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거인 아이작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를 보라.

당시 전통적이고, 정설이고, 보편적 타당할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옥스포드 대학 교수가, 라틴어로, 기하학을 도구로 온 세상의 운동법칙을 수학적으로 타당하게 증명하였다.

이후로,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하며 이전까지 자연을 기술하던 도구들은 모조리 대체되었다.

정작 프린키피아를 구성한 형식은 철저히 기득권의 언어로 쓰여졌다.


피카소는 큐비즘의 시초이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림으로 사진을 찍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철저하게 기존 회화 이론에 통달한 후에, 그 언어를 뒤섞어 평면에 입체를 표현하고자 했다.


과학은 혁명으로 일으켜진 학문이다.

항상 후학이 선현의 가르침에 의문을 표하고, 반증하는 것으로 첨예하게 세상을 분해해왔다.

그러나, 그 연구는 필히 선현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수받은 후에 자연을 증인삼은 후에야 이뤄진다.

"준결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준과학자는 존재한다."

준결정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연구원이 처음 자신의 이론을 설파할 때 학부 결정학 교재를 건네받으며 들은 핀잔이다.

혁명으로 고도화된 학문인 만큼, 혁명의 검증에 목숨거는것이 바로 과학이다.


얼마 전, 한 짤방이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한 식당 안에 사람들이 한가로이 저녁식사를 즐기는 와중, 창 밖 거리는 불타오르고 있다.

사진 설명으로는, 프랑스에서는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식사예절은 지킨다는 구절이 적혀있다.

믿거나 말거나, 세상을 뒤엎을지언정 그 형식은 철저히 기성적이어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방증이다.


과학자는 자연의 숨겨진 법칙을 드러내어 자신만의 이론으로 정립하고자,

공학자는 결함의 극복으로 인간에게 새로운 권능을 부여해 주고자,

철학자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도달하여 온 세상을 설명하고자,

예술가는 누구도 보여준 적 없는 감정의 폭풍을 이끌어내고자,

위정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내 맘대로 주무르고자,

창작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나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우선, 

말이 통하든

소리가 들리든

색과 형태가 보이든

감각과 표정이 드러나든


첫째로,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그것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독자/청자/관중이 패턴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다.

때문에 언어를 단순화 하고자 복잡한 개념을 미리 때려넣는 것이다.


미분방정식과 화학양론, 전자기 법칙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과 어떻게 파동방정식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겠는가.

내장과 오장육부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믿고 종양 절제를 맡기겠는가.

흔히들 인물화를 비판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레퍼토리로 비례가 맞지 않다고들 한다.


유일한 반론은 무명에 배우지 못한 예술가가 세상을 뒤집는 것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천재적인 직관력이 있었다.

그들만의 타고난 재능과, 감정에 대한 학습으로,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은 결과적으로 고도로 이해 가능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과정에 대해 말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결과로 보여주는데, 생체계산기로 어찌 활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하자면, 세상에는 그런 생체계산기가 언제 어디에 도사릴지 모르는데, 우리는 그저 매일매일 그 곁을 스쳐지나간다.

그 계산기를 주워다가 기술해 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혹은 나 스스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기성언어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수필 전작
소비자, 생산자. 저질 컨텐츠?
수필 다음작
경수필?) 잔상디스플레이의 활용에 대한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