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확률의 남자

1-만남

계란의 노른자가 두 개일 때길을 가다가 떨어진 동전을 주웠을 때원하던 물건을 싼 값에 얻었을 때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우리는 운이 좋다고 한다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운이 좋다는 것은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필자 역시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왔다만약 필자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과 만났던 것은 대학교 2학년의 심화화학개론의 수업이었다어쩌면 그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같은 전공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것은 필자와 같은 학년의 같은 학부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하지만 그와 필자는 놀라울 정도로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필자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건은 그 수업의 기말 고사 시험 결과를 확인하던 날이었다다른 시험 결과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시험 결과한 번도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고레포트나 기말 시험의 결과도 상당이 괜찮았던 필자에게 있어서 그 결과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그러했기 때문에 곧바로 담당교수의 연구실로 향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실험실에서 방금 내려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흰색 가운과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손무엇보다 충혈된 눈과 부스스한 머리는 그가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하는 조교나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이번 1학기에 수요일 3교시와 4교시 연강이었던 심화화학개론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입니다오늘 오전에 성적에 관해 공지를 받았는데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성적이 너무 낮아서 혹시 성적평가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가능하면 교수님과 직접 만나서 성적이 낮은 이유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서 그런데혹시 교수님과 만나볼 수 있을까요오늘이 힘들다면 면담이 가능한 날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필자는 최대한 친절하게그리고 자세하게 필자의 목적을 말했다


잠시만요 교수님께 지금 메일을 보내겠습니다전화가 빠르기는 하지만 아마 회의 중이셔서 전화는 안 받으실 것 같거든요메일은 자주 체크하시는 분이시니 아마 금방 답이 올 겁니다계속 서 계시기도 그럴 것 같으니 여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았다결코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였다의자에 앉아 잠시 방을 둘러보았다제목조차 읽을 수 없는 외국어로 된 책부터 번역되었지만 제목이 너무나도 난해해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책제목조차 적혀져 있지 않은 파일과 아무렇게 어질러진 A4용지더미수많은 실험기구와 잡다용품테이블 위에도 수많은 책들이 어질러져 있었다쓰레기통 옆에는 구겨진 티슈가 하나 놓여 있었고먼지가 쌓인 곳이 넘쳐났다정리가 되어진 것도그렇다고 아주 어지럽혀져 있는 것도 아닌 악간 불편한 상태였다책상 위의 동물모양의 인형들과 작은 주사위나 모형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그 위에는 짙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옆에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조교를 쳐다보았다그는 필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아마도 필자가 무엇을 해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뒤에 먼지를 조금 닦아 내기 위해 인형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다시 움츠림과 동시에 시선은 문 쪽으로 향했다문의 창문으로 검은 모자를 쓴 데다가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쓴게다가 마스크까지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창문이 먼지로 흐릿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교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들어오세요.”

조교가 대답을 하자 그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약간 긴 머리와 흰 피부눈이 크고 눈썹은 옅었다눈가에는 잔주름이 없었고마스크 너머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코가 높았다외모에 관해 잘 모르는 필자조차도 한눈에 미형의 외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옷은 단정했고가방은 세련되었으며먼지의 향만이 가득했던 방 안에 희미하게 상큼한 향을 퍼뜨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조교는 필자에게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을 지금 막 들어온 남자에게 했다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성적 때문에 왔는데요자세한 건 교수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면 잠시 저쪽에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저기 저 분도 같은 이유로 오셨거든요아마 곧 교수님께서 답장을 해 주실 겁니다.”

조교의 목소리가 한층 밝았다아마도 일거리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의 밝은 대답을 듣고 남자는 필자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필자는 그제서야 그에게서 눈을 거두었다하지만 지루한 방을 계속해서 관찰할 생각은 없었다인터넷에 접속되지 않는 휴대전화를 들여 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그렇기 때문에 가방 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어제 밤 꿈에서 보았던 특이한 구조의 건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스케치 중에 잠시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흘겨보았다딱히 그에게 흥미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오랜 습관이었고목적이 있는 행동도 아니었다하지만 그의 행동은 필자를 당황스럽게 했다그는 휴대폰을 보지도책을 읽지도그렇다고 잠을 자고 있지도 않았다그는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혹시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를 흘겨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스케치를 하던 손이 잠시 멈추었지만이러한 행동이 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케치를 재개하였다하지만 더 이상 꿈 속에서 보았던 그 건축물의 모습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지 않았다왜 이 남자가 필자를 보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에게 되물을 뿐이었다안타깝게도 필자는 추리력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그때였다.


교수님께 메일이 왔습니다아마도 1시간 정도 걸리실 것 같다고 하십니다혹시 다른 용무가 있으시다면 잠시 다녀오셔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요돌아오신 뒤에는 오늘 오후 9시까진 여기에 계신다고 하시네요원하신다면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셔도 되는데제가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실험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냉장고에서 원하는 음료수를 꺼내 먹어도 괜찮다고 하시니 필요하시면 마음데로 꺼내 드셔도 괜찮습니다혹시 급한 일이라도 생기시면 실험실은 바로 맞은편이니 찾아와 주세요.”

조교는 필요한 말을 쏟아낸 뒤에 밖으로 나갔다이제 이 방 안에는 필자와 필자를 쳐다보는 수상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이런 거북한 환경에서 한 시간이나 버틸 수는 없었다확인을 해야만 했다때문에 세번째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침내 그에게 말을 걸었다.


 

2-대화

혹시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이 한 마디는 필자가 꽤 오랜 시간동안 신중하게 고른 단어만을 연결시킨 것이었다그가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에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가 그저 필자가 앞에 앉아 있다는 것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최대한 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단어들을 조합하여 내보내어 그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저기그게죄송합니다.”

?”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쩌면 그에게 무언가 실수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요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네요방금 전부터 저를 보고 계시길래 혹시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가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던 것 같네요.”

빠르게 사과했다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요그런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보고 있었던 거예요그런데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을 걸기가 좀 그래서.”

