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겁쟁이란 겁이 많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겁쟁이다. 나는 겁쟁이다.
 
어른들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어차피 나는 무엇을 해도 잘 될 거라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찌들어 먹고 놀고 자며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노력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노는 노력 정도려나.
 
주로 했던 건 게임이다. 밖에 나가서 하는 활동 자체를 싫어했다. 막상 나가면 즐겁게 놀다 오지만 나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 귀찮았다. 하지만 게임은 달랐다.
 
게임은 집에서 일어나서 바로 앞에 있는 책상에 앉기만 하면 되었기에 최소한의 활동으로 즐겁게 즐길 수 있는 걸 골랐다. 정말 편하지 않은가.
 
그래. 몇 년간은 정말 편했다. 평소에 즐겼던 게임은 온라인 게임이었기에 얼마든지 해도 정말 재밌었다. 오래가긴 했다. 인신공격과 부모님에 대한 무례한 언행을 참아가며 오랫동안 했다.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결국 넘쳐버렸고 평소에 하던 온라인 게임을 안 하게 되었다.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고 눈길을 돌린 곳은 싱글 플레이 게임. 주로 스토리 위주 게임이며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몇 년 동안 온라인 게임만 해왔기에 쌓인 스토리 게임들이 많았다. 용돈을 받으면 바로 게임을 사는 데에 썼다. 대충 계산만 해봐도 50은 넘을 거다.
 
싱글 플레이 게임도 오래갔다. 온라인 게임만큼은 못 갔지만. 그래서 다시 온라인 게임을 잡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게임이어서 해봤더니 처음엔 재미가 없었다. 허나 친구들과 하다 보니 점점 재미를 붙이더니 하루에 5시간씩은 기본으로 했다. 길면은 12시간 정도?
 
2020년 11월 18일 새벽. 잠들기 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동영상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에서 한 영상을 보게 됐다. 흔하디흔한 인생에 관한 이야기와 자극이 되는 영상이었다. 볼 영상이 없어서 정말 어쩌다 보게 됐다. 처음으로 본 영상이니 지루하겠거니 하고 시간 보낼 겸 그냥 보자는 생각으로 영상을 틀었다.
 
한심한 생각은 영상이 시작되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너는 상위 1%의 부잣집 아들, 딸이 아니다. 성공하고 싶으면 노력해라. 포기해라. 노력해라. 끝까지 노력해라. 실패해도 노력해라. 노력만이 답이다. 한순간이라도 노력을 멈추면 너의 인생은 그냥 일반적인 샐러리맨과 다름없다. 성공하고 싶으면 노력해라. 그럼 너는 상위 1%의 부자가 될 수 있다. 어쩌다 이 영상을 보게 된 당신. 당신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할 거다. 아무 노력 없이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다면 태어났을 때부터 잘난 집안에 태어난 자제들이겠지. 지금 당장 일어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을 당장 시작해라. 지식을 쌓는 것도 좋다. 무엇이든 해라. 하지만 당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생각 없이 하지 마라. 무엇을 하든 생각하며 해라. 그러면 답이 보일 것이다.
 
영상을 다 보고 난 뒤 회의감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왔다. 현재 고3의 나.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나. 어떤 것을 도전해도 끈기 있게 하지 않고 좀 하다가 말고, 재능이 없다고 자책하고, 재미없다고 피하고, 하기 싫어서 피하고, 귀찮아서 피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피해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잡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삶을 살아왔다. 그저 정말 나는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해도 성공할 거다.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둘러싸여 한심하고 쓸데없는 가축에 불과한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대체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한 거지. 게임을 몇 년 동안 해왔으면서 잘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거야말로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흔하디흔한 영상 하나만 봐도 이렇게 깨달을 걸 왜 지금까지 하나를 안 봐서 이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왔나. 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 애초에 이렇게 사는 게 인간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이제 뭘 해야 하지. 인제 와서 뭘 한다고 월급 200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이때부터였다. 사회가 무서워졌다.
 
자살할까. 성인이 되기 전 즐길 수 있는 걸 즐기고 그냥 자살할까? 죽으면 편안할 거다. 그저 나태 지옥에 가서 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뛰는 건 힘든데. 천국을 가기 위해 지금이라도 교회를 다닐까. 1년 정도 교회를 다니면 천국을 갈 거다. 그러니 꾹 참고 1년만 다녀보자.
 
