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즐거운 편지


부러진 샤프심, 사기그릇에 내인 실금처럼, 길게 늘어진 머리칼, 손이 쉽게 닿을 자리에 생긴 구김, 지문 아래 그어진 밑줄, 동그라미, 형광펜, 메모, 와 같은, 흔적. 연에게서 돌려받은 교재에는 늘 흔적이 남아있었다. 특히나 수업 중에 수차례 강조되기도 하던, 고심해야만 하는 지문 위에는, 이걸 빌린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온통 연이 남긴 자국이었다. 펜 자국이 피가 몰린 혈관처럼 종이 위에 돋아날 때마다. 마른 잉크가 책상등을 얄팍하게 반사할 때마다, 그것은 꼭 정말로 맥동하는 것 같았다. 밑줄, 켜켜이 그어진 밑줄, 말과 말을 잇고 묶는 끈. 나는 페이지의 구겨진 귀퉁이를 손끝으로 훑었다. 눌러도 보았다. 접힌 선은 지워지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 어렴풋한, 그러나 분명한, 굴곡. 도드라진 감각이 지문에 옅게 남았다.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싫지 않았다. 한 올 한 올 떨어져있는 머리칼에서 머리를 뜯는 연의 모습을, 구겨진 쪽의 모퉁이에서 고심하는 연의 모습을 보았다. 느낄 수 있는 흔적에서 나는 연의 모습을 찾았고 그 모습은 싫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기억을 돌이켜 보아도, 내가 분명하게 연상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기억 속에서도 다름은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책상. 연두색 플라스틱에 접이식 다리가 달려 있던 어린이 탁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찾아오는 가정학습 선생님께 가나다를 배울 때에도 종종 나의 책은 연의 책이기도 하였다. 어린이 만화 캐릭터의 패턴이 그려진 노란 벽지, 그곳에 구멍이 뚫린 듯 내어져 있던 어른 몸통 만한 창 두 개, 늘 해가 들고 허공에 티끌이 반짝이던, 그곳에서 함께 가, 가지, 가끔, 가르마, 따위를 외었다. 나와 연의 책 위에 그려지던, 때로는 나의 책 위에서만, 어리숙한 선과 선으로 단어가 되던 가, 가지, 가끔, 가르마. 손이 저려 쓰기를 멈추면 그제서야 써 내려온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것은 밟힌 지렁이 마냥 구불구불했고 연의 글자는 늘 곧았다. 나는 나은 쪽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짧고 안정적인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형태를 갖추는 느낌은 싫지 않았다. 


내가 어찌하지 않더라도 사소하고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오는 것들이 좋았다. 가족과 가족의 것이 그렇듯 연과 연의 것들은 모두 자연스러웠다. 나의 책에 연의 글씨가 있었고 내가 있던 자리에 연은 있었다. 내가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연의 이름을 외면 대답은 항상 들려 왔다. 어딘가 가고자 한다면 현관문부터 연은 있었다. 떠나는 길에도 연은 있었다. 연은 사소하게 있었다. 늦지 않게 일어나면 늘 책상 위에 머물던 햇살같은, 늘어진 온갖 물건들을 데우던, 그 온기 같은 사소함. 사소함과 사소함이 주는 안정감을 나는 좇았다. 그 기질이 태생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이지는 모른다. 나의 성향은 기억의 끝에서도 지금과 다름이 없었고, 누군가가 만들었다 한들 그때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도 차이가 있지 않았다. 나의 관계는 애당초 사소함을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오래 전부터 해가 지듯 바람이 불듯 자연스럽게 생겨난 관성을 유지한 채로, 오고 가는 물건이라든지, 간결한 대화라든지, 최소한의 힘으로 쌓아낸 야트막하고 안정적인 관계. 어쩌면 나의 이별과 상실이 헤어지는 입김처럼 그저 그렇게 이루어진 것도 늘 그대로이고자 했던 바람 탓이었을 수도 있다. 깊어지는 법을 몰랐기에 관계는 말라갔다고 생각한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나는 다시 한 번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보았다. 문자는 가지런하다. 선은 곧다. 선이 선을 잇고 선의 끝에 쓰인 문자. ~야, ~인 것 같아. ~라고 해. 종종 건네는 말로 쓰여있는 필기. 중학생 때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언어들을 볼 때마다 나는 관계 또한 문자처럼 자리에 박힌 채 남아있고 내가 느끼는 멀어짐은 전부 허상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대로인 필기는 연이 잃지 못한 관성이라고, 머리로 알기는 알았으나 환상은 때때로 깨어지지 않고 그날의 꿈까지 이어진다. 꿈에서, 나는 알람을 듣고 일어난다. 문자가 와있다. 전화를 하며 아침을 급하게 먹는다. 언제나처럼 집 앞에서 연과 만나고 함께 걷는다. 말은 짧고 분명할 것이다. 특정하기 힘든, 그러나 그닥 멀지는 않은, 어제의 어제들 그 어느 한 시점부터 나와 연의 간극에 머물던 적막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물어진다. 대화는 띄엄띄엄, 하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이어진다. 나는 안도감에 빠진다. 곧 그것조차 전부 사라진다. 그저 그렇게, 늘 해오던 대로 연에게 말을 던진다. 불안과 고독은 전부 나의 조바심에서 비롯된 착각인 것이다.


환상은 대개 해가 뜨고 나면 모두 흩어진다. 눈을 뜰 때부터, 아무 것도 오지 않은 걸 알면서도 문자를 확인할 때,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 현관 앞을 바라볼 때, 아무도 없는 등교길을 걸을 때, 자각이 시작되는 모든 순간에 깨어난다. 이미 깨어났더라도 다시 깨어나고 깨어난다.

 

*

 

“하지 말까?”

 

어제의 일이다. 청소를 막 끝내고 교실에서 나오는데, 연이 문 앞에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손에는 빌려간 책이 있었다. 나는 휘발되었던 착각들이 다시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반가웠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언제 어떻게 만나든 반가움을 따로 전한 적은 없었다. 내가 반가워하면 관계는 또 한 번 달라질 것 같았다. 그 때 연이 말했다. 책을 내밀면서.