그는 말을 흐렸다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필자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필자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잠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그는 필자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필자를 보고 있었다하지만필자는 오늘 그를 처음 보았다그는 필자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필자 역시 그에게 감사를 받거나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어쩌면 필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필자에게 피해를 입혔거나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사건이 있을 수도 있다아니면 필자가 그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그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필자가 누군가를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은 꽤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질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죄송하게도 제가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저희가 언제 만났었죠?”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희던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그는 꽤 오랜 시간이라고 느껴질 수준의 시간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필자는 그 시간동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이미 이야기는 너무 많이 진행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대화를 끊을 수 없었다필자는 그가 착각이었네요라는 말을 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라는 말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그렇게 해 준다면 이 대화는 단순한 착각에서 시작된 대화로 끝이 날 것이고그렇다면 필자는 아무런 문제없이 자신의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대화는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성적 때문에 오셨다고 들었는데맞나요?”

필자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낮아서 오신 것 맞지요아마도 원래는 A나 A+를 예상하셨을 텐데그렇죠?”

순간 동공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의 말은 정확했다하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성적에 관련해서 교수를 방문한 사람의 목적은 거의 비슷하다누구나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아마도당신의 성적과 제 성적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예요그것 때문에 사과를 드린 거예요고생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제서야 필자는 그가 사과한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하지만 그것이 이해되자 마자 몇 가지의 의문이 생겨났다애석하게도 필자는 그 의문을 가만히 진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잠시만요그런데그건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그걸 사과해야 할 사람은 교수님이나 조교 분이지당신도 피해자 인건 마찬가지가 아닌가요그것보다당신의 성적이 제 성적과 바뀐 건 어떻게 알았지요교수님께 메일이라도 받으셨나요전 못 받았는데.”

아니요아니요교수님께 메일을 받은 건 아니고요그냥성적이 너무 높으니까 누군가와 성적이 바뀐 게 분명하니까요그냥 우연히 당신이 같은 이유로 여기에 온 걸 알았으니까 추측한 거예요.”

그의 대답은 내 의문을 해소해 주기는 커녕반대로 더 많은 의문을 낳을 뿐이었다.


성적이 높은 게 의심스러워서 왔다고요왜요아니 그것보다도어떻게 성적이 바뀌었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전 당신과 대화하기 전까지는 성적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요그냥 교수님이 채점을 실수하거나계산을 실수하거나 뭐 그런 걸 생각했을 뿐이었고요.”

아니그러니까.”

문뜩 필자가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았다약간 붉게 물든 그의 얼굴과 식은 땀당황스러운 표정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저도 모르게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요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거든요안 좋은 습관인데교수님께서 오시면 알게 될 일인데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뭘 좀 마시는 게 어때요탄산은 드시나요?”

그는 몸을 약간 움츠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료수를 마셨다머리 속이 약간 복잡했다그가 어떻게 자신의 성적과 필자의 성적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어차피 교수가 오면 알게 될 일이었기에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침묵이 이어졌다조금 전에 하다 말았던 스케치를 들여 보면서 그 건물의 생김새를 다시 기억해 내려고 하고 있었다물론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왜 그가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가능한 모든 해답을 머리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의문을 순식간에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너무나도 답답했다앞으로 45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이 의문과 싸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그 고문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그의 입에서 필자가 묻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정말 궁금하세요?”

그의 물음은 너무나도 반가웠다세간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마치 수 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솔직히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순간 미소가 튀어나왔지만 자연스럽게 입에 손을 가져다 대어 그것을 감추고 일부러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뭐가 말입니까?”

이 말을 내뱉은 뒤에 필자는 잠시 후회했다혹시라도 소심한 그가 필자의 대답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다행히도 그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성적과 제 성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시지 않았나요원하신다면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믿으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없는 듯 끝을 흐렸다물론 필자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필자는 그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 적은 없어요그러니까 당신이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 거예요들려주려고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물어본 사람도 없었고요그냥 최근 들어서 한 번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된 것뿐이니까요어쩌면 저에겐 우연이 아닐 수도 있고요.”

그는 음료수를 조금 마신 뒤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필자에게 건내 주었다그것은 성적표를 인쇄한 것이었다모든 과목이 A+로 표시되어 있는 성적표였다


제 성적표예요멋있죠전과목 A+에 학점은 4.5점 만점의 성적표는 좀처럼 보기 힘들죠그런데그 성적 중에서 진짜 제 성적은 몇 개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그의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나도 없어요그 성적표의 A+는 제 점수가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성적이에요전부 다전부 우연히 제 성적과 다른 학생들의 성적이 바뀐 거예요그 안에 당신 성적도 있어요보여요심화화학개론그게 원래 당신 성적일 거예요축하해요 A+맞은 거.”

잠시 필자는 머리 속을 굴려서 9개의 과목 전부에서 채점의 실수가 있었고그 실수가 모두 한 사람에게 적용될 확률을 생각해 보았다말도 안 되게 낮은 확률이었다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전 태어날 때부터 운이 아주 좋았어요당신이 생각하는 운이 좋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운이 좋았어요제 앞에서 확률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그 어떤 확률이라도아무리 말도 안 되는 확률이라도 제가 하면 1이 되죠. 100%.”

그 말까지 들었을 때 필자는 차마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그는 공상에 심각하게 빠져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공상에 빠져서 현실과 상상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그가 우스웠고그런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사실도 우스웠다물론그가 눈치챌 정도로 크게 웃지는 않았다마치 필자가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는 것처럼 짧고 간단하게마치 감탄사나 탄식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지만 이미 그는 웃음의 의미를 간파해 낸 모양이었다.


믿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좋아요 제가 지금 당장 증명해 보이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3숫자 놀음

그가 꺼낸 것은 일반적인 6면 주사위가 아닌20면체의 주사위였다


이건 제가 매일 사용하는 주사위예요아직까지 저에게 운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고 있고요. 1에서 20까지의 숫자 중에서 원하는 숫자를 말해봐요.”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소심하기 그지없었던 방금 전까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그의 목소리는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16.”

필자의 대답과 동시에 그는 주사위를 높게 던졌다탁상 위로 다시 떨어진 주사위는 잠시 굴러가다 이내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16, 정확히 16의 수가 위를 향하고 있었다믿을 수 없는 마술쇼를 본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7.”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숫자를 그에게 대고 있었다그는 주사위를 주워 들어 다시 한번 주사위를 던졌다. 7이었다필자는 놀라움에 주사위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하지만잠시 진정한 뒤에 생각을 했다이 주사위는 그가 가져온 주사위였다잘은 모르겠지만속임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마치 필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테이블 위에 원래 놓여 있었던 주사위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말했다.


