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살면서 이따금 어제의 내가 오늘이 나인지 의심되는 경험을 가져본 적이 있다.

 

“어제 내가 장을 봤었나?” 같은 사소한 것부터 “내가 전에 여기 와본 적이 있나?” 같은 막연하면서도 소름이 끼치는 경험들 말이다.

 

사람에 따라 이런 경험의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은 특수한 경우를 말해보고자 한다.

 

‘매일이 늘 새롭고 즐겁다.’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이 문구는 마치 나의 상황을 비추어 놓은 듯한 문구이다.

 

나는 날마다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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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바뀐다’라는 것은 단순 각오의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진짜, 말 그대로, 나의 인격이 변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의 영혼과도 같은 본질적인 것 아닌가.

 

그런 방식이라면 나는 수도 없이 매일 영혼이 변화하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매일 영혼이 변하는 ‘나’는 과연 무엇을 칭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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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혼만 변한다는 것이다.

 

육체는 변하지 않고, 덕분에 기억의 소실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야, 육체의 변화까지 동반된다면, 그것은 단순 변화의 영역이 아닌 태어남과 죽음의 영역이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만약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하루살이라고 할 법할 것이다.

 

비록 기억의 소실은 발생하지 않지만, ‘경험’의 소실은 발생한다.

 

기억은 유지되지만 경험의 소실로 내가 겪는 감정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매일 일어나고 나서부터 매 순간 ‘데자뷔’를 경험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며 문득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었나.” 와 같은 경험부터 어제도 수행한 업무를 오늘 다시 할 때, 나의 창의성에 감탄하는 등 낯선 이의 창작품을 보듯 마냥 새로움을 느낀다.

 

그 때문인지, 나의 매일 업무 실적을 본다면 편차가 극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 영혼마다 적성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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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고, 평소 잠드는 시간이 되어 나른함과 쏟아지는 피로를 느낀다.

 

그렇게 늘 그랬듯 책상에 놓인 조명의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눕힌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쉽사리 잠이 오질 않는다.

 

내가 나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오늘의 나는 끝인것이다.

 

오늘따라 나의 얼굴, 타던 차량, 사용하던 키보드, 현관문 도어락의 열리는 소리, 삐걱거리지만 푹신한 의자와 같은 사소한 것이 그립다.

 

오늘이 다해가는 것에 아쉬움과 그리움을 느껴 눈물을,

 

 

 

 

아 -

 

어제의 나는 다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