하지, 않는다. 무엇을? 떠오른 의문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이 먼저 나왔다. “아니.” 짧은 말은 길이에 비해 명료하지 못했다. 연은 덧붙여서 말하려 했지만 나의 말에 입이 멈춘 듯했다. 꼭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엉킨 수챗구멍에 물이 꾸역꾸역 내려가듯이 너무 많았던 생각의 틈새로 몸짓이 새어 나갔다. 꼭 처음 보거나 크게 다툰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색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 갈 곳 잃은 손발과 어색한 행동이 연의 표정에 전부 비치는 듯했다. 


아차 싶었다. 드러낸 당황과 어색함을 수습하려 하는 행동들은 모두 그 정도를 더할 뿐이었다. 나는 이유를 몰랐다. 관계의 시작부터 가져오던, 거리가 생긴 이후에도 잃지 않았던 자연스러움이 이유도 없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연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당황스럽다는 듯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시간에, 얼떨떨한 표정 속 연의 눈에 스친 동요를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한 번도 내게 보인 적 없는 것이었다. 연은 아, 그래. 라고 말하며 말 끝을 흐렸다. 나는 책을 받아 들고 돌아섰다. 거의 겁에 질린 채였다. 복도에는 하나의 발걸음만이 울렸다. 연이 어떤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보는 것은 더욱 내가 가졌던 자연스러움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층계에 이르러서야 조금 후회했다. 연이 멈춰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돌아봐서 마주한 얼굴에 해답이 있을 수도 있었다. 후회는 하여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라면. 그 얼굴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다면. 불확실함의 공포가 나를 떠미는 와중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관계는 이제 완전히 관성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떨어진 시간은 결코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길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에 떨어질 수 있었다. 근거 있어 보였던 믿음들.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는 믿음. 애초에 멀어지고 말고 할 것 없는 사이라는 믿음. 언제까지나 나도 연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믿음. 내가 손쉽게 연의 근처를 떠나 먼 곳의 기숙사 학교를 택할 정도로, 관계의 보잘것없음과 보잘것없음의 불변함과 불변함을 향한 나의 선호. 그리고 그 모든 것들 것에 대한 믿음은 유서 깊었다. 언젠가 늘 고요하던 감정의 수면에 파동이 이는 것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재울 만큼 믿음은 그런대로 확고하기도 한 것이었으나, 현실은 믿음만큼 변치 않는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늦게 깨달았다. 기숙사에서 아침에야 핸드폰을 받아 가끔 문자를 하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연의 답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화는 해오지 않던 것이었다. 연락은 늘 힘들었고 거의 둘 뿐이던 연의 곁에 다른 사람들이 생겼다. 나의 시간과 연의 시간을 굳이 맞추어 사람의 틈을 비집고 말을 끼워 넣는 것은 결코 해오던 방식이 아니었다. 방식이 변화하면 관계도 머지않아 원래의 길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연과 나 사이의 자연스러움과 안정함이 유지되기를 원했다. 길지 않은 고요는 이전에도 종종 있던 것이었다. 나는 어색한 말보다는 익숙한 침묵을 택했다. 믿음은 그 때 착각으로 변했다.

 

어쩌면 이유는 더 오랜 날에

 

애당초 자라기를 연과 함께 했으니 연과의 기억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를테면 가족여행의 기억에 항상 엄마와 아빠가 당연히 있는 것과 같다. 당장에 특히 기억나는 것은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많았다는 것 정도일까. 중학생 때에도, 초등학생 때에도, 나는 자주 건네고 연은 자주 받았다. 놓고 와서… 빌려줘. 연의 말이 있으면, 복작이는 교실에서, 친구들이 모두 떠나 적막한 복도에서, 아차, 맞다, 따위의 말과 함께, 건넸다. 그럴 때마다, 연도, 아, 고마워 처럼 짧은 말로 말을 받았다. 말은 길어지는 법이 없었다.


말은, 길어지는 법이 없었다. 입술이 작게 달싹이면 들리는, 대체로 한두 음절 안에서 끝나는 언어들. 결코 넘치지 않던, 간결한 말, 간결해서 견고한 말, 견고해서 안정되었던 말. 낮게 쌓인 돌무더기처럼,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고, 연과 나 사이에, 그저 그렇게 쌓여 있을 것 같던, 말들. 안정적이었기에, 편안했다. 어째서 편안하게 되었는지. 편안하고자 해서 짧아졌는지, 짧았기에 편안해졌는지, 누구의 말이 먼저 짧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의 말과 나의 말이 따로 존재했던 날은 기억하기에 너무 멀었다.


기억할 수 없는, 먼 기억. 나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도, 초등학교 교실에서 짝으로 붙인 책상 같던, 구별되더라도 고립되지 않던, 하나의 면에 실금만이 그어진 듯했던 관계. 책상에 연필이 굴러 양분한 선을 건너는 것처럼 자연스레 오고 가던 말들. 연에게 물건을 빌려주는 것도, 전화를 걸고 받는 것도, 집 앞에 나가면 서있는 것도, 나란히 걷던 것도, 피실피실 웃던 것도, 길어지는 법이 없던 모든 대화도, 대화가 없던 순간도 자연스러웠는데. 어쩌면 그 편안함에, 자연스러움에 잠식되어서.

 