이번엔 2개의 숫자를 말해봐요. 1에서 6까지의 숫자그리고 방금 전과 똑같이 1에서 20사이의 숫자이렇게 두개요.”

“1이랑 2”

그는 이번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주사위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주사위를 동시에 던졌다두 개의 주사위는 허공에서 잠시 춤을 추다가 빠르게 책상 위로 떨어졌다. 1과 2였다6면체의 숫자가 1이었고20면체의 숫자는 2였다정확히 필자가 생각했던 대로였다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았다.


혹시 동전을 가지고 있으시면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확실한 거 좋아하시죠?”

필자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즉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그에게 2개의 동전을 건내 주었다.


“1개로는 믿기 어려우신 모양이네요전 상관없어요당신은 뭘 원하세요?”

“4, 9, 그리고 양쪽 다 숫자가 나오도록.”

이번엔 양손을 써서 잠시 손 안에서 주사위와 동전을 흔들어 보였다동전의 잘그락 거리는 소리와 주사위가 부닥치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그는 자신의 손 안의 물건을 최대한 높이 던져 보였고그 물건들은 각각 공중에서 자신의 무용을 뽐내다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그러고 보니그가 던진 그 어떤 것도 책상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결과는 당연했다몇 분 전만해도 미소가 가득했던 필자의 입은 미소를 잃어버린 채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여유롭게 동전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제 믿으실 수 있겠어요?”

필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정말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정말로 그의 모든 성적이 단순한 운에 의해 더 높은 성적을 가진 사람의 것과 바뀌었다고 한다면그가 한 행동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 될 것이다그는 자신의 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적을 받는 순간자신의 성적이 다른 사람과 바뀌었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을 것이고오늘 같은 목적으로 교수님을 방문한 필자의 성적과 자신의 성적이 바뀌었다는 것 역시 유추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물론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이상할 것 없을 것이다하지만 문뜩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당신은 왜 굳이 당신의 좋은 운을 버리는 건가요그러니까 제 말은이건 당신이 일부러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지 않나요그냥 가만히 있으면 당신은 최우수 학생이 될 수 있지 않나요장학금도 받을 수 있을 텐데요아니 그보다도그걸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은 텐데요만약 제가 당신이었다면 복권 같은 걸 사서 원하는 만큼 돈을 얻고 편하게 살 것 같은데요물론당신은 그러지 않겠죠이렇게 성적을 일부러 정정하기 위해 오신 걸 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신 것…”

필자는 질문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마치 겨울에 창문을 열어 둔 것 같은 싸늘한 감각 속에서 말을 멈추어야 했다놀랍게도 그 한기는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눈 앞의 남자에게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그의 눈은 푸른 눈이 붉은 빛으로 보일 정도로 충혈되어 있었고믿을 수 없는 공포심과 죄책감이 느껴졌다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무언가를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모든 것은 필자가 생각없이 내뱉은 말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그의 체질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비현실적으로 높은 확률그걸 눈으로 본 사람은 그의 운을 믿을 수 없었을 터이다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막대한 보상이 걸려 있는 확률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막대한 보상을 몇 번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얻어가는 사람은 시기의 대상과 의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그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그를 공격하려 했을 것이며그를 신뢰하는 자들은 그를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그러한 사고들은 마침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이미 복권을 산 적이 있군요맞지요도대체 몇 번이나 산 겁니까?”

잠깐만

그는 필자의 말을 끊었다그의 동공이 축소되고 떨리는 것이 보였다그의 눈에 천천히 붉게 충혈되는 것이 보였다이윽고 공포스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폐에서 마지막 공기를 짜내는 것처럼 짧고 희미하게 음성을 뱉아냈다.


잠시만요.”

그는 책상 위로 머리를 감싼 채로 엎드렸다그와 동시에 그의 마스크가 떨어졌다그의 떨림은 한겨울의 바다의 감각을 연상하게 했다하지만 그 순간필자는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지도쓰러지기 직전의 그를 걱정하지도 않았다단지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히 메웠다필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진정시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말해줘요누군가가 당신을 이용했나요당신을 질투한 나머지 당신을 해치려고 한 건가요괜찮아요다 옛날 일이니까게다가 당신은 운이 좋으니까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나요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당신은 괜찮을 겁니다.”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절 그냥 내버려 두세요그냥 내버려 두세요부탁이에요그냥 절 내버려 두세요.”

그는 그렇게 떨면서 중얼거리는 것을 반복했다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두려움을 느끼며 그 자리를 벗어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을지도 모른다하지만 필자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필자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그의 정신과 신체의 불안정한 상태는 필자에게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었다오로지 스스로의 욕망에 의거하여 대화를 통해 찾아낸 어떠한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하지만 당신이 제가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당신은 방금,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말했습니다정말로 제가 당신을 내버려 두고 떠나길 바랍니까?”

순간그의 떨림이 멎었다그것을 확인한 필자의 심상 속에서 약간의 쾌락이 올라왔다그는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그럼에도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이 만들어 낼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자신이 원하지 않았던그러했던 간에 상관없이 이제 자신의 비밀을 필자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그러한 상황은 꽤나 필자를 즐겁게 만들었다이윽고 그는 숨을 몇 번 정도 고른 뒤 고개를 들었다날카로운 눈길과 함께 마스크 아래에 감추어 있었던 상대의 안면의 정보가 시야에 들어섰다그의 입술은 차가운 검붉은색을 띄고 있었고턱 선과 코는 날카로웠다그 어떠한 흉도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피부는 영화에서나 보았던 배우를 연상시켰다사실그 이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적어도 필자가 현 시점까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수려한 외모였다날카롭게 필자를 바라보는 그를 여유롭게 마주보아 주었다짧은 침묵의 끝에 그는 숨을 한번 고르고 입을 열었다.