뛰는 것이 귀찮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한번 가고 가지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냥 깔려 죽자. 고통도 익숙해지겠지. 다들 익숙해진다고 말하던데 그냥 누워있자. 그래 자살하자. 아무도 모르게 부모님도 모르게 형제도 모르게 자살하자. 당연히 내가 사라지면 걱정하시겠지. 내가 죽으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이런 나라도 사랑을 끊임없이 주셨는데. 이렇게 죽는 건 너무 겁쟁이 아닐까. 하지만 어떡해. 무서운걸. 나중에 슬퍼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자살할 생각도 잠시 사라졌다. 정말 잠시. 새벽마다 생각은 다시 찾아왔다. 
 
이런 내가 죽어도 그저 식충이었으니 먹는 입이 줄어서 돈도 덜 드니 좋아할 거다. 근데 자살하면 아프지 않을까? 어떻게 자살해야 하지? 수면제를 먹고 연탄불을 피울까? 이러면 모두가 아는데 수면제도 처방전이 아닌 이상은 못 받는다고 들었어. 아파트 고충에서 머리부터 떨어지면 안 아프지 않을까? 
 
창문 밖을 바라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소 공포증이 심한 나였기에 바로 눈을 돌렸다.
 
헤헤 무섭다…. 
 
손목을 그을까. 이건 처음부터 아프잖아. 대체 어떻게 죽어야지, 안 아프게 죽을까?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도로에서 다니는 차량의 불빛이 그림자로 비춰 줄을 지어 이동한다.
 
그냥 나는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잖아. 뭐 하는 거냐 나. 간단한 방법이 있잖아. 
 
선을 넘어버렸다.
 
부모님을 죽이자. 사고로 위장해서 사망보험금과 재산을 물려받자. 그리고 이걸로 원룸 건물을 하나 사서 월세를 받아먹으며 사는 거야. 정말 간단하네!
 
짝!
 
뺨을 때렸다. 손이 따갑다. 뺨은 붉어지기만 할 뿐 괜찮았다.
 
뭔 병신같은 생각이냐. 지랄하지 말라 미친 새끼야. 너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모두에게 들었던 말을 생각해봐라. 아들이 너무 착하네요. 낙천적이다. 아직 성인도 아닌데 엄청 어른스럽네. 너의 미소를 보면 나도 같이 웃게 된다.
 
정말 수많은 칭찬 들을 들어왔다. 하지만 저건 정말 나인가. 그저 어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식적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어른들 말을 경청하는 척. 일을 돕는 척하면 용돈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항상 웃으면서 다닌 거 아닌가. 이젠 진짜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누워서 무표정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진짜일까.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행복을 나누는 게 나인가.
 
대체 나는 누군가. 
 
살기 싫다.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엔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하셨다.
 
어느 날엔 아버지가 전화금융사기를 당하셨는데 나로 오해해 나에게 호통치셨다.
 
어느 날엔 형이 술을 먹고 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났다. 온갖 욕을 나에게 했다. 
 
과거에도 부부 싸움은 잦으셨다. 어머니가 우울증에 시달리셨다. 그 우울증은 우리에게도 퍼졌다.
 
과거 형에게 짓궂은 장난을 많이 당했다. 학교에서도 짓궂은 짓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당해도 제대로 화를 내 본 적은 단 한 번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후론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화를 내본 적이 없다. 그저 마음속에 묵혀왔다. 
 
싸움은 나쁜 거야. 서로 아프잖아. 그러니깐 나만 아파지자. 그러면 안 싸워도 돼. 웬만해선 상대도 사과하니깐 내가 표현을 하지 않으면 다 해결되는 거야. 그렇게 그냥 묵히자. 묵히자….
 
하지만 아까 들었던 아버지와 형의 말이 이미 차고 넘치던 마음속 쓰레기통으론 처리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되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오해를 받았을 때 너무 서러웠다. 내가 아닌데, 왜 나한테 그렇게 소리를 지르신 거지. 왜 모두가 나를 의심하는 거야. 항상 인터넷이랑 텔레비전으로 뉴스 보시면서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나는 절대 아니라면서 전화로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그때는 일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과거를 되돌아봤다.
 
부모님에게 가벼운 거짓말부터 아주 큰 거짓말까지 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아, 이러니 나를 못 믿으시는구나. 나는 뭔 짓을 하며 살아 온 거야. 쓰레기 새끼.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정말 전화도 받기 싫었다. 이때는 아무것도 학 싫고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안 걸어 줬으면 생각했다. 가만히 누워 그대로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이기에 전화를 안 받으면 오히려 내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받았다. 사과하시겠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미안한 목소리. 목소릴 듣자마자 얼어붙었던 마음이 살살 녹아갔다.
 