머리를 두어 번 흔들어 잡념을 떨쳤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은 여전히 선명했다.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괴로움. 괴로움. 괴로움. 분절된 단어가, 귀뚜라미떼처럼, 머리 속에서 튀며 울었다.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밤이었다. 사소한 이변 하나에도 생각은 본 궤도에서 벗어나서, 자꾸만 먼 곳으로 먼 곳으로 떠났다. 창으로 빠져나가 길을 타고 어디론가로. 느끼지 못하는 곳으로. 학교로 또는 누군가의 집으로, 흘렀다. 어른 몸통 만한 창 두 개의 너머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시선은 창 밖의 어둠에 머물다가, 어둠 속, 네모 반듯한 불빛들에 초점을 맞추다가, 다시 책상등 아래의 단어들로 돌아왔다. 창을 열면 초겨울의 냉기가 들이쳤다. 머리가 차가워져도 잡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단어들, 단어들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던 각각의 불빛만큼이나, 무의미하고 고독한 듯했다. 연이 그은 밑줄은 단어를 묶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그것이 난잡하게 얽힌 모세혈관 같다고 느꼈다. 글자가 서로 떨어져 마구 엉켰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자정에 맞추어 둔 알람이 울렸다. 오늘은 글렀구나.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조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조는 지금의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전학을 온 날, 조는 우연히도 내 옆자리에 있었다. 조의 들뜬 표정은 내가 교탁 앞에서 어영부영 인사를 마칠 때부터 볼 수 있었다. 피부가 까맣게 탔고 활달해보이는 것이 나와는 다른 부류로 보였다. 자리에 앉자 마자, 수업이 시작하고 조금 뒤에 지적을 듣기까지 조는 끊임 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어느 학교에 있다가 왔냐. 이전까지는 여기 살았냐. 아님 이사온 거냐. 축구 좋아하냐. 잘하냐. 조의 얼굴은 웃음을 띄었다. 살이 적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잡혔고 그 주름만큼이나 즐거움도 깊어 보였다.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기쁨. 사람을 처음 보았다는 것만으로 저렇게나 즐거워 할 수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조의 말은 그날로 그치지 않았고 다른 날에 마주하는 얼굴에도 늘 웃음이 돌았다. 밥을 먹거나 다른 교실로 옮기거나 할 때 조는 늘 나를 불렀다. 말을 걸어주고 문자를 해주는 사람은 거의 조가 유일했다.


조와 복도를 걸을 때면 종종 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바람이 생겼다. 다가가고 싶다. 말을 걸고 싶다. 옆에서 걷고 같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 바람이라고 할 게 없던 날은 어제처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연이 보이면 연에게 가는 것이 당연했던 날이 있었다. 연의 곁과 나의 곁이 늘 비어있던 날들. 비어있던 곁을 공유했던 날들. 그 넓었던 틈새를 제 이부자리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차지했던 그 날들에서 나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바람은 때때로 참을 수 없을 만큼 북받쳐 올랐다. 그렇지만 연의 곁에는 늘 사람이 있었고 연과 사람 사이의 틈에는 말들이 꼼꼼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를 헤집을 용기도 능력도 내게는 없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간다고 해서 연이 달가워할지, 물론 변치 않은 짧은 문장들로 나를 맞아줄 것이라고는 믿었지만, 말에 담길 마음까지 이전과 같을 지 나는 확신이 없었다. 아리송한 한 말과 말의 공백에 타인의 말들이 차오른다면 대화는 산산이 흩어질 것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자리를 밀어낸 사람들이 지을 표정을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럴 수 없었다. 시선이 길고 깊어지면 옆에서 조가 나를 깨웠다. 그제서야 나는 단념한다. 


조의 문자는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글씨를 잘 쓰냐, 저번에 보니까 잘 쓰던 것 같다. 라는 말에 나는 침대에 누워 짧은 문장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깊었다. 눈꺼풀과 눈 사이의 하나 없는 공간에 끝없는 공허가 놓였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게 될 것을 자주 그렸다. 잠에 들 시간까지 정신이 맑은 날이면 그것은 때때로 무의식 중에 형상을 갖추어 꿈으로 나타났다.


기숙사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연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꿈을 몇 번씩 꾸었다. 항상, 자주, 는 아니지만, 가끔, 종종도 아니었다. 보름에 한 번 정도, 꿈이 완전히 휘발되어 가진 기억이 온전히 기억만의 것으로 바뀌면 또다시 꿈을 꾸었다. 일 년 하고도 반의 시간에도 빈도는 잦아들지 않았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눈 앞의 모습이 기숙사 2층 침대의 위층 매트리스가 아니라 내 방의 흰 천장으로 바뀌어도, 눈 아래의 어둠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잊을 만하면 또 연의 꿈을 꾸었다. 

 

불은 꺼져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로부터 새어 나온 자연광이 창을 통해 나의 방과, 방 안의 연과 나를 비추었다. 눈이 녹을 시기였는데, 옅게 푸른 빛이 도는 창으로 들어온 빛은 더욱 창백해서, 방은 온통 얼어붙은 색이었다. 베갯잇, 종이, 벽지, 같은 하얀 것들은 모두 잔광이 은은한 하늘 아래서 빛을 잃어가는 눈밭처럼 푸르고 하얗게 물들었다. 꼭 눈처럼, 만지면 차가울 듯했다. 글을 읽기 쉽지 않을 정도로 방 안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짙은 명암에 사물은 더욱 또렷해졌다. 책상에 흩뿌려진 필기구들, 소설책, 문제집, 꽂힌 책들을 덮어가는 책장의 그림자. 화분 아래로 드리운 식물의 그림자. 개지 않은 이불의 주름. 움푹 들어간 자리, 그 자리의 사람. 침대에 드리운, 사람의 그림자. 무덤덤한 얼굴에 새겨진, 그림자. 나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종종 아주 혼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면 연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글을 읽는 연의 얼굴은 늘 그랬듯 차분했다. 그림자 져 짙은 긴 머리칼, 흔들림 없는 눈가를 보면 나의 이유 없는 떨림도 그 안정감에 덮여 덩달아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마음만큼, 연의 표정만큼 세상은 고요했다. 숨소리, 잔기침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아래층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속삭임처럼 맴돌 뿐이었다. 한두 블럭 떨어진 대로에서나 가끔 자동차의 엔진 소리, 바퀴 소리,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한 소음이었다. 초저녁의 푸른 빛은 계속 방 안을 비추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를 바 없는 날인 줄 알았다. 평소와 같은 방안의 고요로 알았다.


한동안, 어쩌면 한동안이라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긴 기간 동안, 그런 시간이 더 있지 못할 것을 알았음에도, 어디 놀러 간다든가, 선물이나 특별한 말을 주고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보통의 휴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행동했다. 배달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하루 종일 만화나 책을 보고, 읽던 것이나 날씨나 야구 같은 사소한 주제로 짧은 대화를 가끔 나누었다. 해는 천천히 저물었다. 불을 끈 채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연이 뒤에서 불을 켜며 말했다.


방은 고요했다.


-내일 가지?