맞아요이건 제가 바란 일이에요제가이 상황을 바랬기 때문에 당신은 저와 만나는 것이고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당신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것이지요어디서부터 듣기를 원하시나요당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말하지요하지만 명심하세요제가 바랬던 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을방금 보신 것처럼 제가 원하는 일은 어떤 방향이든 항상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제가 이야기를 시작한다면당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당신은 제가 원했던 것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그래도 상관없으신가요제발신중하게 결정해 주세요부탁입니다전 경고했어요.”

그의 말을 듣고 물러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을 하기는 했지만당연하게도 처음부터 필자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일부러 책상을 몇 번 정도 두드린 뒤에그의 미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2-운과 행복은 반비례한다

1-모든 것의 시작

제가 들고 다니는 이 주사위는아주 오래된 주사위입니다정말 오래 전에 선물로 받은 주사위이고제가 겪어야 했던 모든 것들이 시작된 계기가 된 물건이기도 합니다전 정말로 이 물건을 싫어하지만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는 그런 물건인 셈입니다왜냐하면이 물건은 제가 부모님께 받은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이 물건을 받은 것은 제가 9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였습니다아버지는 저에게 커다란 보드게임을 사 주셨고전 정말로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정말 재미있었거든요아버지와어머니와그리고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습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전 그 게임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왜냐하면그 게임이 제가 스스로의 능력을 알게 해 주었으니까요전 한 번도 게임에서 진 적이 없었습니다한 번도주사위를 굴리면 언제나 제가 원하는 숫자가 나왔고카드를 뽑으면 항상 저에게 유리한 카드가 나왔습니다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그러한 상황이 반복되니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저에게 엄청난 운이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말입니다.


저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그래서 많은 곳에서 시험을 했지요혹시 아시나요문구점에서 파는 종이로 된 뽑기라고 하는 추첨게임을아니면 동전을 넣고 물건을 뽑는 기계를 아시나요요즘은 가챠라고 부르던데전 그러한 게임을 하면서 조금씩 제 능력이 축복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전 언제나 제가 원하는 상품만을 손에 넣었으니까요정말 행복했습니다다른 친구들도 저를 좋아했지요항상 원하는 물건을 뽑아 줄 수 있었으니까요다들 절 부러워했습니다이윽고 그 사실을 저의 부모님께 말씀드렸지요. ‘저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전 제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가 있어요.’, ‘전 운이 엄청나게 좋아요.’라고 말입니다


두 분은 처음에는 제가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셨습니다그저 웃으면서 그렇구나좋겠네라는 식으로만 대꾸해 주셨을 뿐이었으니까요그리고 전…. 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전 두 분이 더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그래서그래서 전 주사위를 가지고 가서 두분 앞에서 던졌습니다방금 전에 제가 당신에게 보여줬던 것처럼원하는 숫자를 말하고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계속 반복해 보인 것입니다처음에는 그저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던 두 분의 표정이 점차 놀라움으로 가득한 얼굴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웠습니다두 분이제 능력을 알게 되는 것이 자랑스러웠으니까요두 분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만약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었을 겁니다왜냐하면그날로 부모님께서는 제가 아니라 저의 능력을 사랑하시게 되셨으니까요.


전 그날 밤 두 분께서 몰래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저에 대한 이야기였지요그분들은 저의 능력을 잘 이용하면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다음 날 어머님께서는 무언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그 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지금은 알고 있지요그건 복권이었습니다그리고는 1에서 45까지의 숫자 중에서 제가 원하는 숫자를 6개 골라 보라고 말씀하시더군요전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그냥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그래서 전 아무렇게나 숫자를 선택했습니다말 그대로 아무렇게나요


며칠 뒤에 부모님께서는 엄청나게 실망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그리고는 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질타를 하셨습니다제가 한 모든 것이 그럴듯한 사기행동에 불과했다고 말씀하셨지요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고요당연히 당첨되지 않았으니 실망하신 것이겠지만전 그게 저에게 실망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제 능력이 시원치 않아서 그들이 실망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했습니다비싼 물건을 뽑아서 드리기도 했고몇 번이나 게임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 드리기도 했고엄청나게 낮은 확률의 무언가를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기도 했습니다전 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거든요.


부모님께서는 이런 저의 모습을 보시고 몇 번이나 그 종이를 다시 가지고 오셨습니다그리고는 몇 번이나 같은 요구를 하셨지요하지만이미 말한 것처럼 전 그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정말로 그저 놀이라고 생각했지요어머니가 생각하는 숫자를 맞추는 놀이 정도로 말입니다그래서 전 그냥 그렇게 했습니다


만약에 딱 한 번만이라도딱 한 번 만이라도 부모님께서 솔직하게 말해 주셨다면솔직하게 너의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으면그 숫자놀이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다면전 그분들이 원하는 번호를 뽑아 드렸을 겁니다하지만 그분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아마 저를 이용하는 것을 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요그렇게 저의 숫자놀이는 몇 번이나 부모님의 실망한 얼굴과 함께 끝을 맞이해야 했습니다그럴 수록 저는 더욱 저의 운을 이용해서 그분들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노력했고요그러한 생활은 몇 주나 반복되었습니다그게 반복되자 부모님의 머리 속에는 무언가 스쳐 지나간 모양입니다.


