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학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네 이야기를 했다.

종강 기념으로 과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막차 때문에 갈 사람은 가고 남은 2차 자리에서 누군가 별안간 첫사랑 이야기를 하더라.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명씩 돌아가며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데, 내 차례가 오니 참 막막했다.


딱히 네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이 싫었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올해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 대학 사람들에게 네 이야기를 숨기고 다녔다.


근데 어제는 네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었던 건지, 막힘없이 이야기가 나오더라.


우리의 만남은 철없는 중학교 시절에 이루어졌다.

별 볼 일 없는 동네 작은 수학학원에서 만난 우리는, 학교는 달라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늦은 듯 이른 듯 그 애매한 시간에 집으로 걸어가면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날이 추워져 슬슬 패딩을 꺼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시기에, 나는 문득 너를 좋아하게 됐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예쁘기도 예뻤고 착하기도 착했다. 나랑 맞기도 참 잘 맞았다.

인기도 참 많아서 학원을 같이 다녔던 네 친구가, 학교에서 네가 인기가 많다는 얘기를 해주었을 정도니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네가 학교에서 고백을 받았다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꼭 네 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담배를 물으면, 너가 한 번이라도 나에게 더 말을 걸어주고 한 번이라도 나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했던 마음이었다.


아무튼 지금에서야 알게된 것이지만, 그때 나의 첫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다.

그때의 우리는 참 어리고 미숙해서 서로의 마음을 몰랐지만, 이제는 충분히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네가 괜히 나한테 고백받았다며 자랑하는 것도. 헤실헤실 웃으며 고백은 거절했다고 말하는 것도.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전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근데 우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로 너무 조심한 탓도 있었고, 네가 학원을 옮기면서 서로 만날 일이 점점 줄어든 탓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잊고 살아가는 와중에도 나는 간간히 네 생각을 했다.

만약 그때 내가 용기를 내 고백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고, 너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고.

오랜만에 먼저 연락을 해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괜히 네가 불편해 할 수도 있을까봐 핸드폰을 내려놓은 순간도 여럿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가을. 떨어지는 빗방울에 서서히 추위가 느껴질 즈음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동네 번화가의 한 골목길에서 비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나에게 네가 먼저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오랜 시간 너를 생각하며 마음을 조금씩 키워온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너랑 다시 연락을 시작하고, 둘이 따로 약속을 잡기도 하고.


어느새 시리고 건조한 네 손을 감싸 쥐는게 익숙해졌을 즈음에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오던 날, 네 집까지 너를 데려다주는 길에 문득 네 어깨에 쌓인 눈이 신경쓰여 무심코 툭툭 털어주었던 날.

네가 갑자기 멈춰서서 우리는 무슨 사이냐며 내게 물었었던 그 날.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학한 우리는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매일 늦은 시간까지 전화를 하곤 했었다.

오늘은 수2를 공부 했는데 미적분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든지, 평가원장은 분명 대머리일 거라고 지금 돌이켜 보면 재미난 욕들을 내뱉으며

하루 종일 쌓인 스트레스와 피곤을 풀곤 했다.


그리고 너와의 마지막 전화.

왠지 우리 둘 모두 너무 피곤해서 십 오분 정도만 했었던 그 날의 전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랑해, 보고싶어.'로 마쳤던 그 전화.


9월 모의고사가 끝난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학교가 끝나고 곧장 독서실에서 실모를 풀다가 잠깐 옥상에서 담배 하나를 피고 돌아와

자리에서 충전시키고 있는 핸드폰을 켜자 너한테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문자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네가 교통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음을 삼가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다시 기억이 있을 때가 지하의 장례식장으로 천천히 내려갈 때부터니까,

장례식장이 독서실과 가까워서 아무 생각없이 곧장 뛰었던 것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발이 지옥으로 푹푹 빠지는 듯 했다.

장례식장에서는 생전 맡아본 적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네 자리는 입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방이었다.

입구에 붙어 있는 네 이름을 보니까 가슴 속에서 무언가 물 밀 듯 올라왔다.

누군가 식칼로 내 가슴을 찌르고, 그 곳에 뜨거운 물을 잔뜩 붓는 것 같았다.


근데 참 이상하더라.

네 영정을 보니까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았던 눈물도 메마르고, 찢어질 듯 아팠던 가슴의 통증도 가셨다.

그냥 머리에 심장이 달린 듯 계속 뇌가 쿵쾅거리는 것만 같았다.


절을 하고, 분향을 하고, 너희 아버지께 맞절을 올렸다.

너희 아버지가 말하셨다. 이렇게 빨리 와줘서 고맙다고. 너와는 친구 사이냐고.

나는 답했다. 너랑 사귀던 사이였다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근데 정말 너희 아버지께 죄송한게, 그때마저도 나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시간을 보려고 했는데 핸드폰을 독서실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상했다. 뭔가 좀 이상했다.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많이 이상했다.


장례식장 건물 입구 쪽에 있는 정자로 가 습관처럼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피우고, 피우고, 피우고 또 피웠다.


바닥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워질 즈음, 네 친구가 왔다.

중학교 때 너가 학교에서 참 인기가 많다고 말해주었던, 우리와 함께 학원을 다녔었던 그 친구.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 친구를 보고 나서야, 가슴 속에 무언가 일렁였다.

나랑 그 친구는 서로 껴안은 채로 한참 울음을 쏟아냈다.


그제서야 네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몇 번이고 문장을 쓰고 고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연애도 결혼도 할 마음이 없다.


가끔 여자랑 단 둘이 술 마시고 혼자 자취방에 돌아올 때면

나는 네 생각을 하면서 고되고 어려운 밤을 아프도록 샌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네 모습을 떠올려도 보고, 같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도 보고.

우리의 딸 아이의 남자친구가 인사를 올리러 오는 상황을 떠올려도 보고, 자글자글 주름진 네 손을 잡으며 너랑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려도 보고.


그 친구가 보내준 영상 속 아주 짧게 들리는 네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또 어젯밤을 지새웠다.


이제는 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너랑 찍은 인생네컷 사진들을 보면 한없이 웃음만 나온다.

이렇게 예쁜 네가 왜 나를 좋아해주었을까.


어제 친구 놈이 물었었다.

너를 다시 만나면 제일 하고 싶은게 뭐냐고.


너를 끌어 안고 싶다.

너가 아무리 아파해도, 내 있는 힘껏 너를 내 품에 끌어 안고 싶다.


너의 온기, 숨결, 심장박동이 모두 느껴지도록.



많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