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날이다.

 

아내가 자살했다. 내가, 그 멀고 어두운 바다, 어선 갑판에서 악을 쓰던 그 며칠간에 아내는 안방에서 목을 매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의 시체는 막 부패가 시작될 참이었다. 냄새가 심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아내의 하얀 발 아래 유서가 쓰여 있었다.

 

글쎄,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더라. 앞으로도 쭉. 그래서 살 이유가 없다더라. 그러나 배려심 깊은 아내는 그녀의 불행이 나의 탓이 아니라고, 꼭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써 놓았다. 그저, 자기가 세상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써 놓았다.

 

행복하지 않아서 아내는 자살했다. 평범한 죽음이다.

 

아내를 침대에 누이고 장의사를 불렀다. 장의사가 시신을 가져간 뒤 나는 간단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아내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금세 자살로 처리되었다. 장례식장에 가서 검은 옷을 입었다. 삼일장을 생략할 수 있을까, 혹시 바로 화장할 수는 없을까 장의사에게 묻자 그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사흘 동안 출항도 없었기에 직장에 알릴 필요도 없었다. 멀리 떨어진 친구를 부르기도 미안했다. 나는 아내의 영정 앞 마루바닥에 그저 앉아 있었다. 영정 사진이 엉성했다. 제대로 찍은 영정 사진이 아니었다. 뭐, 찍어 두질 않았으니까.

 

조금 슬펐다.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아내의 우울증이 많이 심해진 이후로, 사실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쳐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정사진은 찍어 놓지 않았다. 희망을 아주 부정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러나 희망을 움켜잡지도 않았고, 그저 저 멀리 사라져가는 희망을 따라 걸었을 뿐이다.

 

사흘이 흘러 아내는 화장되었다. 뼛가루는 바다에 뿌렸다. 그녀의 존재가, 또 고통이, 넓은 바다에 흩어져 더 이상 느껴지지 않도록. 아내는 이제 아프지 않다.

 

사흘 동안 나는 계속 아내의 유서를 곱씹었다. 행복하지 않아서, 그래서 살 이유가 없어서, 아내는 자살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행복일까? 그래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리라 비관한 아내는 죽어버린 걸까?

 

 

 

바다에 뼛가루를 뿌리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다. 밤 10시였다. 신호에 걸려 잠시 서 있었다. 곧 횡단보도에 초록 불이 들어오고, 건너려는 찰나 검은색 중형 자동차가 내 앞에 걷던 남자를 강하게 쳤다. 남자는 대략 오 미터를 날아가 아스팔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끄아악-! 소리가 울렸다. 아마 장기가 마구 터져나갔겠지.

 

검은색 자동차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재빨리 도망쳤다. 행인은 없었고 그를 구원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 구급차를 불러드릴까요?

- 그게 말이냐? 이 시발새끼야. 빨리 불러.

 

나는 구급차를 불렀다. 나는 쓰러진 남자 곁에 서 있었다. 남자가 처음에는 시발, 시발 욕지거리를 내뱉었기에 부상이 그렇게 심하지 않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고통에 찬 신음이 점점 커지고 얼굴빛이 계속 검어졌다. 내출혈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욕을 하던 남자의 태도는 점차 절박해졌다. 제발, 제발 살려줘. 구급차 언제 온대? 따위 말을 웅얼거렸다. 그러다 끄악- 비명을 지르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 남자는 왜 살고 싶은 걸까? 나는 궁금증이 일어 그에게 물었다.

- 좀 뜬금없는 질문인데요, 왜 살고 싶어요?

- 씨발아, 그냥, 그냥 좀 살려줘. 살고 싶어.

 

그냥. 순수히 그냥, 아무 다른 목적 없이 그냥! 그의 눈에서 나는 무시무시한 생존 본능을 발견했다. 행복과 불행 따위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눈. 한없이 고통스러워도 일단 살고 싶어하는 그 눈. 일단 살자, 일단 살자. 말하는 그 눈.

 

어느새 구급차가 도착해서 남자를 싣고 떠났다. 운이 좋으면 남자는 살 것이다. 멀어지는 구급차를 보며 나는 조금의 감동을 느꼈다. 살고 싶어하는 남자. 그를 보며 나 또한 살아있음을 느꼈다.

 

아내의 죽음은 “사람이 사는 목적은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내게 던졌지만, 저 죽어가는 남자는 그 목적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한 채, 그저 살고 싶어했다. 그를 보며 새로운 명제가 떠올랐다.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그리고 행복감 또한 삶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보상으로서 행복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가? 아내와 남자를 생각하며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글쎄, 역시 기묘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