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창호는 중학교 2학년의 소년이었다


그 나이의 소년이 그렇듯창호 역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학업보다는 멋을 추구하고 살인흉기죽음그런 것들에 사족을 못 썼다


하루는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난간을 붙잡고 몸을 쭉 내민 적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뛰어내릴 용기는 없었다


그 상태로 누군가 자신의 방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자살을 하는 것보다는 자살하는 을 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창호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모습에 심취해있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이른 저녁 시간창호는 인터넷을 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도 인터넷이라는 바다에서 진주 같은 한 문장을 발견한다.

 

나는 생각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남긴 이 말이 어째서 창호의 마음을 휘어잡았는지는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그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확실할 수도 없었다


그저 멋있다고만 생각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철학적 의미가 담긴 문장을 찾아봤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확 날아와 몸 어딘가에 콕 박히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문장이 어디서 나온 건지어떻게 만들어진 건지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았다


얼핏 들여다봤을 뿐인데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돼있는 설명에 그는 기겁했다


그래서인지 이 기억은 생각보다 일찍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었다


하지만 창호의 마음속에선이 문장은 작은 촛불이 되어 어둠으로 가득 차있는 주변을 살짝이나마 밝히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창호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는 몇 년 전 자신이 웃지 못할 창피한 추억이 된현실을 조금이나마 깨달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만아직까지는 학업보다 연애를 더 중요시하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남아있었다


평소처럼 그는 친구들에게 여자친구에게 뭘 선물해줘야 할지쉬는 날엔 어디를 가야 할지 같은 자랑이 살짝 섞인 고민 아닌 고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의 한마디가 창호의 가슴 속의 작은 불꽃을 상기시킨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그냥 대충 해줘도 걘 좋아할걸.” 


생각’. 그는 언젠가 마주쳤던 데카르트의 말을 기억해냈다


그날 너무 싱겁게 꺼진 불길이 지금이 되어서야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그 말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학교 수업도식사도여자친구와의 시간도며칠째 쉴 틈 없이 방해해왔다


결국 그는 책상 앞에 앉아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에 직면한다


분명 오래전에 떠오른 궁금증인데도 단순한 귀찮음에 외면해왔던 질문.


그럼생각을 하지 않으면 난 존재하지 않는 건가?’


창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와 생각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스타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직접 생각하지 않아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을 멈췄다고 해서 실제로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기도 어렵고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의식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창호는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낸다


바로 흰 백지를 머릿속에 그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꼼수의 허점은 금방 드러났다


이미 백지를 생각해내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민 속에서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창호는 할 수 없이 다른 방법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얼른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잘 준비를 마쳤다


수면 상태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거라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허술한 점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는 것이 정답이라면 어째서 그는 17년 동안이나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나


자신이 이 공간에서 사라졌다는 자각은 없었다


혹여나 다른 사람은 자는 동안 사라지는 걸까


아니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데카르트가 잘못됐나


창호는 이쯤에서 그만뒀다


아까도 말했다시피그는 생각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았다.



역시 이건 아니었나라고 방금 막 잠에서 깬 창호는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그는 좌절했다


더 이상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기발한 작전은 없었다


그는 잠깐의 일탈을 뒤로한 채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창호는 밖에서 들리는 식사 준비 소리와 함께 방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만화 속 인물에 이입을 하려 해도 어딘가에 남아있는 찝찝한 응어리가 방해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상쾌한 저녁 공기로 그것을 완전히 없애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창문을 열어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한다


저 아래에서 어둠 속에 빛나는 가로등에 둘러싸여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여자친구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얼마 전 나에게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한 친구였다


그 순간그는 자신의 뇌 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걸 느꼈다


이어서 그는 완전한 무념(無念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잠깐의 시간굳이 말로 하자면 대략 1.2그는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스스로도 사라졌다는 자각이 있고자신이 사라졌던 순간 눈앞에는 새하얀 배경에 사람 형태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기이한 현상에 잠깐 당황했을 뿐그의 의식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 새끼들아!”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노의 포효를 질렀다


그러고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깜짝 놀라 방 앞까지 달려온 엄마를 지나쳐 집을 뛰쳐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둘의 얼굴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과 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뒤섞여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현관문을 열어 쌀쌀한 저녁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뒤를 돌았다.

 




한편무념의 세계에선 비상이 걸렸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요.”


나도 몰라하지만 태평하게 넘길 문제는 아니야.”


맞습니다혹시 반대편 인간들이 이곳으로 넘어오는 방법을 완전히 익혔고 이곳을 침략하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그것만으론 부족해요아예 우리가 저쪽으로 넘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맞소그래야 하오.”


그들 중 한 명이 하얀색 원탁을 내려치며 일어섰다


저도 동의합니다이대로 이곳을 잃을 순 없습니다.”


그 말에 동조하며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면서 모두 한 사람을 바라봤다


그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노인은 숨을 골랐다.


저쪽으로 넘어가려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저는 이곳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그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군요.”


노인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호흡으로 간신히 말을 마쳤다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노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서로를 향했다


잠깐의 침묵 후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저도... 그 방법을 까먹었는데요.”


저도 기억이 안 나네요.”


당신도?”


아니뭐 좀 기억나는 사람 없소?”


점점 커지는 그들의 목소리는 새하얀 건물 사이로 빛나는 새하얀 달까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