-어


나는 그때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 간다.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어. 잘 가. 라고 답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연의 울림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그 때 고개를 돌려 몇 마디, 전화 할게, 연락 받아, 혹은, 정말 하지 않던 말이지만, 보고 싶을 거야. 라든가, 조금 더 직접적인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3년이 전부 지나고 왔더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꿈 속에서 나는 연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이러고 있어서는 안된다. 라는 생각만이 머리 속에 가득 차서, 곧바로 문을 벌컥 열었다. 어느새 공간은 길 위였다. 멀리서 걷는 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달렸다. 달리며 연을 불렀지만 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마구 터져 나온 목소리는 나의 코 끝을 넘지 못하고 흩어졌다. 나는 더욱 크게 불렀다. 발을 내딛고 또 내딛어도 연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길에 초봄의 안개가 끼었다. 습기가 차오른 공기에 나의 목소리가 스며들었고 스미면 스밀수록 앞은 보이지 않았다. 곧 전부, 길거리도, 멀리 보이던 뒷모습도,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시 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복도 끝에 연이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 틈으로 연의 얼굴이 스쳐 보였다. 먼 곳에서 연은 웃었다. 연의 웃음이 들렸지만 곧 사람들의 소리에 묻혔다. 나는 인파에 떠밀렸다. 연이 멀어졌다. 웃음소리도 자꾸만 멀어져갔다.

 

           *

 

알람이 몇 번이고 울렸다. 꿈을 많이 꾼 날에는 잠을 얼마나 자든 영 시원치 못했다. 거실에서는 살짝 열린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몸이 떨렸다. 억지로 밀어 넣은 계란말이가 금방이라도 얹힐 것 같았다. 교복 셔츠마저 차가웠다. 온기가 드문 계절이었다. 낮은 하늘은 꼭 흰 종이를 얹어놓은 것 같았다. 원근이 없는 흰색. 눈이 올 것이었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선 교실에는 조례가 거의 끝나 있었다. 조가 옆자리에서, 뭐하다 이렇게 늦었냐. 물었다.


조를 비롯해서, 말이 긴 사람들의 물음은 대답하기가 늘 힘들었다. 전학 오고 나서 많은 친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왔지만 대부분 내가 버티지 못해서 조만 남았다. 조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르고 거만함이 없어서 다수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사람. 어쩌면 벽을 보고도 몇 시간이고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점심시간마다 나가서 축구를 하고, 하던 친구들과 모여서 축구 이야기를 하는 사람 .조의 말은 길고 가볍고 많았지만 굳이 대답을 들으려고 애쓰지 않았기에 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고민하자 조는 알았다며 대화를 끝냈다. 성급한 느낌이었다.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 늘 지니던 그 웃음이 풍기는 분위기도 여유 있던 평소와는 달랐다. 손 끝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눈은 앞이 아닌 그 너머를 바라보는 듯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내 눈이 조에게 오래 머물자 조는 내게 이유를 묻는 것처럼 한번 웃어 보였다. 시선을 거두는데, 조의 책상 위에 작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스치듯 보았다.


“아. 조금 있다가.”


흘끗 던진 눈길을 어떻게 눈치채었는지, 조는 무언가 더 말할 게 있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가 다시 고개를 돌렸고 나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얼마 전부터 조는 숨기는 게 있어 보였다.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숨기려고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기는 힘들어 보였다. 조가 무엇을 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숨기고 숨기다 저한테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조금 기쁠 수도 있었다. 조의 말은 종종 너무 길었으니까. 하지만 그 숨기려고 하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물으려고 하다가 그만둔다든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내 뒤통수를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다든지, 하는 것이, 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적지 않게 거슬렸다. 나는 종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조가 그것을 금세 책상 밑으로 감추어 버려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외투를 벗자마자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선생님이 들어왔다. 책 펴, 수업 시작했는데 책도 안 펴고 뭐해. 어디까지 했지?


펴낸 페이지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연의 밑줄이었다.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이제 여기, 사소함으로. 밑줄. (이미.) 왜 그으라 한 것 같니, 애들아? (조가 슬쩍 말했다. 반어요.) 그치. 누가 말했어? 반어법이지. 왜요? 할 수도 있는데, 항상 말했다시피 시를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읽으라고. 항상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하는 것처럼 당연하고 사소한 일이라 (히터 바람은 따스했다. 졸음이 밀려왔다.) 쓰기는 하는데 사실 절대 하찮은 게 아니지? 바람불고 해 뜨고 하는 게 숨쉬듯 자연스러운 거지만 사실 숨쉬는 것도 겁나 중요한 거잖아. 아직도 안돼? 아니 단순하게 생각해 봐. 사소한 거면 시까지 써가면서 전하겠냐. 그거지. 사소함 앞에도 밑줄, 그리고 뒤에…


(종이 울렸다) 아. 다음 시간에 하자. 어디까지 했는지 기억해 놔. 나 간다. 빨리 다음 교시 준비해.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피로가 깊게 느껴졌다. 날이 흐린 탓인지, 잠을 설친 탓인지,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꿈. 꿈을 꾼 날에는 하루 종일 꿈에 빠져서 사는 느낌이었다. 밤새 꾸었던 꿈이 머리를 짓누르는 듯해서 나는 참지 못하고 책상 위로 몸을 뉘였다.


눈을 감으면 종종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부르는 사람은 다양했다. 어머니, 아버지, 선생님, 이전 학교의 친구들일 때도 있지만 보통 그날 꿈에 나온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늘 그 목소리들이 꿈에 이르기 전에 듣는 환청,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끔 그것은 실제라고 믿을 만큼 생생했다. 틀림없이 진실이라 여긴 목소리에 놀라서 일어나보면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 없었다. 돌아본 뒤편이 공허할 때면 목소리는 몇 번이고 더 들려 왔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


 

눈 앞에서 어둠은 점점 가시고 환시가 일렁였다.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차 멀어져 갔다. 목소리에 나의 이름이 섞여 들렸다. 조는 아니었다. 선생님도 아니었다. 이름은 의식이 흐려질 수록 또렷해졌다. 익숙한 목소리, 연의 목소리였다. 연의 목소리가 있자 곧 울렁이던 환시는 연의 모습이 되었고, 어지럼증이 일었다. 꿈에 거의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의 목 뒤에


손가락이 닿았다.

