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보기 좋게 보랏빛을 띄기 시작한 새벽녘이었다.

이미 청소를 끝낸 메이드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택에는 모셔야 할 상전이 이 저택의 주인이신 공작 일가만이 계셨고, 보기 드물게 자손이 적어 일도 많지 않았다.

이윽고 요리 준비가 끝나자 메이드 중 한 명인 아리스가 아가씨가 기침하셨는지 살피러 갔다. 

평소의 아가씨라면, 아침 인사를 드리면 곧바로 들어오라고 하실 텐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는 소리에도 답하는 소리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가씨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가씨께서 매우 피곤하신 얼굴로 일어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혹시 몸이라도 편찮으신가요?"

아리스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그녀는 아리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는 놀라서 저택에 상시 한 명은 대기하고 있는 성직자를 불러왔다.
몸이 약한 딸을 위해 공작이 저택에 불러들인 성직자였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성직자가 검사해보고는 그저 몸이 피곤해 피로가 쌓인 거라 하더니 잠깐 기도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문 밖에 와 있던 공작이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원체 몸이 약한 아이라 어떤지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스름한 방 안을 살피다가 딸의 얼굴을 보고는 작게 웃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또 무슨 일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냐. 몸도 약한 아이가 계속 그러다가는 쓴맛을 보게 될 거란다."


'하아, 환장하겠네.'


한편, 마리는 간밤에 자기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남자였으나 어느새 여인의 몸에 들어와 익숙해졌는지 몸이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몸이 약해 그동안 누워만 지냈는지 피곤하다고 난리였는데, 정작 정신은 말똥말똥하기 그지없었다.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도저히 잠이 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이게 윤회라는 건가. 그 떙중들의 말이 맞았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뭐, 어차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죽었으니 되살아 난 거겠지?'


분명 꿈이 아니라 생시인 건 확실한데, 그 현실이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전생에 대한 기억은 남자였다는 사실과, 좋아하던 시, 이야기, 그리고 빈곤하게 살아가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쩐지 여러 사람의 기억이 합쳐진 듯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중원에서 살던 기억인가 싶다가도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마치, 여러 시대를 동시에 살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 아니 그는 어차피 잘 떠오르지도 않는 전생은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러나 이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몸의 기억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기에, 밤새 그걸 생각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허, 참, 내가 대갓집 천금이라니.'


전생에 덕을 쌓아도 너무 많이 쌓은 모양이었다.

나 같은 미천한 사람이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그래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아서 보답이라도 받은 건가.

사내놈이랑 혼인해야 하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배불리 먹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기에 별 불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심경이 복잡하여 얼굴을 찡그린 채로, 날이 밝는지도 모르고 침대에 앉은 채로 밤을 샌 것이었다.

어차피, 피붙이 하나 없이 부평초마냥 떠돌던 인생이었다.

천지신명께서 새 삶을 살게 해주신다는데, 감사하게 살아야지.


그보다는 몸이 얼마나 약하기에 고작 하룻밤을 새었다고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건지, 마음이 무거웠다.
살펴본 바로는 이제 막 지학이 된 나이일 텐데.

어쩌면 기가 약하고 허약한 사람이기에, 내가 귀신처럼 들어온 게 아닐까.

음,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구나.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찰나, 몸의 기억에서 본 공작…… 아니 아버지가 보였다.
색목인 말과 비슷한 것이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몸의 주인이 일상적으로 쓰던 말이었는지 어렴풋이 '쓴맛'이라는 말만이 뇌리에 박혔다. 


그 말을 들은 그가 비몽사몽한 와중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공작이 한 쓴맛이라는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인생의 쓴맛을 알지 못한 채로 높은 누각에 즐겨 오르면서, 억지로 근심을 노래한다. 하지만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뒤에는 말하려다 그만두고, 말하려다 멈추더니 겨우 시원한 가을이로구나 하더라."


공작이 그 말을 듣고 아연해있는 사이, 마리가 고개를 들고 조금 크게 말했다.

"아버님, 피곤해서 그러니 화내지 말아주세요."

공작은 그의 딸이 읊은 문장이 운율은 조금 어색했지만 어느 먼 이국의 글에 통달한 사람이 지은 문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시는…… 네가 쓴 거니?"
"시라니요?"


딸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갸웃거리는 것을 본 공작이 헛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방금 네가 읊은 시 말이다."

"제가…… 무슨 말을 했었나요?"


딸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공작은 그 시를 누가 썼는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 궁금증을 마음 깊숙히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오늘은 아침을 같이 들자는 말만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네에…."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를 뜬 공작을 보며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건가?

"저, 아가씨."

"왜 그래?"
"방금 그 시는……."


그제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마리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지만 다른 세상의 시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사실, 마리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가져다 쓰는 데에 별 죄책감이 없었다.

오히려 이 세상에 널리 퍼트리지 않는 것이 아깝고 못 할 짓에 가깝다 여겼다.

당연히 작가들의 이름도 어떤 형태로든 퍼트릴 생각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꼭 이 세상에도 그대들의 이름을 널리 퍼트리겠습니다.'


"다른 세상…… 아니, 먼 나라의 신기질이라는 시인이 쓴 시란다. 너도 들었으니 알겠지만, 운율이 이상하잖니. 우리 말로 번역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

"그, 그렇군요. 아, 제가 가서 세숫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응. 고마워."

아리스는 마리의 몸단장을 돕기 위한 준비를 하러 방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신기질이라니, 괴상한 이름이네. 정말 먼 이국의 시인의 이름답구나.'



그때 마리의 머릿속에는 온갖 작품들이 떠올랐다.

새로 태어난 이 세상에는 책이라고 하면, 고루한 귀족들이나 읽을 법한 책들뿐이었다.
그나마 그 귀족들도 이야기가 재미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식을 뽐내기 위해 읽는 듯한 내용.

교양이 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본말이 전도된 책들이었다.


재미없는 책에는 가치가 없다.
더욱이 문장의 기교를 뽐내기 위한 글에는.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어.


마리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여인들에게 재산깨나 있는 남편이 필요하다는 건 보편적인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