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잊고 싶으신가요?”


 보이는 것이라곤 피곤해 보이는 눈의 주인밖에 없는 조용한 카페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여인이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인은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커피가 담겨있는 잔을 남자 쪽으로 밀었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씁쓸한 커피 향을 맡자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는지 떠올랐다.



 그날은 온갖 불행한 일이 겹친 날이었다. 아침부터 새끼발가락을 찍히질 않나, 매일 타고 출근하는 지하철이 운행을 멈추질 않나, 쨍쨍하던 하늘에서는 갑자기 비가 오질 않나. 이런저런 불행한 일들 사이에서 정말로 잊고 싶은 기억은 따로 있다.


 그녀가 죽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굵은 빗줄기가 후드득 떨어지는 배경에서 차에 치여 저 멀리까지 튕겨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머릿속에서는 붉은 핏방울을 내뿜으며 공중에 떠 있는 그녀가 슬로우 모션처럼 재생되고 있다. 다가오는 차를 보고 경악하는 얼굴을 한 채로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으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그때의 기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여인은 진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반응해줬다. 오직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는 것만을 표현하기 위한 매정한 말이었다.


 “이것만 마시면 그때 일을 잊을 수 있는 거죠?”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을 최대한 억제하며 물었다.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현대 사회의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상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심리상담이나 정신치료 같은 것들을 받아도 그녀의 눈이 자꾸만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어서 이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단숨에 커피를 들이켜려 한 남자를 여인이 막았다. 


 “그러면 그녀가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남자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은 뒤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렸다. 여인의 눈을 쳐다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저도 그녀를 잊긴 싫어요. 하지만... 하지만 너무 힘들다고요.”


 남자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호소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아..”


 남자는 예상치 못한 한숨 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남자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지만 소리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니었다. 좀 더 굵은 목소리였다. 남자는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도 다크서클이 보이는 듯한 카페 주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아직도...”


 남자는 다시 여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한없이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기적이네요.”


 “네? 그게 무슨...”


 그 순간, 남자의 머리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남자는 얼른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언젠가 나누었던 과거의 대화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생각이 나시나요?”


 남자는 대체 무슨 소리냐며 묻고 싶었지만 영문 모를 고통은 그것을 방해하기라도 하는지 더욱 강해졌다.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당신 꼴을 보자니 더 이상 못 참겠네요.”


 여인은 상체를 숙여 남자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날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두 번째라고. 그럼 처음은 뭐 때문에 왔을까?”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강압적으로 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그녀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과는 조금 달라. 당신, 그 차를 누가 운전하고 있었는지 기억나?”


 고통이 멎었다. 어렴풋이 지워진 기억이 떠올랐다. 


 “그 차의 주인은 당신이었어. 당신이 사고를 냈으면서도 고통스럽다며 기억을 지워 달라고 했지. 뻔뻔하게도 말이야.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 죽어가던 그녀의 심정은 생각해봤나? 어쩌면 그게 사고가 아닐 수도 있지. 아니, 난 솔직히 그게 사고가 아니라고 확신해. 어때? 말해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여인은 다시 의자에 기대어 진정을 되찾기 위한 호흡을 했다.


 ‘이기적이네요.’ 남자는 과거의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불과 몇 분 전이 아닌 좀 더 오래된 과거였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 뭐, 이렇게 화를 내긴 했지만 이 커피를 마실지 안 마실지 선택하는 건 여전히 당신이야. 누가 뭐라 해도 지금의 당신은 내 ‘고객’이니까.”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커피를 쭉 들이켰다. 하지만 큰 변화가 없는 탓에 남자는 당황했다. 


 “이거 아무런 효과가 없잖아요!”


 여인은 질린 표정을 하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왜 여기에 앉아있는지 기억나요?”


 “그야 기억을 잊기 위해서죠.”


 “그럼 그 기억은 뭐죠?”


 “그거야 당연히...”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성공적이네요. 이제 가시면 됩니다.”


 남자는 얼떨떨하면서도 만족하는 오묘한 기분으로 카페를 나섰다. 딸랑, 하고 청명한 종소리가 났다.



 “정말 이기적이네요. 저 남자.”


 내용물을 잃은 빈 잔을 치우기 위해 주인이 다가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글쎄, 아마 평범하게 살겠지. 아니면 마음속에 찝찝함을 달고 살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여인은 주인이 새로 내려온 커피를 홀짝 마셨다.


 “한 번 더 나를 찾아올지도.”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지나간 거리를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번 커피는 잘 내렸는데?”


 “하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