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보다 무거워진 물방울이 떨어진다. 시속 34km, 스쿨존의 제한속도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물방울은 그대로 떨어져 작은 사고를 내었다.

툭, 작지만 존재감 있는 소리를 내며 새로 산 양복과 충돌한 물방울은 총알이 뚫고 지나간 것처럼 작은 물 자국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마치 흉터처럼 생긴, 한 물방울이 그 한 몸을 바쳐 내게 남긴 흔적을 보다가, 곧 물방울의 근원지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흰 구름이 겹쳐져, 어두운 검남색으로 칠해진 하늘. 그 너머 빛나는 샛별이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색.
암울한 하늘속에서 다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리고 어느새 비가 된 물방울들은 땅을 세차게 두드리며 하늘 아래 모두에게 알리고 있었다.

장마. 앞으로 2주간 지속될 장마가 시작됨을, 빗방울들은 내 옷을 수많은 물 자국으로 꿰뚫고, 짓밟으며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 큰 외침, 귀를 막아도 어떻게든 뇌에 박혀 오는 그 소리. 수많은 빗방울이 보도블록위에서 터져가는 소리가, 어느새 나를 잊고 있었던, 싶었던 저편의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내고 있었다.





“괜찮니?”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내게 걱정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대답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릴 텐데… 상심이 크겠구나…”

툭툭, 내 어깨를 작게 두드리며 얼굴모를 그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가 떠나간 후, 그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한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상심이 크겠구나. 내가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로 슬픔을 느끼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방금 나를 툭툭 치고 걸어간 그의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감히 슬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득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어른들과, 검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
모두 2개의 기왓장이 겹친 듯한 모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축 처진 눈썹과, 축 처진 입꼬리. 틀림없는 슬픔이 그 얼굴에서 보였다.

여기 모인 모두의 표정을 흝어본 나는 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그 어떤 축 처진 눈썹도, 입꼬리도, 짙은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태연한 듯한, 이미 익숙한 듯한 표정.
이게 과연 슬픔을 느끼는, 상심이 큰 사람의 표정일까?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내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수치심이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나는 참지 못하고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바깥을 향해 도망치듯 뛰었다.

저 사람들 앞에서 내 표정을 보이기 싫었다.
누나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는 나를, 누나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뛰어간 끝에 나는 아무도 없는 빈 공터에 도착했다.
지친 나는 그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내가 떠나온 장례식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흐느낌이 들려오는 장례식장에서 아무도 나를 쫓아오지 않는 듯 보였다.
모두 누나의 죽음이라는 해구보다 깊은 슬픔에 잠겨서 나를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생각이 복잡해져 고개를 숙였다.


누나가 죽은 건 장례식이 열리기 이틀 전 일이었다.
새벽 3시경, 누나는 갑자기 영문 모를 이유로 자기 방안에서 목을 매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도, 유언도 없는 마치 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조용한 죽음이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엄마였다.
아침이 되었음에도, 아무 소식도 없는 누나의 방을 확인한 엄마가 처음 밧줄에 의해 기이하게 목이 늘어난 누나를 보게 되었다.
아빠에게 들은 말로는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주저앉아 얼이 빠진 채 한참을 누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가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평소에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고, 교우관계도 좋았으며,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이나, 약물을 복용한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우리 부모님은 누나의 죽음을 누군가에 의한 살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누나를 죽음으로 내몰게 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부모님은 그저 ‘불명’으로 누나의 죽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

투둑.

무언가가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어깨를 살짝 더듬자, 약간의 물기가 느껴져 왔다.

곧 장마가 내린다고 했던가. 언뜻 일기예보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이대로 공터에 있다가는 비에 홀딱 젖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밀리듯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걸어가면서 누나가 죽음을 택할 만한 이유를 생각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도 곧잘 잘 사귀던 누나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나는 정말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그 무엇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누나에 대해 아는 게 마땅히 없었다.
누나가 어떤 사람과 친한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심지어 생일 같은 사소하지만 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사실 ‘일부러 외면했다.’ 가 옳을지도 몰랐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누나와 달리 그저 평범한 나는 누나를 시기하며 그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 했으니까.
그런 내가 누나의 죽음에 대해 무엇 하나 짐작하지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건 당연했다.

어느새 장례식장에 도착한 나는 다시 낯선사람들과, 낯선 슬픔을 보았다.
이해하기 싫은 사람과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장례식의 향내 가득한 공기에 깊게 배여 있는 그 모든 것에 나는 점점 익숙해졌다.

곧, 장마가 내렸고 누나는 작은 함에 담겨 어느 선반에 사진과 함께 놓여졌다.

그리고 다시 장마가 내렸다.

다시 내리고,

6번 더 내리자 오늘이 되었다.

쏴아아ㅡ

총알처럼 쏘아지는 빗방울이 시야를 가린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세찬 비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시끄럽게 외쳐 대는 저 빗소리가 귀로 흘려들어왔지만, 그때부터 총 7번이나 겪은 탓인지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비가 내리는 한가운데에서 오랜기억을 털어 버리고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거리를 걸으며 차가운 비가 새로 산 양복위로 부딪히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꼭 면접에 붙어서 취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들여 산 비싼 양복이었는데, 비에 젖어 축축해져도 양복이 더럽혀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느껴져야 할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은 기분, 누나의 장례식이 떠오른다. 

슬퍼야 하는 게 슬픔이 느껴지지는 않는 기이한 기분. 
도시를 파묻을 기세로 쏟아지는 장마속에서 장례식에서 느낀 기분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어디선가 향내음이 느껴졌다.
익숙한 비내음 사이에서 매캐하고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향내음이 퍼져올랐다.

문득,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가.

애초에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사람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이곳에서, 장마가 시작된 이곳에서, 무거워진 하늘이 어느새 대지와 겹쳐진 이곳에서 향이 피어올랐다. 의문, 사람의 죽음. 누나의 죽음. 무거운 빗방울이 한없이 가벼운 구름 속에서 떨어진다. 퍼져가는 향내음이 나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익숙해진 누나의 죽음과 익숙해진 실패와 익숙해진 장마.

결국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꼈다.

장마에 익숙해져간다. 하늘을 바라보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빗방울도, 검남색의 먹구름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장례식에서 누나의 사진 앞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어느새 사라지는 것처럼, 한없이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다.

사실 누나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건 나였다. 아침에 엄마가 누나의 방을 들어가기 한참 전에, 새벽에 누나를 찾아갔었다. 

나보다 모든 것이 뛰어난 그녀가 너무 부러워서, 가증스럽고, 뱃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라서, 그래서 내 손으로 없애고 싶다는 마음에.
뒤틀리고 추악한 마음을 가지고 오랜 결심끝에 마음을 단단히 한 채,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를 반긴 건 그녀가 스스로 목을 매단 채, 장마 속에서 하나의 빗방울이 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익숙해지기로 했다. 

슬픔에 익숙해지고, 결국 잊게 되었지만 장마는 내리고 있었다. 

점점 익숙해지는 무언가. 이제는 무엇이 익숙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장마가 그쳤다. 어느새 비에 젖은 도로에서 연기와도 같은 실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곧 실안개가 모두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