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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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트 사립 아카데미는 트리마이어 제국에서 가장 대단한 아카데미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최고의 아카데미이기도 하다. 이 명문 아카데미는 트리마이어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지방의 주도인 뉴벨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대에 작은 소도시를 이룬 채 자리 잡고 있다. 육백 년 전통을 자랑하듯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석조 건물들이며 기숙사와 도서관 그리고 교정을 집어 삼켜 버릴 듯 빽빽이 들어서 있는 오래된 거목들의 숲은 두려움과 존경심마저 들게 했다. 


숲에서 시작된 강줄기 하나가 대학을 가로질러 뉴벨로 흘러 들어갔다. 그 강에 자리 잡은 물새들과 송어무리들은 학교의 명물이기도 했다. 강줄기는 끝없이 힘 있게 내려가서 곧 뉴벨과 맞닿은 바다로 흘러가 사라졌다. 활기찬 오전인데도 오늘은 새벽처럼 조용했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간혹 수면으로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뜀박질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오래되고 역사 깊은 건물 중에서도 오래된 건물인 대극장에서 삼천 명의 신입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식 의자가 그들 엉덩이 바로 밑에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올해 신입생들은 최근 들어 숫자가 늘어난 구대륙의 몰락 귀족과 고위 당 관료의 자식들이 많았다. 그 외에는 전통적인 귀족들과 부유층의 자식들이었다. 


마음속으로 여유를 품은 자들이 몇몇 있어 보였다. 간혹가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앞으로 학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혹은 편을 먹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살펴보려는 학생도 있었다. 어떤 이는 절박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런 부류는 군대에 처음 들어간 신병처럼 굴었다. 정말 드물게 아직도 어벙하게 서 있는 부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가슴속에 어떠한 비릿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적어도 이 학교에 왔으니까 남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묘한 우월감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보다 더 심하게 거만하거나 절박한 무리는 그 뒤에 있었다. 학부모들이었다. 혹은 학부모들의 대리인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걸 자식에게 쏟아부었고 어떤 이는 일부만 쏟아부었다. 어떤 이는 진심으로 명예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직위에 맞지 않게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이 학교에 자식을 보냈다는 사실에 거만함에 가까운 승리감을 품고 있었다.


잠시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군악대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카데미 직속 경비대의 것이었다. 곧 연주에 맞춰 값비싼 예복을 걸친 노신사가 나타났다. 그는 키가 작은 두더지 수인이었다. 온몸이 검은색이었고 유일하게 흰색인 것은 그의 코끝에 자라난 몇 안 되는 털밖에 없었다. 그는 온통 권위로 무장한 채 움직이고 있어서 권위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힘은 없었고 늙어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를 따라서 네 명의 수인이 극장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맞은 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신분이 특히나 훌륭한 자들만 이곳에 올라올 수 있었다. 그들은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각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깃발이었고 금실로 ‘명예’ ‘승리’ ‘용기’ ‘전통’ 이라고 박음질 되어 있었다. 


그들은 늑대 수인이 두 명 사슴 수인이 한 명 그리고 토끼 수인이 한 명이었다. 모두 단정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네 명의 학생은 각자의 깃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총장의 뒤편에 다가가서 허리를 꼿꼿이 하고 뒷짐을 졌다. 


아카데미의 총장인 게리사미모프 마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고 마침내 본격적인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그는 가지고 있는 권위를 똘똘 뭉쳐서 얼굴에 모았다. 


“존경하는 친우, 존경하는 학부모,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학생 여러분!” 


그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따라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여러분은 미래의 희망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극장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에 각각 양탄자나 태피스트리 같은 굵은 깃발이 펼쳐졌다. 깃발들은 네 개의 색상의 네 개의 교훈을 담고 있었다. 극장을 가득 채운 학생들은 허리를 뻣뻣이 하고 귀도 쫑긋 세우고 펼쳐지는 깃발을 빠르게 훑었다. 큰 깃발들은 네 명의 우수한 학생들이 가져온 깃발과 크기만 다를 뿐 다른 건 같았다. 