 

추락하는 꿈에서 깨어나듯 흠칫 튀며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연이 있었다.


연이 물었다.


“깨웠나?”


나는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미 의식한 이상 원래의 자연스러움은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또 머뭇거렸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생각하는 동안 다시 연이 입을 열었다. 연의 눈썹 사이에 겨우 알 수 있을 만한 굴곡이 생겼다.


“책, 빌리러 왔는데.”


말을 마치자 연의 입은 옅은 웃음을 띄었다.


“아, 응.”


나는 짧게 답했다. 옛날부터 써오던 단어였다. 단어는 변하지 않았다. 가방을 뒤지며 나는 연의 표정을 생각했다. 다른 교복을 입고서 나에게 부탁할 때에는 어떤 얼굴이었는지 생각했다. 입가에 띈 미소는 그때와 같은지 생각했다. 눈은, 달랐다. 어제의 복도에서 이전과 달라졌던 연의 눈은 오늘의 눈이기도 했다. 나는 그 눈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했다. 같은 눈동자에 담긴 것이 달라지듯 같은 말이더라도 품은 것은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말에 대해서는 확신했다. 나는 다시 연이 건넨 말을 떠올렸다. 짧았다. 하지만 이전의 짧음인가. 길어지고 싶지 않아서 짧은 말인가 길어질 수 없기에 짧은 말인가. 연의 눈이 말하는 것은 곧 연의 단어가 말하는 것일 테다. 고개를 들어 다시 그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 그러면.”


연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바라던 대로 그 눈을 잠깐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연은 잠시 하던 말을 멈췄다. 검은자가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저 너머에 담긴 것을 알아내면, 알아낸 바가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면.


연의 눈동자는 떨렸고, 내뱉은 말에도, 떨림은 묻어 있었다.


“갖다 줘. 나중에.”


연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걸음을 떼며 점심시간에. 라고 덧붙였다. 내가 알았다고 말할 때 연은 문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얼떨떨했다. 완전한 다름이었다. 돌아와서부터 겨우 관계의 편린을 갖던, 이 시간조차 이제는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져 심란했다. 먼 기억 속에서도, 전학 이후 가까운 기억에 남은 그 가끔의 짧은 만남 속에서도 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떨림,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낙관을 품기에는 연의 눈가에 깃들은 감정이 깊어 보였다.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연이 나간 자리를 바라 보았다. 따라가서 물어보고 싶다. 어쩌면 연은 나를 생각함에 이전과 아무 다름도 없을 수도 있다. 그저 내 어색하게 행동하는 것이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저와 등교나 하교를 따로 하고 학교에서 떨어져 지내며 말도 잘 섞지 않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어쩌면 조금 아쉽게 여기나 내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어쩌면 후련하게 여길 수도 있다. 애초에 그것에, 나눈 말들과 보낸 시간들에, 나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연의 얼굴은 크게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때때로 겪던 술렁임을, 아주 가끔은 쉽게 숨길 수 없던 그 밀물과 같은 감정을 연의 표정에서는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책을 빌리고 이전과 같이 필기하고 돌려주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면 왜 목소리는 떨렸는가. 아무렇지 않지 않다면 왜 연은 다시 내게 말을 걸지 않을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라면 왜 오늘은, 늘 해오던 것과는 다르게, 찾아오라고 하는가, 하지만 정말로 전부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도, 나만의 착각인 것일 수도, 애초에, 아주 처음의 처음부터 모두 아무 의미 없었을 수도.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 그럴까. 연에게 묻고 싶었다. 

 

그때, 조가 나에게 말했다.

 

“너, 쟤랑 친해? 어떻게? 언제부터?”

 

앞자리 의자에 돌아 앉은 조는 웃고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나는 응, 과 예전에, 사이의 대답에서 고민하다가, 옛날에, 조금. 으로 답했다.

 

“그래? 지금은?”

 

조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조의 말에 심란해지는 것은 순전히 나와 내 상황의 탓이리라. 조는 들떠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맑은 눈빛은 나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나도 묻고 싶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연이 있다면 조의 말에 대답했을 수도. 몇 가지 대답이 떠올랐지만 목구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부 아닌 것 같았다. 조가 스스로 판단하고 다음 말을 이을 때까지 나는 답하지 못했다.

 

“아. 그래.”

 

조의 웃음에 안도감이 스쳤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좋은 애라던데.”

 

나는 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조를 보았다. 조의 눈은 문 너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입은 미소를 띄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이야기는 안 해봤는데, 성격도 좋고, 말도, 뭐라 해야 하냐. 좋게 한다더라.”

 

조는 교실에 있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듯했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 친구들이나 나와 이야기 할 때와는 다른 행복이 그의 눈에 보였다. 

 

두근거린다. 라는 표정이었다.

 

“그, 사실은, 부탁할 게 있는데.”

 

           *

 

나는 조의 말을 듣고 내 안의 혼란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연과의 대화에서 몇 번 겪어본 그것은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조의 말에,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다려봐, 생각 좀 해보고, 라고 답했고 조는 내가 벌써 승인이라도 한 듯 한껏 들뜬 목소리로 알았다고 한 뒤 나는 듯이 자리로 돌아갔다.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왔으나 수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잡함을 덜어내려고 눈을 감으면 암흑 속에서 연과 조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내게 다가왔다. 연의 눈동자는 떨렸고 연의 목소리도 떨렸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두려워 머리를 흔들면 목소리도 눈동자도 그 모습이 아주 사라져버리는 것도 두려웠다. 그리고 조, 조의 눈이 웃었다. 두근거림과 설렘과 기쁨과 기대를 한껏 그러안고 웃고 있었다. 조의 목소리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연에게


-편지를, 대신 써 줄 수 있어?