맨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미안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전화를 끊을까 고민했다. 아무 소리도 듣기 싫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에게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상처를 주고선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그냥 미안해만 했어도 풀릴걸, 왜 마지막에 마음에 담아두지 마? 
 
“응”
 
내가 전화를 끊었다. 어떤 소리도 듣기 싫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발버둥 쳤다.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회의감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나에 대한 혐오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너무나도 짜증 나고 화나고 서러웠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회오리바람 치며 나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침까지 흘릴 정도로 그만큼 격앙되어 있었다.
 
죽어버리자. 이딴 인생 살아도 무의미하다. 과거의 업보로 인해 부모님에게 신뢰를 잃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부모님에게 신뢰를 잃었다. 그냥 죽어버리자 이딴 인생 산다고 행복해질 수 없다. 바로 뛰어내리자.
 
그런 회오리 속에 긍정적인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믿었기에 그렇게 손쉽게 보여줬던 게 아닐까.
 
회오리가 사라졌다. 발버둥 치던 것도 멈췄다. 쥐어뜯던 머리도 놨다. 눈물도 멈추고 침도 닦았다.
 
그래. 나를 너무 사랑하시니깐 그런 거야. 나 정말 사랑받고 있잖아. 그래 사랑받고 있는 거야. 이런 축복받은 인생을 왜 포기하려고 하는 거야. 열심히 살자.
 
몇 달 후.
 
“너 때문에 가정 파탄 났어. 시발 새끼야.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만 없었으면 우린 행복했을 거라고!!!”
 
방 컴퓨터 의자에 그냥 앉아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나의 방에 들이닥치더니 소리쳤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내가 지금 어떤지, 형에게 무슨 마음을 가졌는지, 아무 대응도 안 하고 그저 듣기만 했다. 나는 그런 모진 말을 들어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밖에 있던 엄마와 형의 여자친구가 달려와 형을 데리고 나갔다. 형의 여자친구가 다시 들어오더니 괜찮다고 계속 다독여 줬다.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 게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역겨웠다.
이 년은 자기가 뭐길래 내 마음도 모르면서 이러는 거지. 나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서 나를 위로하려고 들어. 그딴 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벌어지게 할 뿐이야.
 
아무 저항도 안 했다.
 
그냥 듣고만 있었다.
 
형의 여자친구가 나가고 엄마가 들어왔다.
 
항상 저런다. 술만 먹으면 항상 저런다. 형이 네 눈치를 보며 살 줄은 몰랐다. 형 좀 사랑해 줘라. 네 형은 불쌍한 형이다. 그러니 제발 사랑해 줘라.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좋게 들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형의 과거를 알고 있어 좋게 들으려고 정말 노력했다. 사람의 부정적인 마음은 정말 쉽게 나타난다. 
 
내가 왜. 자기만 눈치 보는 줄 아나. 하루에 학교에서든 길거리에서든 버스 안에서든 집에서든 온종일 눈치 보며 살아가는 게 나인데. 형이 하도 불러서 작은 소리만 들려도 나를 부른거 같아 몸이 벌떡벌떡 일어나진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짜증 내니깐. 자기의 뜻에 안 맞으면 짜증 내니깐. 자신의 기분이 안 좋으면 나에게 짜증 내니깐. 항상 한숨 쉬고 욕하고 투덜대고 최대한 나도 싸우기 싫어서 눈치 보고 아무 말 없이 따라주는데, 내가 왜. 이번만큼은 내가 화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무언갈 시키면 아무 말 없이 따라주고. 오히려 형이 피곤하니까 내가 혼자서 아무 말 없이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음식하고 빨래 개고 하는데 눈치를 못 채줘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이번만큼은 내가 화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티는 안 냈다. 그냥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구토가 쏠리는 걸 참았다.
 
형을 달래주러 갔다. 왜 내 눈치를 보냐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나는 형을 엄청나게 존경하는데 왜 그러냐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고, 나는 형이 좋다고.
 
진심이었다. 오열하면서 나의 불만은 정말 먼지만큼만 말하고 형을 다독여줬다. 마치 내가 죄인인 거처럼 나를 비하하면서. 
 
어머니가 칭찬했다. 애 달래듯이 달란다고. 네가 너무 믿음직스럽다고.
 
그저 웃었다. 그저 미소 지었다. 그저 끄덕였다. 그저 모두의 마음에 들기 위해 행동했다. 
 
마음이 비어갔다. 이런 내가 비참했다. 이런 내가 너무 미웠다. 싫었다. 혐오스러웠다. 감정표현 하나를 못 하고 왜 이러고 있을까. 그냥 너무 싫었다.
 