저는 결국 마지막까지 부모님의 생각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아마 그 때 부모님의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을 겁니다. ‘이 아이의 능력은 자신이 직접 구입한 것에만 한정된다라는 생각이요사실 그 생각은 타당했을 겁니다제가 스스로 고르거나 구입한 물건에는 운이 적용되는데자신들이 사다 준 복권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니까요그래도 부모님께서는 상당히 기뻐하셨습니다당시에 제가 9살이었으니, 10년만 기다린다면 복권에 당첨될 수 있다고 계산하셨기 때문일 겁니다저는 그걸 몰랐지요그냥 부모님께서 마침내 제 능력을 인정해 주셨다고그것 만으로도 저는 기뻤습니다그렇게 세 가족은 그날 정말로 행복했습니다그날부터 부모님께서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습니다정말로 저를 위해 뭐든지 해 주실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제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걸 가져다 주셨고제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정말로정말로 꿈만 같은 나날이었지요모든 것이 제 것인 것만 같았고모든 것이 제 편이었고제 능력은 정말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당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2-붕괴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습니다저의 부모님께 있어서는 더욱 긴 시간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모든 문제는 그 10년의 간극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당신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정확히 10년 후에 수 백억에 달하는 돈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실 것 같습니까만약 당신이 10년 전으로 돌아가서 가상화폐를 잔뜩 구매해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당신이라면 미래의 일을 걱정할까요현재를 희생으로 머나먼 미래의 일을 준비할 것이라고 봅니까아마 그러지 않을 겁니다사람들이 지금도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자신이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벌어서 그걸 착실하게 저금해 두는 이유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일 겁니다하지만제 부모님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미래가 확실해졌기 때문에미래를 대비할 필요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날로 부모님은 저를 대하는 태도는 물론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변했습니다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되었지요솔직히누가 노력을 하겠습니까보험이 있는데전 당시에 어렸기 때문에 정확히 부모님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는 모릅니다하지만 정확한 것은 그날을 기점으로 저의 집에는 사치품의 수가 점점 늘어갔다는 것입니다보석이나고급 전자제품 같은 것이 말입니다어머니께서는 집안일과 요리 등을 대신해주는 가정부를 고용하셨지요어머니께서는 더 이상 집안일에 손을 대지 않게 된 것입니다저도 뭐학원을 몇 군데 다니느라 바쁘게 살았습니다친구도 많았고자랑거리도 많았지요웬만한 집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물건들이 제 집에는 널려 있었으니 모두가 부러워할 만했지요그렇게 한 2년정도 지났을까요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와 계시더군요저는 마냥 좋았습니다아버지가 좋았으니까요그날은 정말 아버지와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그런데 그런 날이 계속 이어지자 전 불안해졌습니다그렇게 몇일이 지났을까요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크게 싸우셨습니다지금도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기억이 납니다


누구는 집에서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왜 나만 일을 해야 하냐나도 좀 쉬고 싶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맞습니다아버지께서는 회사를 그만 두신 겁니다그 뒤로 아버지께서 일을 하러 나가신 적은 없었습니다그 대신 아버지께서는 집에서 다양한 취미를 즐기셨습니다커다란 골프채를 무더기로 사 오신 적도 있었고카메라를 사서 구석에 처박아 놓으시기도 했습니다시계는 또 얼마나 사는지집에 시계전시장이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아버지께서 퇴직금을 얼마나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거의 대부분을 자신의 취미활동을 위해 사용하셨을 겁니다특히 이름은 모르지만 날카롭게 생긴 자동차에는 수 천 만 원을 투자했다고 직접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머니께서 그러한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두 분이 싸우는 횟수는 늘어갔고결국 두 분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이윽고 경쟁적으로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지요아버지는 아버지대로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무조건 사들였습니다얼마를 썼는지는 저도 모릅니다하지만 아버지만 해도 수 천 만원에 달하는 자동차가 있었으니적어도 수 억에 달하는 돈이 사용되었을 겁니다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요부모님께서는 더 이상 모아 놓은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정확히는 알게 되셨을 겁니다전 가계의 사정을 알 방법이 없으니까요그리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두 분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셨을 것입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분에게는 보험이 있었지요저라는 보험 말입니다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돈이 다시 생기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그 보험이두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길로 이끌고 말았습니다두 사람은 막대한 양의 돈을 빌려서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삶을 유지하기로 한 것입니다아마돈을 빌려준다고 하는 곳이라면 일단 돈을 빌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2년을 더 살았습니다, 2년을 더 살았지요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 같나요혹시 차압이라고 아시나요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돈을 뜯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렇게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집도차도사치스러운 물건들도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저희 집안은 그렇게 파산한 것입니다.


저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몇 년 뒤는 커녕 당장 하루를 사는 것도 걱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그런데도부모님께서는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지요그 대신에 사채업을 하는 곳에서 돈을 빌렸습니다아마도요몇 번이 말하지만전 부모님께서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모릅니다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는 있지요파산한 사람이은행에서도 제3금융기관에서도 돈을 빌리는 것이 불가능한 신용등급 최하위의 사람이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 따로 있겠습니까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이젠 정말로 돈을 가져올 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누가 믿겠습니까? 1년만 더 기다리면 자신들이 복권에 당첨될 것이니 돈을 좀 빌려 달라는 말을저라도 믿지 않을 겁니다두 분께서는 점점 지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리고 마침내 두 분께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탓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자신들의 인생이 망한 것은 모두 제가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1년이 시작된 이유였습니다부모님께서는 저의 다른 용도를 찾아내셨지요그분들은 제가 아무리 맞아도 몸에 멍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두 분은 항상 술에 취해 저의 온 몸을 구타했습니다온갖 욕을 들어야 했습니다. “넌 쓰레기다.”, “왜 우리를 이 꼴로 만든 거냐?”, “너만 아니었다면.”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매일하루도 빠짐없이맞고 또 맞아야 했습니다집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지만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전 두 분을 사랑했고두 분도 저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으니까요그 분은 항상 저를 때린 다음엔 약을 발라 주셨고술이 깬 뒤에는 사과를 하셨으니까요전 두 분이 그래도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렇게 생각했으니그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3-그 날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전 완전히 폐인이었지요제대로 먹지도 못하고학교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항상 맞으며 지냈으니 모든 것이 두려웠습니다정말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습니다그래도 죽지는 못했습니다저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마침내 그 날이 왔습니다. 19번째 생일이 말입니다어디에서 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부모님께서는 정장을 입고 계셨고정말 오랜만에 보는 호화로운 식탁이 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저는 정말 기뻤습니다부모님께서 제 생일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이 기뻤고오랜만에 보는 그 풍경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취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저를 때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웃으면서 저를 안아주는 부모님이 그날 그 곳에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행복했습니다그렇게 전 눈물을 흘리면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습니다부모님께서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고모든 것이 마침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부모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렇게 호화롭고 행복한 식사가 끝이 났고그분들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습니다그분들은 돈을 주셨고그 곳에서 종이를 사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저는 그 분들의 말을 따랐고정말 오랜만에 숫자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었습니다긁어 내는 이상한 종이도 있었지요그 종이와 함께 제 안의 무언가도 함께 무너져 내렸죠.


