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0일. 2022년 12월 31일로부터 단 10일. 10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나간 1월 1일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무엇보다 커다란 차이가 있는 10일입니다. 1월 1일이라는 날엔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12월 31일과 1월 10일은 10일밖에 지나지 않았기도 하고 1년이나 지나기도 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누구에겐 10일이나 지났기도 했겠네요.


 어쨌든 인간이 멋대로 부여한 그 의미 때문일까요. 불과 한 달 정도에 찍은 이 사진은 저에게 있어 추억되는 멀고 먼 지난날이 되었습니다. 앨범에 새겨진 사진이 제가 잊었던, 잠시 잊었지만 추억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12월 중순쯤일까요, 학기의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홀가분하게 4호선 중앙역에 내렸던 그때입니다. 그 두꺼운 함박눈이 제 손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저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 시선을 뺏은 것은 창문 너머의 하얀 세상이었습니다. 요새 이리도 풍성한 눈은 보기 힘들죠. 세상이 새하얀 모포를 덮고 있는 광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차가운 날씨, 차디찬 바람과 시린 눈이 가득하던 그 세상이 제 마음에 성냥불 하나를 켰던 셈이죠. 영하의 추위가 점화한 불씨에 제 가슴은 따스하게 취해 있었습니다. 


 작게 벅차오르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포근한 모포에 덮인 세상을 보았습니다. 순백의 풍경, 분명 저와 같은 마음으로 웃고 있는 사람들, 하늘에서 내려오는 낭만, 새하얗게 파묻힌 풀들, 죽어가는 나무.


 아.


 그렇게 저는 취기에서 깼습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던 것은 추위 속의 따스함이 아니었으니까요.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죽어가는 생명들을 보고 기뻐할 뿐이었습니다. 아니. 분명히 제 눈앞에 있는, 죽어가는 생명들을 보지 못한 것이었죠. 그 시렵도록 하얀 모포는 세상을 감싸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차별적인 살해였죠. 목 졸린 영혼들을 자각한 그 순간, 저에게는 그것이 눈이 아닌 재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풍경을 좋아합니다. 단절된 공감이 만든 고독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소통의 아우성이니까요.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희망의 약속보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풍경은 제게 확답하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바라는 것이 어딘가에, 아니, 손만 뻗으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은 저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상입니다. 저는 눈이 그 확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부를 갈기갈기 찢고 뼈를 녹이는 추위 속에서도 따스함이, 희망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눈이 내리는 시끌벅적한 도시의 풍경을 좋아합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이 거기 있었으니까요. 저는 눈이 내리는 시끌벅적한 도시의 풍경을 좋아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눈을 보는 순간 영혼의 절규가 보입니다. 얼어버린 생명의 흔적이 들립니다. 아니. 사실은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를 더 무섭게 합니다. 모두가 보지 않는 것을 나는 보고 말겠다. 그렇게 살아온 저마저 눈앞의 절규를 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그것은 채찍과도 같았습니다. 저의 알량한 자애를 논파하는 석궁이었습니다. 따스함 따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믿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 자아의 상징을 잃었습니다.


 이제 저는 눈을 보면 토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