방에 들어가 누웠다. 이미 새벽 4시 어두컴컴했다. 창밖을 바라봤다. 가로등이 사거리를 비추고 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만큼은 뛰어내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일어났다.
 
창문을 열었다.
 
방충망을 열었다.
 
바람은 하나도 불지 않았다. 그저 조용했다.
 
창틀에 올라갔다.
 
밑을 바라봤다.
 
뛰어내리면 편안해지겠지.
 
다리를 올려 난간에 앉았다.
 
그러자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으면 형이 슬퍼하지 않을까. 부모님이 슬퍼하지 않을까. 이러면 내가 너무 죄인이 되는 거잖아.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주는 거잖아. 그러니 그만두자.
 
솔직히 말해 변명이었다. 진심 반 무서움 반. 나에게 일어날 일이 무서워, 가족에게 일어날 일이 무서워, 사회가 무서워, 모든 게 두려워 아무것도 못 하는 나는 겁쟁이다. 누군가에게 죽임 받았으면 좋겠다.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단 덜 무섭겠지.
 
바람이 분다. 나의 고민에 대답하듯 비바람이 세차게 분다. 
 
머리가 휘날린다. 창문에서 점점 멀어진다. 땅바닥으로 점점 가까워진다.
 
아, 유서…………. 
 
쿵!
 
 
***
 
 
“죽기 싫어….”
 
1인용 병실에서 가련한 소녀의 목소리가 퍼진다.
 
17살 소녀. 
 
현재 저는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안 좋았던 심장이 더욱 심각해져서 혹시나 일어날 일을 대비해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의사분이 말하길 심장을 이식해야지만 명을 늘릴 수 있다네요. 아직 17년밖에 못 살았는데. 분명 부모님 두 분 다 엄청 건강하셨는데 왜 저만 이렇게 아픈 걸까요.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내려주시는 걸까요.
 
병원에 있은 지 1년이 돼가고 있습니다. 처음 입원 했을 때 병원 밥은 더럽게 맛없었는데 계속 먹다 보니 먹을 만 해졌네요. 건강을 위해 간을 덜 한다나. 완전 맹탕인데. 
 
아무것도 못 하고 침대에만 있으니 정말 심심해 죽겠다. 학교에 가서 친구랑도 놀고 싶은데. 고등학교 졸업해서 대학까지 좋은 데 가서 캠퍼스 연인 만들어 보고 싶은데. 살날이 이제 2달 남았다네요. 하하. 참 웃기죠. 신은 범죄자들한텐 관대하면서 저 같은 선량한 어린아이에겐 이런 벌을 내려주시는 걸까요. 종교는 없지만 이럴 때만 되면 신을 탓하게 되네요. 
 
2달 동안 쇼핑도 하고 정말 아무거나 막 하면서 즐기고 싶은데 의사는 나가지 말라고 하고 완전 감옥이다. 감옥.
 
정말 죽기 싫다. 이렇게 아파서 죽는 건 싫은데. 나이 잔뜩 먹고 즐길 거 다 즐기고 죽고 싶은데. 지금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나는 그저 성실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성실하게 살아 온 삶도 부정당한 느낌이야. 악화된 이유가 너무 성실하게 살아서 심장에 무리가 갔다나, 어휴. 답도 없지. 나도 참 한심하다. 내 몸 아픈 것도 모르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
 
연탄도 나르고, 할머님 할아버지 돌봐드리고, 쓰레기도 줍고, 반의 기둥이 돼서 일도 처리하고 싸움도 말리고, 성적을 위해 공부도 밤새우면서 하고 오답 노트 작성도 분명히 하고.
 
생각해보면 상태가 괜찮아질 수가 없구나. 헤헤…. 진짜 열심히 살아왔다. 나. 장하다 장해. 삶에 대한 보상도 못 받고 가는 건 좀 억울하네.
 
눈물이 흘렀다.
 
너무 서럽다. 대체 왜.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분명 어렸을 때 수술도 받고 약도 먹고 다 했는데 분명 다 괜찮아 질거라고 했는데 왜 더 악화가 되냐고. 
 
서럽고 짜증이 났다.
 
열심히 살아온 내게 돌아온 보상은 돈도 명예도 아닌 시한부 삶.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뿌듯한 마음에 해왔던 일이 비수가 돼서 되돌아왔다. 분명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딴 게 보상이면 받기 싫다. 다시 가져가 줬으면 좋겠다. 이딴 보상 받을 바엔 그냥 평범하게 살래 너무 빨리 죽잖아 이런 건 싫다고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해 봤는데 친구들과 놀이공원 가서 놀고 싶은데 가족이랑 바닷가에서 맛있는 거 먹고 놀고 싶은데 남자친구도 만들어서 사랑을 속삭이며 결혼도 하고 싶은데 무엇도 못 누리고 이렇게 병원에 갇힌 채 죽는 건 싫어.
 