조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부끄러운 비밀을 털어놓고 변명하는 것처럼 조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조가 도서관에서 연을 처음 보았을 때, 우연히 말을 나누었을 때, 종종 복도에서 인사를 할 때, 그 모든 때의 감상까지, 말하는 것을 나는 잠자코 들었다. 조의 감격, 처음 느껴본 감정이 얼마나, 저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행복하고 종종 괴롭게 만드는지. 가끔 멀리서 사람들 틈에 있는 연을 볼 때면 그 옆에 있지 못하는 게 얼마나 아쉬운지. 처음 인사를 받아줬을 때에는 얼마나 기뻤는지, 이름을 알았을 때의, 환희. 조는 꼭 처음 말을 배운 어린아이 같았다. 나의 앞에서 돌고 도는 조의 말들. 마치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는 듯, 쏟아지는 말들. 얼굴을 붉히면서. 손짓을 해가며,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터놓는 말을, 나는 차분하게 들었다. 쉬는 시간 내내 그렇게 말을 하다가, 자리로 돌아가며, 조는 다시 한 번 부탁했다. 편지를, 대신 좀. 어떤 편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묻지 않아도 조는 이미 모두 드러냈다. 조는 즐거워 보였다. 써주는 것은 아니어도 괜찮다. 전해주기라도 해주면 좋다. 내 주위에는 그 애랑 친한 사람이 없다. 네게 부탁한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답을 하지 못했다. 조는 전해주기만 해달라.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라고 하면서도 그 눈은 내게 한 가지 답만을 바라고 있는 듯했다. 연이 스쳐갔다. 나도 연을 스쳐가며 그 짧은 간격에 머물던 시선을 보았다. 연의 시선과 조의 시선이었다. 조는 연의 쪽을, 연은 이쪽을 향했다. 찰나였지만 나는 보았다. 조의 얼굴에 내리는 빛을 보았다. 연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것을 보았다. 연의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다. 연은 말하고 있었지만 모든 단어들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목소리는 나를 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나의 느낌이 엇나간 것이었을 수도 있다. 나의 고민도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너는 내게 무엇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날, 차가운 색의 빛이 옅게 들던 그 방에서 연이 그저 그렇게 있던 것은 나의 떠남이 너에게는 그저 그런 것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때의 너의 머리칼과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내게 한없이 침착하고 고요하게 기억되는 것은, 너를 떠나감이 그때의 내게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나 또한 네가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뜻 담은 말을 하지 않고 너 또한 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가진 뜻이 없었기 때문에, 전화가 없던 것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은 것은, 돌아보지 않은 것은, 애초에 나를 돌아보게 하지 않은 것은, 모두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조가 기쁜 듯 웃고 있었다.


나를 보았어.

 

           *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조는 책상에 걸터앉아서 써온 것을 내게 읽어주었다. 멋쩍은 듯 웃으며 밤새 고민하며 썼다고 덧붙였다. 합니다… 가 나을까, 해요… 가 나을까… 나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읽기 시작했다. 조의 뒤로 죽 이어져 나있는 푸른 테두리의 창문에 겨울 풍경이 비쳤다. 흐린 하늘 아래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따라 나무가 흔들리고 그 위에 쌓인 눈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조는 창 밖의 모습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조의 편지는 떨어지는 눈처럼 낙엽처럼 연에게 갈 것이었다. 자연스럽고 있을 법한 일일 것이다. 조는 들뜬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히려 끝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전하고 싶은 문장에 가까워질수록, 느끼는 것이 목소리에 그대로 담겨서 흘렀다. 흐름은 아무도 없는 교실을 가득 메웠다. 나는 사각이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펜을 가볍게 다뤘다. 촌스럽다고 생각한다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부분 뺄까?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조는 곧 말을 마쳤다. 나도 마침표를 찍었다. 편지의 오른쪽 아래에, 조의 이름을 적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연의 반에 가는 길에, 조는 따라오지 않았다. 조는 부끄러워했다. 네가 가줘. 여러가지, 아마도 지킬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것까지 약속하며 조는 나를 혼자 보냈다. 층 하나를 오르고 복도의 끝으로 가면 연의 반이었다. 뒷문을 열자 연의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이 연이 먼저 나를 보았다. 연은, 나를 보았다. 나도 연을 보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저 보았다. 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반가워한다. 나는 연의 눈을 바라본다. 연의 언어를 듣는다. 안녕. 짧다. 내게 편안함을 주었던 짧음. 내가 갖고자 했던 짧음. 내가 머무르고자 했던 짧은 언어. 나는 내 손에 들린 책을 건네고 싶지 않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책 속에 끼인 편지를 나는 연에게 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왜.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책, 그 짧은 말들. 언어. 관계와 기억. 나는 잠깐 책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연은 어느새 내 앞에 서있다. 연은 아리송하게 웃는다. 눈동자는 떨리지 않는다. 저 잠잠한 동공 너머에는, 어떤 의미가, 어떤 생각이, 어떤 마음이. 나는 묻고 싶다. 내가 가지던 그리움, 외로움, 내가 이 층의 매트리스 뒷면을 보고 나의 하얀 천장을 보고 눈꺼풀 아래의 어둠을 보고 그리던 날들, 그리고 너의 침묵, 뒷모습과, 발걸음이, 떨림이, 가리키던 의미를, 알고 싶다. 하지만 물음은 목에서 막힌다. 너무 많이 쌓인 채였다. 연이 물어 주었으면 했지만 연은 여전히 내 앞에 그저 있을 뿐이었다. 뭐 해, 연이 재촉했다. 나는 책을 건냈다.

 

“이것, 뿐?”

 

연이 살짝 올려다 보며 말했다. 연의 고요가 깨어졌다. 나는 연의 얼굴에서 실망을 보았다. 떨리며, 나를 바라보는 두 눈. 말을 참는 듯한 입. 애써 잠재운 가슴이 다시 뒤틀렸다.

 

이것뿐, 이라니.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주어야 할 게. 연이 바라는 게.

 

연은 나의 표정을 보고, 자리로 되돌아가 한 권 책을 꺼냈다.

 

“아니야. 이거, 가져가”

 

연이 한 손으로 책을 받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가져온 것을 건넸다. 나는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연이 내게 건넨 것은 내가 연에게 건넨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책을 보고 다시 연을 올려다 보았다. 떨리는 얼굴이었지만 떨림을 숨기려는 의지가, 그 또렷하게 뜬 눈에서, 굳게 다문 입에서 느껴졌다. 올려다보는 눈이 깊었고, 빛났다. 연은 그저 내게 한 손으로 책을 건네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향하는 그 눈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언어로 토하는 열변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의문을 연도 느꼈으리라. 하지만 연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교실에 있었지만 내 시야에는 오직 연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내 것과 같은 표지의 책만이 분명했다. 너무 많은 의문과 가정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는 묻고 싶었다.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떠오르게 하던, 그 눈동자에, 그 입술에 묻고 싶었다. 뭐야, 왜. 하지만 연은, 여전히 그저 나를.