“트리마이어 제국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끌어나갈 인재입니다.” 그가 잠시 침묵하면서 학생들을 빤히 바라봤다. “이렇듯 여러분은 네 개의 가치 아래에서 교육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더지의 길고 지루한 연설이 계속됐다. 학생들은 그 연설을 아무런 버팀목 없이 버티느라 고역이었고 학부모들은 서로에게 연설이 지루하다며 속삭이며 자기들끼리만 보이게 웃으며 연설을 버텼다. 


“...그래서 학생 여러분. 올해 1820년은 우리 가르트 아카데미가 수업을 시작한 지 공식적으로 육백 년이 되는 해입니다. 비공식적으론 더 길지요! 이 학교는 이 나라보다 더 오래된 대학이니깐..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과연 우리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 것인가? 무엇 때문에 이 학교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저는 여러분은 이미 그것의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피로에 빠진 학생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학생 여러분! 우리 학교의 4대 교훈이 뭔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학생들이 숨을 삼켰다. 그리고 준비하고 있던 학생들이 페에 바람을 불어넣고 ‘승리’ ‘용기’ ‘명예’ ‘전통’ 이라고 소리쳤다. 


극장안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을때 침묵을 지키고 있거나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유난히 고풍스러운 사자 한 명과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흰색 가면 부엉이가 그러했다. 그리고 단상에 올라간 사슴을 제외한 세명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아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훌룡합니다. 훌룡합니다.” 총장이 손으로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카데미는 설립 첫해에 트리마이어 제국의 선제후 두 명과 황제 한 명을 배출해냈습니다. 그다음 연도엔 구대륙의 왕가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동방 대륙의 마지막 황제를 배출해냈지요.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왕과 황제 그리고 장군과 선제후를 배출해낸 저희 아카데미는 당연하게도 최고라는 명예를 차지하였습니다. ‘최고’ 그 단어 하나로 충분하지요.”


이 말에 학생들은 박수를 쳤다. 총장의 뒤편에 있던 네 명의 학생 중 세 명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사슴만이 절박할 정도로 열렬히 박수를 쳤다. 


연설은 계속됐다. 박수는 그쳤으며 교수진 사이에서 한 남자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잠들었다. 이제 마지막 소개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최근에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사망하고 마신 무관 담당 윌리엄 포티누스 교수를 대신하여... 지금 이 자리에 그분의 크나큰 자리를 채워주실 새 교수님이 와 계십니다. 소개하겠습니다. 요제프 미쉬피트 교수님이십니다.”


학생들이 박수를 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총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제프 미쉬피트 교수님이십니다!” 


그래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총장은 당황했다. 그의 권위가 무너졌고 그는 대본에는 없었던 요제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요제프 미쉬피트 교수님은 현재는..” 그는 기침했다. ”카스포르 왕국의 장교였으며 격전지로 잘 알려진 동방 전선에서 복무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부 전선에도.. 음.. 그 보다 더 잘 싸우는.. 존재는 없을겁니다!...”


교장이 띄엄띄엄 말을 하는 사이에 다른 교수들이 잠들어버린 요제프를 깨우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제프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결국에는 뺨을 한 대 후려갈겨야 했다. 그가 깨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는 천천히 걸어서 연설대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토끼 수인이 기겁하였다. 흰 늑대는 처음으로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훑어봤고 회색 늑대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신기하게 그를 바라봤다. 사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일단 손뼉을 쳤다. 그러나 총장을 제외하면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앞에 앉아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었다. 요제프는 낡은 군복을 털었다. 지금은 멸망한 카스포르 왕국의 군복이었다. 낡아 해졌고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가 준비할 수 있는 옷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었다. 그를 보낸 사람이 옷을 여러 개 보내줬지만 모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제프는 천천히 총장 곁으로 다가갔다. 총장은 박수를 유도했지만 사슴을 제외하곤 아무도 치지 않았다. 학생들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한 낮에 벼락이 내다 꽂히는걸 본 사람들의 반응 같았다. 


그의 군복에는 꼬리를 위한 구멍이 없었다. 그의 가죽엔 굵은 털이 자라나지 않았고 윤기 나는 털은 머리를 제외하곤 없었다. 얼굴도 툭 튀어나오지 않았고 귀도 머리 옆에 달려 있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차가운 반응에 긴장한 총장이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보시다시피 요제프 교수님은 인간입니다.” 


요제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