앙상한 두 손으로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아 나갔다.
 
드르륵. 방문이 열렸다.
 
부모님이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가 울고 있는 나를 보곤 달려와 안아 주었다.
 
부모님은 희망도 없는 말을 항상 나에게 해주셨다.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분명히 기증자가 나타날 거라고, 그러니 우리가 좀만 참자고.
 
뭘 더 참으라는 이야기일까. 더 이상 참을 것도 없다. 이미 시한부 인생이 시작된 뒤로는 참을 일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 드리게 됐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전부 의미 없어질 일이니까. 하지만 부모님이 해주시는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정말 사랑하는 부모님인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래도 부모님이 같이 울어주고 등을 토닥여 주면 기분은 금세 괜찮아졌다.
 
울음을 멈추고 부모님에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냐고.
 
부모님은 의사 선생님께 추억을 만들라는 얘기를 듣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려고 왔다고 했다.
 
“와! 정말? 나 이제 병원에서 나가도 되는 거야?!”
 
부모님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우리 많은 추억을 만들자! 후회 없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서 가슴에 담아두자!”
 
“그럼…! 나 바다 가고 싶어!! 친구들과 놀이공원도 가고 싶어! 남자친구도 만들고 싶지만…. 이건 안되니 패스하고, 바다랑 놀이공원이라도 가고 싶어!!”
 
“2달이나 남았는데 뭐 더 없어?”
 
“으음…. 생각해 볼 게 일단 두 가지 먼저 하고 싶어!!”
 
“그래! 그럼 가자!”
 
“아싸!”
 
봉사하며 지었던 뿌듯한 미소는 먼지처럼 느껴지듯 처음으로 지어보던 가장 행복한 미소였다.
 
우린 당장 병원을 나와 바다로 떠났다. 아무 준비도 없이, 일말의 시간이 아까워 바로 출발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위급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멀리 가진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끄덕이기만 하고 서로를 쳐다보며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의사 선생님도 눈치를 채셨는지 다음날에는 무조건 한번 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하셨다.
 
부웅~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청량감이다. 병원에서는 공기청정기와 가습기까지 모두 틀어주지만 약 냄새 만큼은 지우지 못했다. 약 냄새가 너무나 지겨웠는데 오랜만에 이런 청량한 공기를 맛보니 너무 행복하다. 아니 지금 밖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기분? 이랄까 해방감이 넘쳐난다.
 
“아빠!!! 나 너무 행복해!!!”
 
입술을 꽉 깨무셨다.
 
“아빠도 행복하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셨지만 길이 울퉁불퉁해서 떨리는 줄 알았다. 내가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해방감을 느끼고 있을 때 부모님은 어떤 기분이셨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강릉 바다에 도착했다. 추워서 들어가진 못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바닷냄새가 너무 좋았다. 파도 소리가 듣기 좋았다. 지금만큼은 나의 모든 병과 마음의 쓰레기를 파도가 쓸어 내려가 주는 느낌이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어 다녔다. 가끔 바닷물이 발에 닿아 차갑기도 했다. 푹신한 모래가 마음에 들었다. 발가락끼리 비비면 간지러웠다.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무척 마음에 든다. 부모님 나와 같이 손을 잡고 걸어 다녀 주셨다. 나의 앙상한 손을 사랑하는 만큼 꼭 잡아주셨다. 따듯했다. 차갑게 느껴졌던 발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따듯했다.
 
내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부모님을 바라볼 때면 부모님은 자신들의 마음을 숨기고 미소를 지어주셨다. 아무리 나라도 그건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마다 너무 슬펐다.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같이 놀았을 텐데. 모두가 행복했을 건데.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 슬픈 감정은 숨기지 않아도 됐을 터인데 너무 죄송했다. 몸만 좀 사렸어도 정말 괜찮아졌을 거다. 왜 나보다 남을 먼저 챙겼을까? 무리하면 정말 위험하다고도 경고하셨는데. 
 
신나게 바닷가에서 놀고 난 후 공복이 찾아왔다.
 
“우리 뭐 먹을 거야?”
 
“딸이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그럼 비싼 거 먹어도 돼?”
 
“당연하지! 킹크랩? 바닷가재? 다 먹어! 다 사줄게!!”
 
“아싸! 그럼 다 먹을래!!”
 
