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으로 몸을 비트는 버스의 리듬은 에어팟에서 흐르는 음악의 베이스를 깔아주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사소한 곳에서 행복을 찾을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의 편린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유행-음악, 연예인, 패션 따위의-과 뉴스, 인간관계 모두 그에게는 늘 질주하는 말과도 같았다. 달리기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흔들리는 물컵마냥 조금씩 넘쳐가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을 지켜보며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더 높고 가파른 경사를 세우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시, 그를,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몇 해 동안 앞서가던 사람을 따라달리며 미끄러지고, 뒤에서 앞지른 사람들에치여 상처가 아물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오늘도 필시 그러한 나날이었으리라. 수없이 치이고 또 치여 결국은 무덤해지는. 


띠링, 익숙한 알림에 핸드폰을 꺼내 든 그는 발신은을 보고 무심결에 미소지었다. 그녀였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사랑을 찾는다고 하던가. 그녀가 그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카카오톡으로 온 사진을 본 그의 눈가는 더 짙은 호선을 그렸다. 내용은 채 읽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동글동글한 글씨체-그녀는 손편지를 찍어 카톡으로 보내곤 했다-는 하루 종일 긁히고 찔려 모나게 된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요? 

우리 마지막으로 편지한게 어제에요 아가씨.

-별 일 없었죠? 뭐 있었어도 말 안 할 사람이긴 해 당신은. 그래도 힘든거 있으면 말 좀 하라구요. 당신은 얼굴에 다 티 나니까 숨기지 말고.

윽, 들켰네. 다음에 만날 때 말하면 되겠지.

-저는 별 일 없었어요. 아, 신기한 일은 있어요. 어떻게 우리 교수님은 날마다 새롭게 지루할까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지난 번에 그 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말 한거 같은데...

-아참 실례. 당신 아버지라고 했죠? 깜빡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지난 번에 들어보라고 한 그 곡은 못 찾겠어요. 미뉴에트가 한 두개가 아니던걸요. 차라리 하나 보내주는게 어때요? 

그러면 뭘로 보내야되지? LP? 테이프? 

-그럼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있어요, 안녕!


마치 건너에 그녀가 있기라도 한 것 처럼 그녀의 편지에 일일히 한 줄 한 줄 생각을 한 그는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히 몸을 기댔다. 마침 그의 기분을 알기라도 한 것 처럼 에어팟에서 매력적인 비트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잠옷바람으로 우체통으로 달려가는 일이었다.

-찾았다!

그리고 편지의 도착 여부에 따라 기분이 달라져, 어느 때는 마치 사나운 고양이처럼 근처에 오는 모든 사람을 긁기도 했으나 오늘은 그럴 걱정은 없어보였다. 잘 접힌 봉투 속에는 타자기로 찍힌 편지가 한 통 있었다. 그의 편지는 늘 이랬다. 슬픈 내용을 전할 때도, 기쁜 소식을 전할 때도 늘 똑같은 글자의 모양은 오히려 그녀에게 안정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는 딱딱한 활자의 장막으로도 가릴 수 없는 감정이 있었으니까. 


-잘 지냈나요?

그럼요. 차라리 뭔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 너무 심심해.

-그 음악은 제가 뭘로 보내야 될 지 몰라서 아직 안 보냈어요. 한참을 고민했거든요. LP를 구해야하나? 아니면 카세트 테이프? 아니면 CD? 

LP라니, 너무 옛날 아니야?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3개 다 구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제가 연주해드리려고요. 그러면 우리 토요일에 거기서 볼까요?

어머 귀여워라. 이게 연하남의-그녀의 나이는 22살. 그의 나이는 23살이었으나 그녀의 출생년이 더 먼저인 관계로 연상이라고 주장하는 중이다-매력인가?


마지막까지 편지를 정독한 그녀는 약 20분 간 방을 구르고, 한 시간 동안 옷을 고르느라 옷장을 뒤적거렸다. 그녀의 광란은 그로부터 1시간 이후에, 그녀 어머니의 분노어린 외침을 듣고는 끝났다.


"지지배야! 언제 학교가냐!"


***


슬슬 쌀쌀해져가는 가을의 바다는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떨어지는 해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남자는 황금빛 해변을 조용히 거닐었다.

그리고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사박거리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실루엣을 본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가을의 황혼. 생성과 소멸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는 두 남녀가 바다를 등지고 만났다. 


"앞으로 음악은 추천할 생각하지 마요."


"예?"


어리둥절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그녀가 짙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 핑계로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게. 왜, 싫어요?"


여자의 귀여운 도발에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리가, 이제 갈까요?" 


손을 잡고 나아가는 그들의 속도는 빠르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거의 저편까지 넘어가 마지막으로 그 불을 밝히는 노을 배경으로, 여전히 거기에 있는 파도 소리를 음악으로.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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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오랜만이네요. 엔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튼 완성은 해야겠죠. 

간단한 설정: 남자의 시간은 현재, 여자는 과거. 그래서 여자가 보낸 편지는 카카오톡 사진으로 오고, 남자가 보낸 카톡은 여자에게 타자기로 친 편지로 가는거죠. 그리고 그 둘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가을녘 황혼인겁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