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백지와 만년필 한 자루를 앞에 두고

시인은 고뇌한다


하물며 한 글자도 적지 않았으면서도

깊은 고뇌에 시인은 차마 만년필을 들지 못한다

─ 한창 시인의 마음속은 어지럽다


수많은 심상(心象)들이

겨울잠에서 갓 일어난 봄꽃이 되어 피어올라

축제의 시작을 고하는 불꽃놀이마냥 흩어져

공허한 하늘을 형형색색의 빛으로 가득 메운다


하지만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어느새 조그마한 반딧불이가 되어

금방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애석하게도 공허 속에 제 몸을 숨긴다


도대체 어디로 갔나, 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힘껏 내젓지만

백일몽(白日夢)이라도 꾼 것인 양

그 하늘을 한땀한땀 수놓던 빛들은 어디 가고

다만 공허 한 움큼만이 끌어올려진다


엄연히 시(詩)라 함은

단순히 읽기 좋은 짤막한 글귀 따위가 아닌

그 자신의 내면을 거짓없이 비추어낸 거울일 터

다만 그 거울 속은 온통 어두컴컴한

빛이 남아있는 흔적조차 모조리 제거된 공허뿐 ─


텅 빈 백지와 만년필 한 자루를 앞에 두고

시인은 의문을 던진다


하물며 종이와 펜이 갖춰져 있다고 한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도대체 무엇을 부끄럼 없이 적어낼 수 있단 말인가

─ 한창 시인의 마음속은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