전 비로서 그게 복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날 처음으로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동시에부모님께서 저에게 사과를 하고약을 발라주고잘 대해 주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그 분들은 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분들이 사랑하고 있던 것은 저의 능력이었습니다그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의 돈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모든 것이 허무했습니다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저 자신이 바보 같았고그 시간동안 그분들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참아온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부모님께서 저를 사랑할 것이라고그 종이조각보다 우선적으로 저를 구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제가 쥐고 있었던 수 십 장의 복권들을 허공에 뿌린 뒤에 도로로 달렸습니다부모님께서 저를 구하러 올 것을 기대한 것이겠지요하지만헛된 기대였지요부모님은 제가 아닌 복권용지를 따라 달렸습니다저를 향해 거대한 트럭이 달려올 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더군요그때 저는 확신을 했습니다저 사람들은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그저 증오스러운 학대범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약 그날 제가 죽고부모님께서 복권을 손에 쥐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부모님께서 원하시는 건 돈이었고추후에 알게 되었지만제가 선택한 복권들은 모두 당첨되었으니까요저는 상처받은 상태로 살 필요도 없었겠지요제가 가진 능력을 저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니까요빌어먹을 운 때문에 몇 번이나 구조되고 회복되는 일도 없었을 터지요당신과 같은 피해자가 양산되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하지만 제 능력은 저를 죽이지도부모님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트럭의 운전사는 달려드는 저를 보고 급하게 핸들을 꺾었고하필이면 그 방향에 서 있던 저의 부모님을 들이 받았으니까요그렇게 제 부모님은 즉사했습니다


추악하게도그건 저의 소망의 형상화된 결과였습니다저를 사랑하지 않을 바에는 그냥 눈 앞에서 죽기를 바랐던아주 찰나에 불과하지만 분명해 존재했던 소망을 저의 능력이 이루어 준 것입니다각각 손에는 당첨복권이 들려 있었으니나름대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이후에 저는 그냥 떠났습니다다시는 복권을 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제 능력을 부당하게 이용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그 순간입니다다른 모든 이들과 거리를 둔 것도그 어떠한 소망도 바라지 않게 된 것도모두 제 능력 때문입니다제 능력은 저를 불행하게 할 뿐이니까요제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저주였던 것입니다찰나의 소망조차 구분하지 못하고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어내는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끔찍한 저주입니다.


그리고이 저주는당신조차도 불행하게 만들겠죠.


 

3-이야기의 끝

1-계약에 얽혀서

그게 끝인가요?”

한동안 다물고 있었던 입을 열었다눈 앞의 남자는 몹시 지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이상 할 말은 없어요제가 해야 할 이야기는 끝났고당신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도 모두 들었을 거예요.”

그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이후 가방에서 티슈를 한 장 뽑아 이마와 귓가를 흐르던 땀과 눈 아래에 고인 액체를 닦아 낸 뒤에 티슈를 구겨 자신의 등 뒤에 위치한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휴지는 정확한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갔고이윽고 그의 몸에 가려 시아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당신 차례네요.”

그의 단호한 말투에 잠시 몸이 굳었다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단호했던 탓에 잠시 뇌의 기능이 정지된 듯했다하지만 이내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의 말이 맞았다이제 내 차례였다이야기를 시작하기 전하나의 계약을 했다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이 이야기를 듣는 조건이었다그리고그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그는 스스로의 능력을 저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고그러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아주 잠시침묵을 유지했다그리고 너무 빠르지도너무 느리지도 않다고 생각되는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가요?”

이 문장은 정말로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뱉은 문장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이 문장을 내뱉은 이유는 조금 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적어도 그가 원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 필자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만약 필자의 생각이 정확하다면그것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예상이 빗나가기를 바라며 가볍게 그를 자극해 본 것이었다그는 필자의 말을 듣고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로 필자를 바라보았다그의 눈은 불과 30여 분 전에 보았던 그 눈이 아니었다그것은 더 이상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아니었다그것은 필자의 동공을 관통하여 뇌 속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이 날카로웠고그런 눈을 바라보는 것은 심장에 19cm의 대못을 서서히 찔러 넣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결국필자는 그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필자의 모습에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요알고 계시잖아요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지금 생각하고 계신 것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그의 입가에 생긴 미소를 곁눈질로 보는 것 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이마에는 땀이 흘렀고입 속은 마르기 시작했고손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그렇게 좋지 않은 신호였다필자는 긴장하고 있었다상대를 향한 두려움과 공포감이 이어졌다이러한 상황에서 무작정 대화를 진행하는 것은 결단코 현명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었다그러했기에 우선적으로 몸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혹시 티슈를 한 장 빌려주실 수 있나요?”

그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로 그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고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금 꺼냈던 티슈를 통째로 필자를 향하게 들어 보였다곽에서 한 장의 티슈를 뽑았고얼굴에서 흘러내려 떨어지려 하던 땀을 닦아냈다이후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에 티슈를 말아 휴지통으로 던졌다땀에 젖어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종이뭉치는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갔고이내 눈 앞의 남자에게 가려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천천히조용히 숨을 들이쉬었고 내쉬었다손의 떨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새끼손가락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지만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행히도바로 그 순간이 다음 수를 던지기에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잠시 피해 있었던 시야를 다시금 눈 앞의 남성에게 돌리며 최대한 뻔뻔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아주 잠시그는 필자의 입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지만 이내 그것이 열리지 않을 것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그의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잡히는 것이 보였다이번에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의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눈빛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설산에 알몸으로 누워 눈 속에 파묻히는 고통보다도차디찬 겨울 바다 속에서 가라앉아 숨조차 쉬지 못하는 고통보다도 더욱 날카롭고 살벌한 시간이었다수 초의 시간이 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차가운 눈의 주인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로 필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미간이 한 층 더 주름 잡히는 것이 관찰되었다동시에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필자의 속을 휘젓고 있었던 그의 눈빛이 무디어지는 것도 느껴졌다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 쉬었다이 순간만큼은 손으로 입을 가리는 평소의 습관이 감사했다마침내 눈 앞의 남성은 눈을 감고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었다그대로 엄지를 자신의 미간에 고정한 채로 몇 번이나 미간을 누르는 작업을 반복했다이 순간필자의 전략이 순조롭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확신했다그의 확신이 점차 의심 속에서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물 속에서 마침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밧줄을 찾아낸 듯한 안도감이 몸 전체를 감쌌다그렇게 그가 5번 정도 그 작업을 반복했을 때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혹시 생각 자체를 하고 있지 않던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어쩌면 제가 당신을 과대평가했을지도 모르고요조금 극적인 상황을 기대하긴 했지만사실 모든 상황이 제 의도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니까요이건 제 능력 밖의 일이었을지도 모르고요하지만어쩌면당신이 저를 과소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당신이 이미 제가 이러한 질문을 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고 있고그렇게 시간을 끈다면 마침내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을 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제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버리고 말이지요정말놀라운 생각이네요제가 당신의 상황이었다면 절대 상상하지도 못했을 거예요제가 타인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한다는 멋지게 이용하셨네요머리가 좋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신기해요.”