“오케이! 가자! 오늘 다 먹어버려! 으하하하!”
 
“가자가자! 가보는 거야!!”
 
아빠와 나는 신나게 시장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뒤에서 흐뭇한 미소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킹크랩과 바닷가재였다. 원래 같으면 비싸다고 둘 중 하나만 먹었을 건데 모두 사주셨다. 정말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감사하다. 먹다가 감정이 복받쳐 꺼이꺼이 울면서 입에 부드럽고 두툼한 살을 집어넣었다. 부모님도 나를 보면서 똑같이 울면서 입에 집어넣었다. 손님들이 우리를 이상한 가족으로 보았겠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만큼은 정말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역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게 가장 즐겁다.
 
밤이 되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 폭죽을 사서 바닥에 꽂았다. 아빠가 라이터로 폭죽에 불을 붙이고 엄마와 내 옆에 달려와 꼭 붙어 앉았다.
 
피유우웅~ 펑!!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여러 가지 빛깔로 폭죽이 터져 퍼졌다. 정말 마지막으로 장식하기 좋은 선택이었다.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파도에 다 쓸려가지 못한 마음 쓰레기들이 모두 터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펑 터지는 소리가 속이 다 뚫릴 만큼 시원하게 느껴졌다.
 
숙소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신나게 놀고먹고 해서 그런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자네….”
 
“그러게, 여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건 다 해주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만큼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서 행복하고 후회 없이 만들어 주자.”
 
“응…. 나도 침울해 하지 말고 힘내야지!”
 
자고 있던 나의 뺨에 입술을 맞춰 주시고 나가셨다. 잠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 꿈을 꿨던 거겠지.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기 위해 가족 모두가 일찍 일어났다.
 
“조식!”
 
역시나 흥분되는 마음으로 숙소 1층으로 내려갔다. 간단한 토스트와 빵, 달걀부침에 오믈렛, 베이컨과 딸기잼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믈렛은 평소에 먹어보고 싶었기에 요리하시는 셰프님께 가서 오믈렛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장인의 느낌이 나는 할아버지가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엄청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오믈렛을 만들어 냈다. 내가 알기론 오믈렛은 만들기 어려운 거라고 들었는데 전혀 노릇노릇하지도 않고 완벽한 색깔의 오믈렛이 완성됐다.
 
처음 맛을 보았을 때 여러 가지 채소 맛과 달걀의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워갔다.
 
토스트 한입
 
오믈렛 한입
 
토스트 한입
 
오믈렛 한입
 
서로 돌아가며 맛을 보니 입안이 너무 행복했다. 항상 싱거운 것만 먹어왔다가 간이 되어 있는 음식을 먹으니까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앞에 앉아있던 부모님도 매우 뿌듯한 얼굴로 내가 먹는 걸 지켜봤다. 사진도 찍었다. 입안에 가득 넣어서 볼이 빵빵해진 사진을 보면 다람쥐가 생각났다. 부모님도 너무 귀엽다고 다들 바탕화면으로 설정해 놨다. 조금 부끄럽네.
 
우리는 조식을 먹고 내가 있던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어차피 검사 한번 받고 다시 가족과 함께 있으면 되니까 찜찜한 마음으로 병원으로 출발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사람이 많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대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의사 선생님이 우리 가족을 부르셨다. 의사 선생님을 따라 진료실에 들어가고 별 이상이 없었는지 물어 우리 모두 아무 이상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의 편안하고 부드러운 말투와 전문적이고 빠른 진료 덕분에 무사히 끝나는 줄 알았다.
 
털썩
 
“지혜야! 왜 그래, 지혜야!”
 
진료가 다 끝나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나는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시야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식은땀이 비 내리듯이 흘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닥에 쓰러져 쭈그린 채로 심장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뿐이었다.
 
“진정하세요. 거기! 어서 제세동기 가지고 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숨이 막혀서 질식해 버리는 걸까. 분명 어젯밤까지 즐겁게 가족들하고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무 증상도 없었잖아 괜찮았잖아 왜 이러는 건데 진짜 죽기 싫어 추억도 아직 별로 못 만들었고 친구들 하고 놀이공원도 못 갔는데 고등학교 생활도 못 즐겨 봤는데 대학 생활도 못 즐겼는데 왜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 건데.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죽기 싫어
 
하지만 호흡은 점차 막혀왔고 탈수증상까지 찾아왔다. 시야는 멀어지다 못해 안보이기 시작하고 의식은 멀어져만 갔다.
 
“심장 압박 시작한다.”
 
