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팀, A팀. 9층이요, 9층>


 타이밍 좋게 재혁이가 사샤와 까쨔를 소환한다. 사샤는 계단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서는, 몸을 쭉 펴 한번 스트레칭을 하였다.


 “수고해라. 페쟈, 미샤.”


 페쟈는 형우를 부르는 러시아식 이름이다. 원래는 나처럼 비슷한 발음으로 붙여야 되는데 ‘형’이라는 발음이 러시아에서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맘에 드는 러시아 이름이 있냐고 물어 봤더니 형우가 뇌를 거치지 않은 속도로 효도르를 이야기했다. 그 때부터 형우는 페쟈가 되었다. 효도르의 줄임말이라나, 뭐라나.    

 사샤는 갔지만 우리 팀은 여전히 아직 일이 없었다. 사샤가 가고 농을 치던 상대가 없어져 멍하니 앉아 있던 형우는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 나를 돌아 보았다. 


 “아, 맞다. 만수 형님이 일 끝나고 너 좀 볼 일 있다던데. 미리 말해두라더라. 아까 내려갔을 때 나한테 말했는데 까먹고 지금 이야기하네.”


 “날? 왜?”


 “몰라. 정확한건 얘기 안 해줬어. 아마 너한테 직접 이야기해야 되는 일이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았겠지?”


 듣고 나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형우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목을 꺾었다.


 “뭐, 오늘 일도 일찍 끝날 것 같으니까 만수 형님이 너 뭐 일 더 시킬라고 그러는 걸수도 있고. 이 아저씨 촉이 좋은 편이라 돈을 겁나게 밝히니까.”


 “촉이 좋은 거랑 돈 밝히는 거 사이에 그런 상관관계가 있는 거?”


 형우는 귀를 후비면서 자신의 논리에 방점을 찍었다.


 “알 게 뭐야.”

 


 형우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단 예상대로 일은 엄청나게 빨리 끝났다. 보통 11시 조금 넘어서 끝나는 일이 10시 반도 되지 않아서 끝나 버렸으니. 그리고, 형우의 나머지 예상대로 나를 초과 근무를 시키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쪽에 가까웠다.

 일이 모두 끝난 모텔 프론트는 한가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그 곳에는 재혁이 혼자서 ‘이 곳에 사람이 온 것은 오랜만이군’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언젠가 형우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주말 근무로 손님들이 몰리는 걸 몇 번 겪다 보면, RPG게임에서 나오는 여관 주인들이 왜 매일같이 같은 이야기만 하는 지 이해할 수 있다고. 왜냐하면 그 말밖에 할 게 없으니까. 빨리 받아서 빨리 올려보내야 되는데 손님들하고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이 어디 있나. 다시 말해, 지금 재혁이는 정말 간만에 사람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재혁이가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 무언가 입을 열려던 찰나, 뒤에서 지배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어떻게 나오지도 않고서 우리가 내려온 걸 알지?


 “형우하고 민재, 왔냐?”


 “와, 형님 어떻게 아셨어요? 천잰데?” 


 형우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마치 재혁이를 앞에 세우고 복화술을 하듯, 지배인의 목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뭘 어떻게 알아, 임마. CCTV는 폼으로 있냐. 어쨌든 민재는 이리 들어오고, 형우 너는 재혁이 정산 좀 같이 봐 줘봐. 아까 뭐 빵꾸났다고 그런 것 같은데.”


 “빵꾸라구요?! 정산이?! 야! 누가 정산 빵꾸내래! 엉?”


 지배인의 말이 들리자 마자 형우 녀석은 재혁이를 갈구기 시작했다. 아마도 직속 선임으로서 업무를 숙지하지 못한 후임에 대한 질책... 이 아니라 그냥 쉬러 내려왔는데 일이 생긴 것에 대한 분노가 80% 이상인 듯 하다. 하지만 형우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진짜로 화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재혁이는, 다른 대답 없이 피식 한 번 웃고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혁이를 변호해 준 것은 지배인이었다.


 “쓸데 없이 애 갈구지 말고, 돈 비는 거 없나 잘 살펴봐. 알았냐?”


 “예이예이.”


 대답은 건성건성이었지만, 어느새 형우는 걸음도 빠르게 재혁이의 옆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민재야, 넌 안 들어오고 뭐하냐.”


 “네, 지배인님.”



 백오피스로 들어가니, 정산용 컴퓨터 책상이 아니라, 보통 직원들이 밥 먹는 용도로 쓰는 작은 식탁에 지배인이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몇 개의 A4용지가 놓여 있었고.


 “어, 민재야. 거기 앉아봐.”


 “네.”


 나는 지배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앉는 타이밍에 맞춰, 지배인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다 주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그래도 오늘은 일이 없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지배인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어쨌든.”