그의 말에 최대한 반응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시야 속으로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의 살벌한 미소가 들어왔다줄을 붙잡고 간신히 빠져나온 늪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다시금 필자를 늪 속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불안감이 덮쳐왔다살벌한 미소가 담긴 입술 사이에서 순간차디찬 입김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요왜냐하면제가 원하는 것은 제가 가진 능력을 없애는 것이고당신은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죠이제 감이 잡히나요왜 제가 경고를 했는지제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에요하지만 당신은 제 경고를 무시하고 결국 저랑 약속을 했지요당신이 부디 무언가 방법을 알고 있기를 바래요왜냐하면만약 당신이 저와 한 약속을 무시하고 저버린다면전 아주 많이 화가 날 것 같거든요이미 저번에 저를 실망시킨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들으셨으니굳이 그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극도로 짧은 순간 속의 소망일지라도그게 제 소망이 되어 버리면그건 곧 당신의 미래가 되는 겁니다.”


이것만은 필자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필자는 그가 절대로 같은 결말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그것이 무의식 깊은 곳에 위치하여 적어도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고자 소망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그의 무의식 깊은 장소에 위치한 사고는 응보였다책임을 지지 않는 자를 처벌하고자 하는당시의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하였다는스스로를 향한 합리화가 존재하였다등골이 오싹한 감각은 필자가 가장 선호하지 않는 감각 중 하나였다그 어떠한 위험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공간 속에서 가장 안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에도눈 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향취를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전 굳이 제 입으로 제가 원하는 것을 말했어요궁금하네요머리가 좋은 당신이 이번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그의 발언 속에서그가 소유한 확신이 느껴졌다스스로가 틀리는 일은 없다는 한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과 스스로의 타당성을 향한 두터운 신뢰가 존재하였다그러한 신뢰 속에서 필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이가 아닌스스로의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에 불과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발언의 무게는 남달랐다단순한 필자의 추측에 비한다면그의 입에서 빠져나온 단어들의 무게는 본질적으로 달랐다필자는 완전히 막다른 길에 놓이게 되었다그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그의 요구는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시하고 이 방 밖으로 나서는 것도 불가능했다그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며그를 무시하더라도 필자에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박을 하기엔 너무나도 명확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더욱이 당시의 필자는 아직 죽음을 향한 공포감이 남아 있었는 미숙한 상태였기에 더욱 그러했다필자가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그에게 필자가 했던 일을 정중하게 사과하고최대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하는 것 정도였다그렇다면 적어도 트럭에 치이는 것은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아마 이 선택은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가 바라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는 자신에 의해 타인이 피해를 입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아마도 그도 책임감을 지니고 사죄하는 필자에게 큰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2-뜻 밖의 기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는 참이었다최대한 정중하게 그에게 사과를 하기 직전이었다하지만 한 음절을 내뱉는 순간눈 앞의 남자는 지금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자세를 고쳐 허리를 굽혀 입에 양 손을 가져다 대는바로 필자의 자세를 흉내 냈다그와 동시에그의 자세가 바뀐 덕분에지금까지 필자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어떠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그것은 바닥에 떨어진 채 뒹굴고 있는 2장의 티슈였다그 물체를 보는 순간지금까지의 필자의 생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마치 오랜 시간 작성해 온 긴 문서를 모두 선택한 뒤에 DELETE키를 누른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고새로운 계획으로 문서가 채워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도박이었다이전의 계획에 비한다면 훨씬 더 불확실했고훨씬 더 위험했지만훨씬 더 재미있어 보였다무엇보다이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다만약 이 방법이 진정으로 효과를 낼 수 있다면이는 필자라는 개체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상대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었다모든 것을 잃거나모든 것을 얻거나이는 분명 도박이었다. 6연발 리볼버 속에 3개의 총알을 넣고 당기는 놀이와 같았다그러한 매력의 취기 속에서 잃어버렸던 미소가 돌아왔고두개골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지압을 하는 것 같은 짜릿한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입가에 대고 있었던 양 팔을 책상 위로 포개어 놓았고허리와 목을 반듯하게 세웠다두 사람의 자세는 1분전과 완전히 반대된 모습이었다필자는 처음으로 그에게 당당히 미소를 보인 채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이제 시간이 된 것 같네요지금쯤 교수님께서는 이미 돌아와 계실 것 같네요당신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지만이제 전 가 봐야 할 것 같네요꽤 재미있었어요.”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필자를 잠시 바라보았다하지만 이제 그의 눈을 바라볼 필요는 없어졌다그의 눈은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도고통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그저 필자의 뇌를 기분 좋게 자극하고 있었다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온 짐을 정리하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 가방을 들어올렸다그는 여전히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필자의 채비가 모두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약간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는 건가요?”

여기서 할 일은 이제 더 없는 것 같으니이제 제 할 일을 하러 가야지요기억 안 나세요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의자를 밀어 넣으며 가볍게 대답했다그는 여전히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필자가 출입문 방향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는 순간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필자의 앞을 가로막았다처음에 느끼긴 했지만 지나치게 커다란 키와 체격이었다필자의 키가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그가 앞에 서는 것 만으로도 거대한 장벽이 나타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키였다올려다본 그의 눈 속은 의문이 점차 지워지고 분노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그럼에도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는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점차 세어 나오기 시작했고세어 나오는 분노의 물줄기는 점차 커져 마침내 그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모양이었다.