의사 선생님이 내 위에 올라타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의식은 돌아오며 시야도 확보가 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바로 근처에 있어 빠르게 응급대처를 해준 덕분에 간신히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몸도 안정되면서 극도로 긴장되었던 몸의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여긴, 꿈속인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하얗고 폭신한 바닥에 물이 얕게 깔린 공간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이 찰랑거리고 바닥이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느낌이 신기해 제자리에서 양발을 번갈아 가며 움직여 봤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맑은 물을 마셔 보기도 했다. 아무 맛도 안 느껴졌다.
 
바닥에 누워보기도 했다. 병원 침대와는 전혀 다른 푹신함이다. 따듯하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영원히 잠만 잘 수 있을 거 같다. 몸이 나른해지고 긴장도 풀렸다. 하늘 한쪽엔 밝은 태양이 있었다. 원래 같으면 눈이 부셔 눈을 감거나 태양을 가렸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부시지 않았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모두 밝게 만들어 주는데도. 
 
“에이. 일어나자.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가.”
 
누워있는 것도 무척 편안했지만, 가만히 있는 건 내 성격상 맞지 않기 때문에, 일단 돌아 다녀보기로 했다. 끝없이 펼쳐진 공간에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갔다. 발바닥의 촉감과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그저 걸어가기만 했다.
 
넋 놓고 걸어가고 있다가 마치 투명 벽인 듯 무언가에 막혔다. 손으로 만져보니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강제로 마임 하는 기분이다. 
어쩔 수 없이 벽에 기대고 앉아 하늘만 주야장천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죽어 천국에 온 거면 어떡하지, 그러면 천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천국에는 천사가 없는 거 아닐까, 정말 내가 죽은 건가, 아닌데 의사 선생님이 응급처치해 주셔서 괜찮아졌었는데, 꿈속이라면 좀 있으면 깨어나는 거 아닌가? 꿈은 깨어나기 전에 꾸는 거라고 들었어. 신기한 기분이다. 못 깨어나면 나는 영원히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건 싫은데.
 
머릿속에 많은 의견이 대립한다. 끝도 없이 한 의문이 해결되면 다른 의문이 들어온다. 들어오는 의문을 해결하고, 보류하고, 버리고 있으면 뭔가 머릿속이 바빠 즐거웠다. 병원에서는 한없이 바깥을 바라보며 언제쯤 나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했었는데 의문에 공간에서는 궁금한 게 많아서 그런지 계속해서 의문만이 생겨났다.
 
“저기, 안녕?”
 
“흐엑!!”
 
넋 놓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막힌 벽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해?”
 
검은 머리에 평범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혹시 천사일까? 천사는 노란 머리가 아닌가?
 
“혹시 천사야?”
나의 질문에 소년은 즐거운 듯 웃는다
 
“천사? 하핫, 뭔 소리야 나도 돌아다니다가 너를 발견한 거야.”
 
“그래? 여긴 꿈속이 아닌 거야? 여긴 어디야?”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건 모르겠어. 여기 있은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도 아마 꿈속은 맞을 거야. 엄청 편안하잖아?”
 
“그건 맞아. 엄청 편해 여기! 바닥은 푹신하고 따듯해, 물에 닿아도 젖지 않아. 근데 너무 심심하잖아 아무것도 없어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머리에서, 많은 생각들만 정리하고 있었다고.”
 
“그렇구나. 그럼 너는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야?”
 
“그런 거 같아. 너도 여기 투명한 벽은 못 넘어오는구나.”
 
소년은 내 앞에 앉았다. 손을 뻗어 벽에 막히는 걸 보여줬다. 나도 소년의 손에 맞게 손을 뻗었다. 아무 느낌도 안 났지만, 체온이 전해져 따듯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다. 지루하진 않을 거 같아. 그치?”
 
소년은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를 소개했다. 소년은 아니 그는 18살의 나보다 1살 더 오빠였다. 이름도 물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말해도 이름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나를 소개 할 때는 다 들렸다는데.
 
서로를 바라보며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오빠의 사정을 듣고 나서는 안타까웠다. 세상 모든 것이 무겁다고. 말끝에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오빠는 이내 입을 닫았다. 나도 내 사정을 얘기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심장의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2달 정도밖에 못산다고 해서 추억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물론 갑자기 쓰러졌지만 응급처치를 받아 정상으로 돌아왔다고도 말했다.
 
