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는 다리가 없다. 대신에 뿌리가 있다. 거친 물살에도 휩쓸려가지 않도록, 흙을 단단히 붙잡는 뿌리가 있다.

강렬한 생존 의지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뿌리는 다리를 대신하여 올곧게 하늘 아래에서 서 있을 수 있도록 나무를 고정한다.



하지만 뿌리가 있기에 나무는 움직이지 못한다. 



흙을 여러 손가락으로 움켜쥐는 뿌리는 그 무엇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 아래에 있는 대지도, 나무 자신마저도. 

마치 탐욕스러운 어린아이처럼 모든 걸 움켜쥔 채, 나무는 주변의 그 무엇도 놓기 싫어한다. 



나는 나무의 그러한 집요한 점 때문에 형을 볼 때마다 항상 나무를 겹쳐보곤 했었다.


쓸때없이 욕심이 많지만, 딱히 나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 이상한 부분을 파고드는 모습.


갑자기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말하고는 하지도 않던 공부를 하던 모습, 헌책방에서 때가 탄 시집을 한 덩이이고 오던 모습.

그러면서도 일찍이 돌아가신 엄마, 아빠를 대신해 늘 먼저 집을 나서던 모습. 


꿈과 현실. 나무처럼 형은 그 무엇도 놓지 않았다. 형은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하면서도 동생인 내가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많은 욕심이었다. 야망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보았던 형의 모습은 누구보다 욕심이 많던, 나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형에게서 나무를 겹쳐보지 않게 되었다.


그도 그럴게, 이젠 겹쳐볼 것도 없이 나무가 되었으니까.






자습시간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교실 뒷문으로 담임이 칙칙한 얼굴을 내밀며,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의아해졌지만, 가지 않을 이유도 없던 나는 순순히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복도로 도착하자 엄숙함과 약간의 당황한 기색이 엿보이는 담임이 내게 말했다.

형이 일하다, 크게 다쳐서 입원 중이라고.



드디어 말을 뱉어냈다는 듯이, 약간 편안해진 얼굴을 한 담임은 그대로 내 손에 지폐 몇 장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어서 병원으로 가보라고, 나를 재촉했다.



마치 노숙자에게 던지는 동전처럼 가볍게 뱉어진 친절. 

거절하고 싶었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나를 모욕하지 말라고, 그 면상에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에. 그깟 돈을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보다 비참함이 차올랐다.

손 안에 쥐어진 지폐가 내 기도를 막은 것만 같았다. 목이 메며 눈물이 핑 돌은 나는 비참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방도 챙기지 않은 채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담임이 준 돈으로 택시를 탔다. 학교에 있을 시간에 학생이 택시를 타다니 택시기사는 의아한 듯했으나 군말 없이 나를 태워주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 택시 뒷좌석에 앉은 나는 흐린 유리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다가 다치게 된 걸까, 형은 어떻게 될까.



여러 건물과 사람들이 잔상이 되어가고 떠오른 고민도 함께 나를 지나쳤다. 

거친 물살 한가운데에 놓인 기분이었다. 이대로 나는 어떻게 되어가는 걸까. 바깥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창밖을 바라보았을까. 어느덧 병원 입구에 도착한 나는 고민을 꾹꾹 눌러담고 택시에서 내려 병원에 들어섰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를 연상케 하는 듯한 큰 문, 그 문을 열고 데스크에서 형이 입원한 병실을 향해 조용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흰 타일의 복도를 내디딜 때마다 가까스로 눌러담았던 고민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걸음에 걸음을 이어 마침내 병실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미칠듯한 불안감이 몸을 채우고 있었다.

심장이 북처럼 쿵쾅대고, 더는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절벽 앞에 선 기분.



두려움과 불안을 잠재우며 가까스로 문을 열자, 어두운 병실에 형이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채, 팔뚝에는 내가 모르는 이름의 약물이 통하는 플라스틱 관이 가지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는 주변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방금전까지 느꼈었던 두려움과 불안감은 이상하게도 사라지고, 그 어떤 때보다 냉정해진 상태로 형을 내려다보았다.


형에겐 다리가 없어져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형을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앉아있자, 다시 주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백의를 입은 간호사들이 오가고, 의사가 오고, 공사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서 다리를 다치고 의식을 잃었다고 말하고, 누군가가 오고, 다시 의사가 오고, 말하고,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고, 창 밖이 어두워지고, 흐르고,


거친 물살이 흐르듯이 주변의 사람들이, 풍경들이 모습을 뒤바꾸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나와 형을 뒤로 한 채, 세상의 거친 물살은 계속해서 흘렀다.


나는 앉아있는 동안 계속 형을 생각했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어떤 생각을 했을지, 하지 않았던 형의 생각을 계속했다.


거친 물살이 계속 흘렀지만, 나무는 꼿꼿이 주변을 뿌리로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형을 나무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덧 밖은 다시 밝아져 있었다. 꼬박 하루를 앉아 있었던 나는 가까스로 병실을 나섰다. 걸음이 휘청거렸다. 세상이 빠르게 흐르는 탓이었다.



나는 병원을 나오고, 허름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밥을 입으로 쑤셔 넣었다.



그 뒤로 나는 틈만 나면 나무를 보러 병원으로 갔다. 


언젠가 자신을 병실에 고정한 형이, 나무에서 다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내심 바라면서. 


다시는 돋아나질 않을 형의 두 다리를 생각했다. 



하지만 나무에는 다리가 없었고, 형도 그러했다. 


형은 그 뒤로 계속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식물이 되어 병실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형이 병실에 누워있던 모습, 생전 형의 탐욕적인 야망, 뿌리를 내린 채 병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형의 모습, 거친 물살 속에서도 평온한 그 모습. 


전부 내 꿈, 혹은 상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형이 나무가 되어버린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늘 병실을 들락날락 걸려도 변함이 없는 사실.


그래서 나는 계속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에 다리가 있었다면, 탐욕적이게 모두를 끌어안지 않고, 그저 적당히 자신만의 인생을 갈구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나는 계속 상상만 할 수밖에 없었다.