 지배인은 잠시 뜸을 들이고서는, 정수리 부근을 매만지며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너 원래 전공이 뭐라고 그랬더라?”


 “저요? 저 국문과죠.”


 “국문과라. 영어는 좀 하고? 뭐 토익이나 그런거 점수 얼마나 되냐?”


 갑자기 이건 왜 물어보는 거야? 이제 이 모텔에도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어 영어 손님이라도 받으려고 하나? 나는 의구심 가득 찬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건 왜요?”


 “아, 다른 건 아니고.”


 지배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 놓여 있던 종이를 살짝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종이에는 대기업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모두 알 만한 중견 기업, N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고, 그 아래는 영어와 한국어로 같이 써진 계약 약관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죽 적혀 있었다.


 “요새 너 뭐 준비한다고 그랬었지?”


 “네?” 


 “지금 우리 모텔 알바하는 것 말고, 너 원래 지금 취직 준비하는 거 있다고 그랬잖아.”


 “아... 저 지금 공무원 준비하고 있죠.”


 “그래. 음. 너 일 하는거 뭐 꼭 공무원만 하려고 목메고 있는 건 아니지? 꿈이 공무원인 사람이어딨겠냐. 어쨌든 지금 내 친구가 여기에서 부장급으로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지배인은 방금 보았던 계약서에 박혀 있는 로고를 가리켰다. 


 ”어제 이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이번에 영업 쪽에 사람이 없대고 해서 신입사원을 뽑아야 되는데 믿을 만한 사람 있으면 면접이라도 좀 보라고 추천해 달라고 그래서 말이야. 어차피 신입사원 뽑을 때, 어차피 스펙 백날 좋아 봤자 다 처음부터 가르쳐야 되잖냐. 다른 전공 보는 거 별로 없고, 뭐 해외영업부라 영어만 잘 하면 된다고 하더라.”


 “아, 그래요?”


 “그래서 이야기 듣자마자 민재 너, 생각나서 오늘 바로 얘기한거야. 어차피 너는 뭐, 저 형우나 진환이 같이 모텔쪽으로 쭉 나갈 녀석은 아니고 어쨌든 너 일 찾고 있는 중이잖냐. 그래서 시간 괜찮다고 하면, 이 쪽에 한 번 면접이나 봐 보라고.”


 나는 대답 대신 서류를 들어 보았다. 지금까지 이전에는 토익, 그리고 요새는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어휘나 문법 같은, 소위 영어의 뼈대 같은 부분은 죽어라고 공부했지만, 정작 실무 영어가 어떤 건지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분명히 눈 앞에 종이에 써 있는 것은 알파벳인데, 거의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 수준으로 알아볼 수 없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 

 내가 별다른 대답 없이 얼굴 전체로 ‘모르겠다’ 를 말하자, 지배인은 무엇인가를 눈치챘다는 듯 나에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너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다른 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계약서 서식이랜다. 그 정도는 알아둬야 좋다고 하니까, 한번 봐 두면 좋을 거야. 그리고 다른 외국어 할 줄 안다고 하면 좋다고 하더라. 뭐 다른 언어 또 아는 거 있어?”


 다른 언어라...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기는 했었지. 지금 아는 단어라고 해봤자 아리가또 오하요 스미마셍 이런 정도밖에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나는 살짝 혼란에 빠진 상태로, 이 기회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속절없이 저울질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무언가를 당장 결정하라는 이야기는 없다. 일단 부차적인 정보는 좀 제외하고, 주요한 사실만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지배인에게 질문을 몇 개 더 던져 보기로 했다.


 “언어... 다른 할 줄 아는 건 없구요 . 그런데, 이거 그러면 말씀하신 분이 면접 보는 거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아, 먼저 설명을 해 줬어야 하는데 깜빡했구만. 지금 내 친구가 이 곳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추천으로 따로 스펙이나, 그 면접 전에 이력서 보는 거 다른 말로 뭐라고 하더라?”


 “서류전형이요.”


 “아, 맞아, 맞아. 서류전형. 그거는 방금 말한 것 처럼 따로 보지는 않을 거야. 대신에, 쉽게 말하자면 이 추천해준 친구는 여기까지인 거지. 바로 너 일할 부서 실무 면접 보고, 그거 붙으면 임원 면접 보고 그렇게 할 거라더라. 그러니까 ‘아는 사람이니까 꽂아준다’ 가 아니라 지금 기회가 있으니까 한번 봐 보라 이 얘기야.”


 “혹시 이거 면접은 언제에요?”


 “한 달 뒤였나 그럴걸? 나도 정확하게는 못 들었는데, 니가 오케이하면 내가 다시 물어봐 줄게. 어차피 안 할 거면 알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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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늦게 올려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