마을로 걸어가려면 지금 출발하기엔 너무 위험할거다. "

노인의 제안에 소녀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두 번 끄덕였다.  정말로 아름다운 아이야, 하고 생각하며 노인이 도끼를 챙겨 앞장섰다.

소녀는 한참을 전나무 그루터기에서 머물다가, 저만치에서 먼저 걸어가던 노인이 뒤를 돌아보자 그제서야 두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서 기어오른 붉은색 땅거미가 노인과 소녀의 뒤를 천천히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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