오빠는 따듯한 미소를 지어주며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다. 말하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왔던 모든 하고 싶은 불평불만을 털어놨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양손으로 닦아내며 소리치기까지 했다. 억울하다고, 좀 더 살고 싶은데, 아무 잘못도 없이 성실하게 살았는데, 내가 왜 이런 죽음을 기다려야 하냐고. 자신의 사정을 그저 덤덤하게 얘기했던 오빠와는 달리 나는 감정에 휩쓸리며 얘기했다. 그런 나를 보고도 끝까지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줬다.
 
고개를 숙이고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머리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오빠의 손이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고생했다면서, 서러웠겠다면서, 억울하겠다면서, 너는 더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곧이어 오빠의 몸 전체가 내가 있는 곳으로 넘어왔다.
 
나도 모르게 오빠에게 안겨들었다. 오빠도 나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까 해주던 위로해주는 말을 계속해서 해주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너는 여기서 모든 걸 털고 일어나자. 그러면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해결돼 있을 거야.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가서 놀이기구를 마음껏 탈 수 있어, 공포 영화를 보고 아무리 놀라도 괜찮을 거야, 부모님과 오랫동안 살 수 있어, 남자친구도 만들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어. 그리니 걱정하지 마. 너는 열심히 살아왔잖아. 나와는 달리. 너는 충분히 살 자격이 있어.
 
말이 듣고 있다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곧 있으면 죽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빠에게 물었다. 혹시 오빠는 죽냐고. 크게 웃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말했다. 나는 죽지 않아. 끝까지 살아가겠지.
 
나는 만약 정말로 모든 게 해결이 된다면 현실 세계에서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오빠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끄덕였다. 하지만 눈 밑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내가 안겨있는 사이에 울기라도 한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아주 밝게 빛나던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해가 지긴 하나 보는구나. 오빠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오빠에게서 떨어지고 바로 옆에 착 붙어 앉았다. 해가 지는 걸 서로 지켜보며.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을 때는 커다란 달이 뜨며 하늘을 밝혔다. 그리고 보기 힘들다는 오로라까지 보였다. 하늘에는 은하수가 보이고 가끔 별똥별이 지나가기도 했다. 너무 이뻤다. 지금까지 봐왔던 하늘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별똥별이 지나갈 때면 두 손을 모으고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팔꿈치로 오빠를 툭툭 치며 어서 소원을 빌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오빠도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봤지만, 소원을 타인에게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 그런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오빠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감기는 눈에 힘을 줘봐도 힘이 풀리면서 바로 감겼다. 옆에서 졸리면 자신의 다리에 머리를 올리고 자라고 했다. 너무 졸린 나머지 오빠의 다리를 빌려 자리에 누웠다. 편안했다.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누워있는 사이에 오빠가 무언가 말을 했지만, 듣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눈이 완전 감기기 전 오빠의 표정은 무척이나 후련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눈을 떠보니, 은하수가 넓게 깔린 하늘이 아닌 익숙한 병원의 천장이 보였다.
심장 쪽이 아파 확인해 보니 수술 자국이 나 있었다. 이번에도 수술했구나, 생각했지만 의사 선생님과 부모님이 들어오면서 진실을 깨닫게 됐다.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18살의 남자에게 심장을 기증받았다는 모양이다. 더는 심장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가끔씩 병원에 와서 정기검진만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실에 너무 기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닦아도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부모님이 다가와 나를 안아 주셨다. 나도 부모님을 양팔 벌려 꼭 끌어안았다. 부모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계속해서 울었다.
 
30분 정도 울었을까.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눈 주변이 퉁퉁 부었다. 부모님에게 심장을 기증해주신 부모님과 그분이 있는 장소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히 알겠다고 해주셨고, 그분들의 집으로 찾아갔다.
 
한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으셨다. 부모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심장을 기증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행이라면서 잘됐다고 건강하면 우리가 다 좋다면서 말씀하셨다. 혹시 심장을 기증해주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물었더니, 모두와 같이 유골이 모셔져 있는 봉안당으로 갔다.
 
기증자의 부모님을 따라갔더니 작은 사각형의 공간 안에 하얀색 항아리가 하늘색 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유골함을 바라보며 절을 두 번 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고, 가까이서 보니 옆에 그분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 사진을 바라본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른들도 왜 그러냐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오열하고 있었기에 어눌한 말투로 울먹이며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기증자의 부모님도 나를 끌어안고선 같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와 심장의 주인인 오빠에게 고생했다고,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편히 쉬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오빠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10년 전의 이야기로 나는 고등학교 생활도 즐기고 대학도 가서 좋은 남자친구도 만들고 결혼까지 기약했다. 남자친구에게도 사정을 말해 오빠의 봉안당에 찾아가기도 했다. 나의 남자친구도 나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절했다. 오빠 덕분에 나는 정말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