 문을 지나는 다른 사람에게 몸이 밀쳐지자 그제서야 시간이 다시 흘렀다. 사람들이 움직였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연을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몇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연은 여전히 움직임 없이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시간과 함께 잠시 모든 것이 멈춘 듯했던 머리 속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묻고자 했다.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겨우 숨과 음성을 내보내기도 전에, 한 발짝 다가온 연에게 놀라 말은 다시 막혔다. 연은 한 손으로 나의 방황하는 손을 잡고


“가져가. 뭐해.”

 

책을 쥐어 주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연이 내 쪽으로 나서며 밀었다. 나는 그저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종치겠다. 가. 빨리.”


연은 나를 내치고 문을 닫았다. 연이 돌아서기 전까지 나는 뙤창으로 연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찰나에도, 연의 눈은 계속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책을 한 손에 쥐고 반으로 돌아와서도, 수업을 듣는 내내 멍했다. 조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 내 생각을 감출 자신이 없었기에 조의 침묵은 잘된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너무 많은 생각을 해버려서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의문만 떠올랐다.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답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쏟아지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행동했음에도, 의문은 늘어날 뿐이었다. ‘이것뿐’은 무엇일까. 왜 연은 같은 책을, 책이 있었는데, 왜 나로부터, 나에게, 같은 책을. 연은 내게 무엇을 말했나. 연의 책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나. 나는 무엇을 알지 못했나. 의미, ‘이것 뿐’ 이라는 물음과 같은 책, 곧 눈물을 떨굴 듯 흔들리며 나를 치켜보던,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던, 그 눈빛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나. 연은 나에게 물음을 남기고 나를 밀어내었다. 의미를 갈구하던 모든 날들이 스쳐갔다. 의미는 있었던가. 어쩌면 연에게도, 사실은 연에게도 마찬가지였기에, 나의 침묵과 망설임과 돌아보지 않음이 연에게도 내가 연의 뒷모습을 볼 때의 느낌과 같은 것을 안겨 주었기에.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아주 사소한 물음일 수도, 어쩌면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 전의 부탁이 있어서, ‘이것뿐’ 이었을 수도, 어쩌면 모두 나의 착각이고.


하지만 나는 이미 편지를 건네었다. 나는 내가 고민했던 전부를 편지에 묶어 떨쳤다. 물음도 답도 그 편지 속에서 사그라들어야만 했다. 답은 내게 들려와서는 안되었다. 답은 편지 속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나의 의미는 더 이상 답을 잃고 물음인 채로만. 이제 관계의 고민은 모두 조의 것이다. 어쩌면 내가 던진 물음에는 내가 알 수 있는 명확한 답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퍽 바라는 방향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답을 얻는다면 후회하리라. 이미 연의 말이 향할 곳은 조가 되었고 그것을 그러도록 도운 것은 나이므로, 그러니 답은 전부 조가 들어야만 한다. 답과 함께이더라도 나는 내 머리 속을 헤집는 수많은 의문들을 버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건네었다. 그러나 편지는 읽히지도 않은 채로 나는 연의 의문을 받았다. 눈빛과 책으로부터 불확실함은 다시 솟구쳤다.

 

선생님이 들어왔다. 7교시, 문학의 두 번째 시간이었다. 나는 고민에서 깨어나 책을 찾았다. 책상 서랍에는 없었다. 가방에도 없었다. 문학, 이었다. 나의 손에 들려진, 연이 내게 건넨, 책이었다.


밑줄이, 있었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밑줄이 있었다. 단어와 단어를, 말과 말을 묶는, 무수한 연의 밑줄, 연의 필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짧고 명료하고, 안정적인, 편안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의 말들, 사소함은, 간절함의 반어적 표현, 진실로, 진실로, 매우 절실함을 나타낸다. 눈, 꽃, 낙엽은, 역설로 표현한 사랑의 불변. 시어에는 동그라미가 씌워져 있었다. 사소함, 사랑하는 까닭, 기다림, 기다림의 자세, 문자는 연의 의미를 전했다. 손이 떨렸다. 책을 다시 덮자 종이가 한 장 나부꼈다. 시의 필사였다. 선도 글자도 덧붙이지 않은, 시의 필사였다. 나는 내가 끼워 넣었던 조의 편지를 기억했다. 연의 곧은 글씨가 시를 그렸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연의 문장은 그렇게 내게 말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들었다.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오직 손에 연의 종이를 들고 연의 반으로 달렸다. 반으로 오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연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를 향하는 그 눈동자들을 나는 모두 훑어 보았지만 그곳에 연의 것은 없었다. 그 깊고 검은 눈동자.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이름 모를, 연의 곁에서 보이던 여자 애가 말했다. 종이 치자마자 달려나갔다고. 나는 다시 뛰어나와 조의 편지에 쓰인 장소로 향했다. 학교의 중정. 어두워진 하늘에는 곧 눈이 내릴 듯했고 내가 찾아간 중정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중정에는 연이 없었다. 나는 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코 하지 않았던 일. 하지만 나는 이전의 관계를 유지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부서졌다는 것을 안다. 내가 전한 편지로써 연이 전한 필기로써 그것이 완전히 티끌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는 것을 안다. 통화연결음은 계속되었지만 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눈이 쏟아져 전부 덮여버린 것 같은 하얀 하늘에서 한두 송이 눈이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달렸다. 얼굴에 찬바람이 스쳤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눈발과 공기가 맞닿는 모든 살갗이 차가워 아려왔다. 나는 오래 전 함께 모래성을 쌓고 눈싸움을 했던 놀이터에 갔다. 그곳에 연은 없었다. 뽑기를 하고 아이스크림이나 불량식품을 사먹던 문방구에도, 연은 없었다. 아스팔트에 눈송이가 녹지 않고 머무르기 시작했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렸다. 나는 중학교를 거쳐 함께하던 등교길을 지나 연의 집 앞까지 갔다. 복층의 단독주택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연의 이름을 부르자 연의 부모님이 나왔다.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나 연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연의 집에도 연은 없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얇게 쌓여 종종 미끄러졌다. 넘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나는 우리 집으로 향했다. 아무데도 없다면 있을 만한 곳을 몇 번이고 돌 것이었다. 엇갈리는 것이든, 피하는 것이든, 머무르는 것이든 내가 멈추지 않는다면 오늘이 가기 전에 나는 연에게 닿을 것이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눈발이 굵었다. 코끝이 아리고 땀이 흘렀다. 공기가 부족한 폐부에 찬바람이 들이쳐 가슴이 죄였다. 하지만 힘은 들지 않았다. 뻗은 길도 그 위로 보이는 거리도 모두 마구 내리는 눈에 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나는 곧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쓸어내지 않아 순수하게 남은 눈에 나의 것이 아닌 폭 넓은 발자국이 이미 찍혀 있었다. 현관을 열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자 연의 신발이 있었다. 엄마는 나갔나. 문을 닫으니 온 몸이 뜨거웠다. 얼어붙었던 귀와 뺨에 다시 피가 돌아 후끈했다. 땀이 흘렀다. 신발만 벗어 던지고, 눈을 털지도,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로 나는 곧장 내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했다. 높지 않은 계단 위로, 방문은 열려 있었다. 한 칸씩 계단을 밟아 올랐다.