아니요당신은 여기서 못 나가요나갈 수 없어요당신은 아직 제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어요만약 그냥 나가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전 당신이 약속을 깼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일방적으로사과도 없이무례하게저는 당신이 약속을 깬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요아무리 제가 그러한 상황을 보고 싶지 않더라도무의식적으로 문득 든 생각은 제가 통제할 수 없어요그 생각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겠죠전 그런 상황 자체가 싫어요당신이 잘못한 일인데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떠났기 때문에 나타날 일인데당신이 무례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결국 당신은당신들은 그걸 제 탓으로 돌리잖아요!”


그는 탁상 위에 놓여 있었던 주사위를 책상 위로 던지며 조용히 소리쳤다손을 벗어난 주사위는 책상에 튕긴 뒤에 방 전체를 휘저으며 나아갔고겨울날의 첫눈처럼 가라앉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먼지들을 다시금 부유하게 했다그와 동시에 그의 흥분된 음성이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떨리는 음성에 방 전체가 진동했고떠오른 먼지들의 운동조차 떨리는 듯 보였다하지만 그 흥분은 절제된 흥분이었기에어쩌면 그가 그러한 상황을 바랬기 때문에그의 목소리는 복도 너머의 교수의 방까지는 흘러가지 않은 모양이었다조용히 메아리 치던 그의 목소리는 몇 초 만에 가라앉았고흔들리던 먼지들도 다시 제자리로 가라앉았다다시금 조용해진 방 안에서 그는 조용하지만 살기를 가진 눈으로 필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자리에 앉아서 해결책을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세요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면적어도 노력하는 척이라도 하시라고요아니면 진심을 담아 사과라도 하세요제가 당신이 죽는 것을 바라게 하지 마세요이건 협박이고당신은 이걸 거부할 이유가 없어요솔직히 당신은 조금 짜증나는 사람이지만모든 걸 안다는 듯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사람이지만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요그 잘난 머리를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생각이라는 것을 해 봐요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잖아요당신의 그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알고 있잖아요제발제발이 이상 저를 화나게 하지 않기를 바래요.”


아주 잠시 침묵을 지켰다미소를 거둔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하얀 피부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눈은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었다약간의 눈물도 고여 있었다주먹을 쥔 손은 떨리다 못해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아주 잠시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필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했다그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면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 평생동안 걸을 수 없거나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생각보다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눈이나 심장혹은 신경에 문제가 생겨 평생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어느 쪽이든그다지 좋은 미래를 상상하기는 힘들어 보였다그러한 미래보다는 그냥 깔끔한 죽음이 더 긍정적으로 그려졌다그러했기 때문에 여유롭게 원래의 계획을 속행했다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최대한 환한 표정을 지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이미 드렸어요그러니 이제 정말로 가 볼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은 이상한 자세로 앉아서 내 말을 들은 게 전부입니다이미 줬다고요이미주긴 뭘 줬다는 거야그래애당초 당신 같은 무책임한 사람에게 기대를 한 것 자체가 실수였어당신 같은 사람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준 것 자체가 실수였다고장담하는데이제 끝이야애원을 하든 뭘 하든더 이상 기회는 없어알았으면 가이젠 정말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울려 퍼진 그의 음성은 이제는 절제되지 않았다언제까지라도 울려 퍼질 기세로 나아갔다복도 너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황급히 걸어오는 두 사람의 발소리도 점차 커졌다아마 교수와 조수가 소리를 듣고 확인을 위해 다가오는 소리일 것이다그는 목에는 핏줄이 그 속을 흐르는 혈액이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그런 그를 옆으로 살며시 밀어낸 뒤에 문으로 향했다문의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해를 못 하신 모양인데전 당신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저 쓰레기통을 보면 알게 될 겁니다.”

눈 앞의 남자는 순간 쓰레기통을 향해 고개를 돌린 뒤 다시 필자에게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듯 다시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쓰레기통으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쓰레기통의 바로 옆까지 다가섰다그곳에 있던 것은 구겨진 두 개의 티슈였다그는 그것을 집어 든 뒤에 혼자서 중얼거렸다.


두개라고그럴리가?”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필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필자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 넓은 세상에서 당신이 희한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기를 바라요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요이게 원래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돌려 그 방을 빠져나왔다과연 필자의 도박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내 그러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도박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거처로 향하는 도중에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쓸 데 없는 걱정으로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교수와 조교가 가까이 와 있었고적당히 변명을 한 뒤에 그들의 연구실로 발을 옮겼다


예상했던 대로 필자의 성적은 어떠한 착오가 있어서 낮게 나온 상황이었다잠시 그들에게 원인이 된 학생에 대해 이야기할까 생각했지만그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다일이 모두 끝나고 상쾌한 기분으로 거처로 발을 옮겼다한발 한발을 내딛는 순간 약간의 두려움이 엄습하였지만거처로 도착할 때까지 그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만족 속에서 도착한 의자에 걸터앉아 양 손을 모아 이마에 가져다 댄 채로 있었던 일을 돌아보았다


필자의 생각이 정확했다면그의 능력은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나자신이 원하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그의 불우한 유년시절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만약 그의 능력이 그러한 것이었다면그가 그의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필자는 그의 능력이 확신이라고 확신했다그가 그의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은 그의 부모가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고그의 부모가 복권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그가 부모가 자신보다 복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그가 던진 주사위가 정확히 원했던 숫자를 보였던 것은 그 스스로가 그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다르게 말한다면그 확신이 상실된다면그의 능력도 상실될 터이다.


그 순간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휴지로 땀을 닦아낸 그 순간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휴지를 던졌다그는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다그가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휴지가 정확히 쓰레기 통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휴지통 앞에는 구겨진 티슈 두개가 놓여있었다필자는 그 중 하나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필자가 도박을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그가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그는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할 것이다정말 어쩌면필자라는 존재가 그의 능력을 소멸하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그 순간스스로의 소망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 그 순간그의 능력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 필자의 계산이었다그 계산은 정확했을 것이다아직까지 필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