 


꽃이 피어나고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옷가지나, 문제집이나, 필기구나, 책 같은 것들이 널린 방. 촘촘한 눈발을 뚫고 비치는 희미한 자연광에, 그림자가 짙었다. 나는 어른 몸통 만한 두 개의 창을 가리는, 하나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 너머로, 푸른 빛을 맞으며, 연이 있었다.


연의 볼에는 열꽃이 피어 있었다. 붉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연에게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내가 그동안에 참아왔던 그 모든 단어들을, 물음들을, 의혹들을, 전부 뱉어내고 싶었지만, 숨이 고르지 못했다. 들이치는 숨에 나의 언어는 자꾸 막혔다. 연도 소리가 들릴 만큼 센 숨을 뱉었다. 긴 머리는 흐트러지고 물기가 스며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나의 머리도 축축했다. 눈과 땀이었다. 외투 안에서 열기가 돌아 땀이 마르지 않았다. 턱 아래로 땀이 흘러 떨어지며 부서지는 소리를 내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낙엽이 떨어지고

 


연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망울에도 눈이 머무르다 녹아버린 듯, 물기가 어렸다. 손에는 편지지가 구겨진 채로 쥐어져 있었다. 파래진 연의 입술이 떨렸다. 터지기 전의 댐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가득 차오른 말들을 연은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연을 보고 연이 나를 보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 잠깐 동안, 나는 숨을 나의 뜻대로 쉴 수 있게 되었지만, 연의 앞에서 나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얼굴, 쏟아내고픈 그 모든 언어들을 안간힘을 써서 막는 그 얼굴. 나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연의 눈과 볼은 붉어져 갔고 결국 그 위로 몇몇의 물방울이 옅은 흔적을 남기며 흘렀다. 연은 말을 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추위를 견디는 사람처럼 턱이 떨렸다. 연의 왼손에서 편지지가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진심이야?”

 

목소리는 간신히 새어 나오는 물줄기처럼, 가늘고 위태로웠다.

 

“네가 썼잖아. 이거?”

 

연은 따지듯 말했다. 부정하듯이, 아니라 말해 달라고, 애원하듯이, 진동하는 그 눈썹이, 눈망울이, 끊어진 단어들에 연의 바람을 채워 넣었다.

 

“근데, 이름이, 이름은, 왜?”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모두 연의 단어 아래에서, 눈 덮여 가려지는 낙엽처럼, 안개에 흐려지는 숲처럼, 희미해져 갔다.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말은 틀어막혔다.


나도 덩달아 눈이 뻐근했다. 한 순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연의 얼굴이 희미했다. 아니야, 오해야, 내가 얼마나.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무슨 마음으로, 내가 왜, 썼는데, 다, 나는 몰라서. 불안해서. 아니야. 아니야. 말은, 분절되었다. 땀이 멎은 지는 이미 오래였지만 숨은 또다시 차올랐다. 아니야. 아니야. 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숨소리와,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 부서지는 물방울 같은 언어만이 메우던 허공을, 아니야. 연의 음성이 꿰뚫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비볐다. 연의 모습이 가까워지는 것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감각, 나의 앞을 채우는 감각, 오래도록 비어 있던 자리가 다시 들어차는, 감각. 땀에 젖은 머리칼의 냄새가 났다. 이대로, 있어. 나의 몸으로, 목소리가 흘렀다. 짧게 흘렀다. 짧은 목소리, 내가 한껏 그리워하던 목소리. 내가 매일 밤마다 떠올리고 떠올리던, 나에게 전해지는 그 목소리, 안정된, 편안한, 늘 내가 향하던, 나를 향하던, 그 목소리가, 나의 가슴께에서 울었다. 울리고 울리는 말, 오래간 되찾고 싶어 했던 그 의미가 나의 속을 쓸었고, 말이 터져 나왔다. 말하고 싶었다. 전하고 싶었다. 말은 숨이 되어 울음이 되어 연에게 전해졌다. 연은 숨으로 울음으로 대답했다. 연이 끄덕였다. 눈물 섞인 끄덕임이 나를 계속 훑고 훑었다. 그러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말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오고 가는, 점점 짧아지는 말들, 하나의 눈송이처럼 작아지는 단어들. 창 밖에서는, 흐르는 언어처럼, 눈이 계속 내리고, 눈보라 속에서 산도 나무도 길도 전부 흐려지는 것처럼, 내리깔리는 고요.


잦아드는 말의 자리에는 곧 잔잔한 숨소리가 차올랐다. 숨이 입가를 스쳐가는 소리. 내게로 새어 간질거리는 숨결 한 가닥 한 가닥마다, 퍼지는, 향기. 녹은 눈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 향기를, 오래 맡았다. 옅은 숨. 온기. 눈이 대지를 안듯이, 대지가 눈을 안듯이, 포옹은, 오래도록. 창 밖으로 퍼붓는 눈은, 

계속.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